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화 〉 10화. 단풍잎 마을 (1)
* * *
가는 날이 장날이라는 속담이 있다. 그건 사실이다.
“닌닌.”
길드에서 모여 가볍게 식사를 하고 출발한 우리 파티는 엄청난 인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걷고 있었다. 거센 파도처럼 밀려드는 운명에 맞설지 말지 고민하던 햄릿이 이런 심정이었을까.
백성으로 만들어진 파도라 어쩔 수 없이 처맞아줬다.
“흠, 사람이 정말 많소. 불편하군.”
행인에게 발을 밟힌 새튼이 오큘처럼 주둥이를 내밀었다. 시발,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도 사실이었네. 앞장서서 인파를 뚫던 보니타가 설명해줬다.
“마르톨란 남작가에서 주최하는 축제가 오늘부터 시작하거든요. 평민들도 참가가 가능하고, 지방치고는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는 편이라 다른 지역 사람들도 많이 옵니다. 그래도 오늘만큼 많이 오는 날은 드문데…. 운이 안 좋았네요.”
마르톨란 영주. 저번에 확인한 바로는 야설 마니아에 요괴박이의 책을 읽는다는 것만 빼면 문제없는 깨끗한 사람이었다.
후자의 임팩트가 너무 커서 그렇지 백성들의 평가는 예전부터 높았고, 직접 확인한 자택의 시종들에게서도 학대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 야설 좀 보면 어떤가. 시간이 나면 마르톨란의 컬렉션을 다시 돌려주러 가야겠다. 저번에 불태운 요괴박이의 책은 어쩔 수 없다.
철컥. 철컥.
인파가 갈라지는 거 같아 고개를 들어 확인하니, 판금 갑옷으로 무장한 여자들이 일자로 걷고 있었다. 저게 오르페에게 말로만 듣던 여성 전용 기사단인가.
12명 정도인 소규모 기사단이지만, 덩치가 나랑 비슷한 여자들이 노처녀 특유의 안광을 뿜으며 질서 있게 걸어가니 확실히 위엄이 있어 보였다.
돼지 요괴들에게도 능욕당하는 지구의 그 새끼들과는 차원이 다른 수준.
우리 파티도 왼쪽으로 붙어 길을 열어줬다. 뭐, 군인들이 지나갈 땐 민간인이 길을 비켜줘야 하는 게 당연하니 별로 저항감은 없었다.
턱.
비키려 몸을 트는 지나의 큰 짐이 한 기사의 어깨를 쳤다. 순식간에 흉신악살(????)처럼 얼굴을 찡그리는 기사.
짐이 무거워서 그런지 아무 느낌도 받지 못한 지나는 그냥 걸었다.
“이 쌍년이 장난하나.”
짝!
“꺅!”
기사가 다가와 지나를 멈춰 세우더니 다짜고짜 뺨을 내리쳤다. 짐을 놓치고 바닥으로 쓰러지는 지나.
“닌닌?”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봤다. 설마 어깨빵치고 사과를 안 했다고 뺨을 친 건가?
“미쳤니? 치고 사과도 없이 그냥 가?”
사고방식 자체가 우리랑 다른 년이었다. 폭력이 곧 생활 방식이 된 야쿠자나 할법한 발상이다.
“죄, 죄송합니다. 짐이 커서 몰랐습니다.”
엉거주춤 일어나 사과하는 지나. 얼마나 세게 맞았는지 볼이 새빨갰다.
“하, 이거 진짜 웃긴 년이네. 그렇게 말로만 하는 사과가 어딨니?”
“자, 잠깐만요!”
갑자기 야쿠자가 지나의 멱살을 잡고 들어 올렸다. 당황한 보니타가 말리려 다가갔지만, 야쿠자가 가볍게 무시했다.
잠깐 멈춰선 후 차가운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기사들.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반응으로 보아 이 새끼들은 선민의식으로 똘똘 뭉친 군국주의적 사무라이가 분명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갑자기 옆에서 사자후가 터져 나왔다.
“기사도가 → 땅에 ↗ 떨어졌구나~!!!!!!!”
극도로 흥분한 새튼의 절규가 섞인 고함. 그 엄청난 성량에 멀리서 지나가던 사람들도 멈춰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뭐, 뭐야. 이 년이 먼저.”
새튼의 고함과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당황한 야쿠자가 혓바닥이 꼬였는지 횡설수설하며 지나를 놔줬다.
아직도 어안이 벙벙한지 멍한 표정의 지나. 오르페가 그녀의 손을 잡고 파티 쪽으로 끌었다.
“귀가 막힌 것이오?! 짐이 커서 몰랐다고 하지 않았는가! 별것 아닌 이유로 기사가 왕국의 국민에게 함부로 폭력을 행사하다니!
이리도 난폭한 자를 기사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그대는 명예를 잊은 것이오!!!!”
새튼의 급발진이야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번만큼은 올바른 분노라 생각한다. 역시 문장으로 먹고사는 놈이라 혓바닥이 매끄럽다.
