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9화 (9/119)

〈 9화 〉 9화. 사람이 다섯 명이나 모이면 (4)

* * *

탈주닌자의 업무는 잠시 중단했다. 뭐 무턱대고 쳐들어가서 다 죽일 때야 상관없지만 글자를 모르니 정보를 캐낼 수가 없었다. 이건 그냥 살인병기지 탈주닌자가 아니다.

그래서 나머지 3일 내내 글자공부를 했다. 이틀 동안은 너무 지루해서 중간에 잠들었다. 너무 어려운 말들은 탈주닌자를 아가로 만든다. 2번째 퀘스트 도중에도 계속 배웠는데, 소득은 없었다. 물론 퀘스트는 젖밥이었다.

농촌에 출현한 요괴 메뚜기떼를 잡아달라는 의뢰였는데, 이런 새끼들 하나하나 베면서 죽이긴 귀찮아서 닌자 쥐불놀이 파티로 다 죽여버렸다.

3번째 퀘스트에서는 맹독숭이라는 해괴한 요괴를 죽였다. 독침이 달린 꼬리와 유인원의 몸통을 가진 이 요괴는 몸집이 작지만 민첩하고 상당히 위험한 마비독을 꼬리에 지니고 있어서 날 제외한 파티원들을 힘들게 했다.

특히 새튼 이 병신은 뭣도 모르고 급발진하다 독침 찜질을 당해 돌처럼 굳어버려 업고 오느라 보니타가 고생했다. 새튼이 지금까지 번 모든 돈이 마비독 치료비로 나갔다.

지나는 그래도 눈치는 있어서 이번에는 화살 회수를 하러 나서지 않아 독침에 쏘이지는 않았다.

문제는 팀큐에서 관전 플레이를 하고서도 돈을 일정 부분 받아 갔다는 거다. 오르페랑 보니타는 언제나 일 인분은 해내서 말할 필요도 없다.

“과거를 통해 배우고, 현재를 위해 봉사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3번째 퀘스트가 끝나고 나서야 쉬운 단어들을 읽고 쓸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생각해도 부처가 내린 재능이다.

방금 소리 내서 읽은 문구는 붉은고래 마탑의 선전 구호인데, 이곳이 내 닌자슈트를 만든 기업이다. 마탑 중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인지도가 높다고 한다.

“잘하네. 여기까지 하고 슬슬 가보자.”

오르페가 갑옷을 입은 채로 짐을 들고 일어섰다. 체내 시계로 대충 1시간 안까지 4번째 퀘스트를 위해 길드로 가야 했다. 단풍잎 마을이라는 곳에서 이상한 요괴들이 자꾸 나타난다는 모양이다.

이번 퀘스트는 마차를 타야 할 정도로 먼 곳까지 가야 하는 일이라 노숙하는 것까지 고려해서 짐을 챙겨가야 했다. 당연히 모든 짐은 오르페가 든다.

“닌닌.”

역시 부하가 있으니 편하다. 학교폭력이나 집단따돌림, 매점셔틀은 사라져야 하지만 자발적인 따까리는 국가 공인으로 인정해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본상식 같은 걸 오르페에게 물어보면서 걷고 있었는데 시장바닥에 익숙한 인물이 보였다.

“약초 사세요~ 약초~”

장사꾼치곤 매가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자세히 보니 지나가 이상하게 생긴 잡초들을 몸통만 한 바구니 5개에 담아서 팔고 있었다. 역시 잡일꾼은 부업이 필수인가? 그렇지만 3번의 퀘스트로 돈은 나름 짭짤하게 벌었을 텐데?

“지나 씨?”

오르페가 먼저 말을 걸었다. 말을 걸어볼까 하고 속으로 생각만 했는데 대신 말을 걸어주니 뭐 이렇게 편할 수가 없다.

“어? 오르페 씨! 로빈 씨도? 안녕하세요~”

지나가 반갑게 인사했다. 오랜 시간 있으면서 여러 대화를 나눠 오르페랑 지나는 꽤 친해졌다. 우리 파티원은 성격이 다 둥글둥글해서 큰 충돌 없이 잘 지내는 편이었다.

솔직히 새튼 그 새끼도 이상 성욕자에 투머치토커라 그렇지 반사회주의 야쿠자는 아니었다.

“왜 여기서 약초를 파시는 건가요? 빚이라도 지셨어요?”

“아뇨... 아버지 치료제랑 장비를 좀 사니 생활비가 좀 부족해져서 그래요.”

머쓱하게 말하는 지나의 벨트에는 단검이 두 개 꽂혀 있었다. 씨바, 드디어 샀냐고! 당연히 화살도 샀겠지? 아니라면 부처에 맹세코 죽이진 못하더라도 딱밤 10방 정도는 갈겨 줄 생각이다.

“이제 슬슬 집으로 돌아가서 준비해야겠네요. 두 분 다 있다 봬요.”

지나가 바구니 5개를 다 머리에 이고 일어섰다. 지나는 보기보다 근육량이 많아서 몸이 튼튼했다. 내가 완벽한 닌자바디(body)를 만들기 위해 양궁도 배워봐서 아는데, 활을 당기기가 은근 힘들어서 근력이 높지 않으면 궁수는 못 해 먹는다. 지나 팔뚝의 알통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잠깐만요.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짐 같이 들어줄게요. 어차피 집에 들렀다 바로 오시는 거잖아요.”

오르페가 괜찮냐는 듯이 눈빛을 보냈다. 어차피 난 걷기만 할 거라 상관없다.

“그, 그렇게 안 해주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지나는 빠르게 바구니를 내려놓고 있었다. 몸은 솔직한 법이다. 나에게도 슬쩍 바구니를 하나 건네는 지나를 무시하며 걸었다.

“닌닌.”

물론 그건 오르페가 대신 들었다.

시장을 벗어나 외딴곳으로 10분 정도 걸으니 수풀에 잠긴 무너져가는 초가집이 보였다. 지나가 가져온 바구니의 잡초랑 똑같이 생긴 풀들이 널려있었다. 이거 완전 사기꾼 년이었네.

“아빠~ 나 왔어~!”

지나가 말만 한 덩치로 애교를 떨면서 달려 나갔다. 곧이어 한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우리 지나 왔어~? 어, 저분들은 누구시니?”

반갑게 지나를 맞이하다 우릴 보고 놀란 남자가 멈춰 섰다. 목발을 짚고 있는 지나의 아버지는 퇴폐미가 넘치는 미중년이었다. 도내 최상위 랭크 미중년. 오르페도 두근거...는 평소의 무표정 그대로였다. 오르페는 어쩌면 무성애자인 게 아닐까.

어쨌든 이러면 지나가 파파걸인 게 이해가 됐다. 얼굴이 곧 개연성이다. 아버지께 우리를 소개하는 지나의 신난 모습이 아이 같았다.

“지나에게 두 분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우리 지나를 많이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누추하지만 들어오셔서 차라도 드세요.”

별로 들어가고 싶진 않았지만 이제 와서 빼기도 뭐하니 그냥 들어갔다. 오르페도 별생각 없었는지 내가 들어가니 따라왔다. 지나의 아버지가 바로 차를 내왔는데, 자세히 보니 바깥에 널린 잡초를 물에 우려낸 거였다. 미치겠네 진짜.

“오늘이 4번째 의뢰인가요? 벌써 그렇게 되다니, 우리 지나 진짜 대단해. 곧 진짜 모험가 되겠어.”

쓰담쓰담.

우리와 대화하던 지나의 아버지가 수치를 모르는지 갑자기 지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싱글벙글 웃으면서 손길을 받아들이는 지나. 광적인 가족애다.

뭐 그래도 행복해하는 백성들의 모습은 언제 봐도 보기 좋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어떻게든 웃으며 살아가는 법이다. 부녀의 대화를 적당히 듣다가 바람 좀 쐬고 싶다고 말하고 바깥으로 나갔다. 지나 이 새끼 아빠랑 있으니 말 존나 많이 하네. 개피곤하다.

“후.”

간만에 닌자호흡법으로 숨을 골랐다. 마차에서 좀 자야겠다.

끼익.

낡은 문이 열리더니 오르페가 나왔다. 역시 그녀도 견딜 수 없던 것인가? 천천히 걸으며 풀떼기밖에 없는 주위를 둘러보던 오르페가 내 옆에 섰다.

바람이 불어 사기꾼 지나가 약초라 우기는 잡초들과 오르페의 짙은 파란색 머리칼이 흩날렸다. 광산 이후로 관리를 했는지 머릿결이 좋아진 거 같다.

“처음에는 네가 심장이 얼어붙은 사람인 줄 알았어. 아니란 건 이제 알고 있는데, 그래도 그렇게 웃는 건 처음 봐. 되게 신기하네.”

“닌?”

“지나가 아버지랑 대화할 때 웃고 있었잖아. 그런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는 거 같았어.”

“닌닌.”

“광산에서 교관들이랑 싸운 이유도 잡혀 온 사람들 때문이라고 했었지? 신노빈의 사명이자 탈주닌자의 의무? 난 솔직히 그 말을 그대로 믿지는 않았거든. 오늘 모습을 보니 생각이 달라지네.”

“아부, 곤란.”

“난 아부나 거짓말 잘 못 해. 그래서 평소에 말을 아끼는 거야.”

오르페와 노가리를 까고 있었더니 곧이어 무장한 지나가 짐을 싸고 나왔다.

“아빠 나 갔다 올 게~! 몸조심하고, 웬만하면 집에 있어~!”

“그래그래. 로빈 군, 오르페 양. 우리 지나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 안 해도 괜찮아 아빠~!”

“알겠습니다. 금방 올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닌닌.”

***

몬스터들이 뜯어먹은 썩은 시체들이 끔찍한 냄새를 풍겼다. 스테판은 구역질 나는 냄새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찼다.

“스테판 경, 무슨 일 있나요?”

젊은 날의 과오로 기사 작위를 박탈당한 스테판을 아직도 경이라 부르는 건 세상에서 단 한 사람뿐이다. 스테판은 세월을 그대로 품고 있는 노회한 얼굴로 블로펠트 백작가의 아가씨를 보았다.

아내도 아들도 경멸하며 곁을 떠나 죽을 날만 기다리던 그를 믿어주고 고용해 준 백작가의 후계자, 레이첼 블로펠트는 스테판이 살아있는 유일한 이유였다.

“너무 참혹한 광경에 잠시. 죄송합니다.”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 레이첼은 다시 폐광산의 참극을 보고 있는 남자를 관찰했다. 특수 감찰관이라는 신분을 증명한 남자는 마구잡이로 내팽개쳐진 시체들을 꼼꼼하게 확인하면서 종이와 펜을 꺼내 무언가를 적었다.

“레이디 블로펠트. 이 정보가 통제되고 있다는 건 사실인지?”

“확실합니다. 산에서 몬스터들이 어슬렁거린다며 신고한 주민도 정확히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백작가에서도 이 사건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흔적으로 보건대 많은 사람이 여기서 살아 돌아간 거 같은데, 행방을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소?”

“너무 늦게 발견되어 백작가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흠, 괜찮소.”

멋들어진 연미복을 입은 남자는 붉은고래 마탑의 상표가 새겨진 최신식 파이프를 꺼내고 눈빛으로 레이첼에게 허락을 구했다. 레이첼은 괜찮다는 손짓으로 허락했다.

남자는 파이프에 마나를 불어넣어 불을 지폈다. 망을 보느라 두 사람과 떨어져 있던 스테판이 얼굴을 찡그렸다. 짧은 시간 동안 흡연을 즐긴 남자의 파이프가 꺼졌다.

“후, 살 것 같군.”

“그래서,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보시겠나요?”

“음.”

남자가 고민하듯이 파이프를 톡톡 쳤다.

“말할 수 없는 사항인가요?”

레이첼의 목소리가 눈에 띄게 작아졌다. 레이첼은 이 괴이한 사건의 진실을 꼭 알고 싶었다.

“뭐, 상관없소. 어차피 방침이 정해져 있으니.”

남자가 씩 웃더니 파이프를 가슴 쪽 주머니에 넣었다.

“여기 죽어 있는 이들은 전부 사갈의 꼬리라는 암살단의 간부요. 장골 부분에 작게 새겨진 문신으로 확인했소.

주로 귀족들의 의뢰를 받아 다른 귀족을 제거하는 일로 사업을 하는데, 그렇게 죽은 귀족들의 수가 꽤 많아서 왕국에서도 비밀리에 쫓고 있던 자들이지.

특이한 기술로 신묘하게 움직여 추적이 어려워 정확한 규모조차 모르고 있었소.”

“사갈의 꼬리...”

레이첼의 동공이 커졌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다.

“그들은 비밀리에 암살자들을 육성하는데, 설치된 시설과 널린 도구로 보아 이곳이 그곳 같소.”

“내분 같은 게 있던 건가요?”

“내분?”

남자가 웃었다. 품격 있는 중후하고 낮은 웃음소리.

“그런 게 아니오. 사갈의 꼬리는 전부 다 한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했소.”

남자는 시체들의 위치와 검상, 장비들로 그때 당시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런 게 가능한가요?”

“불가능하지. 이런 건 처음 보오. 아무래도 사갈의 꼬리는 엄청난 괴물을 키우다 잡아먹힌 모양이오.”

“...그런 위험한 살인마가 아직도 영지를 배회한다고 생각하니 무섭군요. 영지 내 사람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특수 감찰관이라 해도 강력한 권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다. 레이첼이 저자세를 취하는 건 어디까지나 직업에 대한 예우와 격식을 차리기 위해서다. 남자가 어떻게 알아내서 이곳까지 찾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백작가의 영지에 일어난 모든 사건은 백작가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한다. 그게 영주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이르갈 왕국의 방식이다.

이곳에서 만약의 사태가 일어나도 그녀에게는 스테판과 광산 바깥의 충성스러운 병사들이 있었다. 남자가 칼을 뽑는 즉시 스테판이 달려올 거고, 레이첼은 스테판이 오기 전까지 남자의 공세를 버틸 자신이 있었다.

“감찰관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따로 있으시다면, 저희 백작가 쪽에서 최대한 맞추겠습니다.”

“좋은 생각이오.”

순순히 수긍하던 남자가 갑작스러운 질문을 했다.

“레이디 블로펠트, 혹시 검성회(??會)의 칠검경(七??)을 아시는지?”

검성회. 왕을 수호하는 왕국 최강의 기사들의 단체다.

“아버지께 들었습니다. 검성회에서도 아주 특출난 일곱 명의 기사들에게 붙여지는 칭호지요.”

“그 칠검 중 하나인 절검경(??)이라는 기사를 아시오?”

“...”

억지로 띤 미소가 묘하게 섬뜩한 남자. 스테판이 무언가를 느꼈는지 검집에 손을 올리고 천천히 남자에게 다가갔다.

“떨어져라. 벽 쪽으로 손을 붙여.”

스테판의 위협에도 남자는 말을 이었다.

“말이 없으시군. 절검경은 근거리에서 적을 베는 솜씨가 기가 막히기로 유명한 기사요. 최근은 중거리에 약하다는 약점마저 극복했다고 전해지지.

절검경을 모르신다면, 절검경의 취미 또한 모르시겠구려. 내 알려 드리리라.”

“...스테판.”

남자가 천천히 레이첼을 향해 다가왔다. 레이첼은 우선 절대로 거리를 내주면 안 된다는 걸 상기하며 뒷걸음질 쳤다. 남자가 허리춤에서 이상한 도구를 꺼냈다.

“스테판! 당장 병사들을 불러요!”

펑!

굉음과 함께 레이첼의 몸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렸다. 남자의 손에 들린 기괴한 물건에서 연기가 새어 나왔다.

“절검경은 죽일 사람과 잡답을 나누는 걸 가장 좋아하오. 왕국에서 가장 은밀한 사건을 다루는 일을 하다 보면 누군가에게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길 정도로 입이 근질근질해지거든.”

레이첼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쓰러졌다.

“아가씨!”

스테판이 울부짖으며 남자를 향해 달려 나갔다. 남자는 레이첼을 죽인 물건을 한 바퀴 돌려서 허리춤에 넣고 스테판을 기다리면서 검집에 손을 올렸다. 압도적으로 우위에 있다 자신하는 자만이 취할 수 있는 오만함.

서걱­!

반응조차 못 한 스테판의 몸이 반으로 갈라졌다. 두꺼운 판금 갑옷조차 한 번에 썰어버린 남자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허억...”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스테판은 남자가 이런 일을 벌인 이유가 뭔지도 궁금했고, 왜 레이첼을 죽여야만 했는지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직위를 박탈당해도 버리지 못한 기사의 심장은 일격에 자신의 생명을 빼앗은 자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

“음?”

“이름이 뭐냐...”

의식의 끈을 애써 붙잡고 있는 스테판의 눈이 흐려진다.

“본크, 제임스 본크요.”

남자가 멋진 미소를 지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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