“넌 누군데”
“새튼 남작가의 삼남이자 ‘예술가들의 전당’에 곧 소속될 대문호 에른스트 새튼이오. 말씀하시오! 대체 누구길래 이런 무도한 짓을 하는 것이오!
당장 이름과 소속을 밝히고 그녀에게 예의를 갖춰 사과하시오! 그렇지 않으면 ‘이르갈 왕국 예술가 협회’에 이 사실을 고발하겠소!”
말을 쿨하게 씹어버리며 야쿠자를 압도하는 새튼.
기자들도 아니고 예술가들에게 알려서 뭐 어쩌겠다는지 모르겠지만, 그럴듯한 단체 이름과 ‘고발’이라는 단어를 듣고 야쿠자가 몸을 떠는 걸 보니 협박이 통한 거 같았다.
어쩐지 행동이나 말본새가 묘하게 배운 티가 나긴 했더니 새튼도 귀족이었다.
역시 오타쿠가 험한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귀족의 아들 정도는 되어야 한다. 아니, 근데 가문의 성을 필명으로 삼아 야설을 쓴다고? 진정한 광인은 따로 있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야쿠자가 방관하던 사무라이들을 도와달라는 듯이 쳐다봤다. 한숨 소리와 함께 한 여자가 앞에 나왔다. 풍기는 포스로 보아 사무라이들의 리더다.
“철가재 기사단의 단장이자 피트먼 남작가의 차녀, 아일린 피트먼입니다.”
“으, 음.”
그렇게 새튼에게 자기소개한 아일린의 눈빛이 아주 서늘했다. 거의 쭈쭈바 가게의 드라이아이스 급. 쫄아버린 새튼이 침을 꿀꺽 삼켰다. 최단기 퇴물이다.
“투구를 벗어라.”
아일린이 야쿠자에게 명령했다. 식은땀을 흘리며 투구를 벗는 야쿠자.
짝!
“큭!”
아일린에게 따귀를 맞은 야쿠자가 아까의 지나처럼 쓰러졌다. 그야말로 인과응보.
“똑바로 서.”
담담하게 말하며 부드럽게 손목을 돌리는 아일린. 겁에 잔뜩 질린 야쿠자가 코피를 질질 흘리며 다시 아일린 앞에 섰다.
짝 짜라 짝짝 짝짝짝!
무자비한 리듬감의 구타에 엉망진창이 되는 야쿠자. 이것이 체육계 구타행위의 실상인가?
“...후. 직접 사과를 하도록.”
아일린의 구타가 끝나자, 얼굴이 요괴처럼 일그러진 야쿠자가 지나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요괴 야쿠자라니, 이 얼마나 끔찍한 혼종인가.
“죄, 죄송합니다.”
“똑바로 말해.”
“기사 된 자가 화를 참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괜, 괜찮아요...”
지나가 뺨을 어루만지며 얼떨결에 사과를 받아들였다. 지나의 아빠가 봤으면 속이 터질만한 광경이다.
“새튼 남작가의 삼남이라 하셨습니까.”
갑자기 아일린이 새튼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 그렇소만.”
완전히 뽀삐가 되어버린 새튼. 이제는 한심해 보일 지경이다. 너 이 새끼 믿고 있지 않았다고.
“못난 모습을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부디 무례를 용서해 주시길.”
“흠흠, 알겠소. 내 용서하리라.”
“살펴 가십시오. 가자.”
다시 질서 있게 일자로 서는 철가재 사무라이즈. 나랑 오르페를 제외한 나머지가 기계처럼 몸을 돌려 앞으로 걸었다. 다들 개쫄았구만.
등 뒤에서 아일린과 사무라이들의 찌릿찌릿한 살기가 느껴졌다. 다들 아무렇지 않게 걷는 거로 보아 아무래도 일행 중 나만 느낀 모양이다. 쓰레기들이 뒤지려고 어디서 눈치를 줘.
철가재 기사단과 아일린 피트먼? 다시 만나는 날에는 ‘몰살루트’뿐이다. 오늘은 무고한 백성이 피를 흘리는 사태까지는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그래도 ‘확인작업’은 필요하다. 퀘스트가 끝날 때까지만 이 동네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다.
***
아까 사건 때문인지 마차의 분위기는 썩 좋지 않았다. 광대 새튼이 재주를 부리지 않아 너무 조용한 게 이제는 불안할 지경이다.
“철가재 기사단장 아일린. 들어본 적 있소.”
드디어 새튼이 입을 열었고, 모두가 기다렸다는 듯이 귀를 기울였다. 그래도 나름 분위기 메이커다.
“유검경(???)의 제자요. 몇 년 후 성검회의 일원이 될 거라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자라 하더군.”
“유검경?”
그게 뭔데 씹덕아. 그래도 허세 가득한 칭호가 좀 궁금해 물어봤다.성검회? 칠검경? 듣고 나니 아무래도 SSS급 사무라이 클랜이 이 세계에도 있는 것 같다. 언젠가 싸울 녀석들이니 설명을 들었다.
“...그래서 패검경(??)의 칭호는 황금 갑옷을 입은 기사가 차지했다고 하오. 쾌검경(???)은 최근 실종되었다고 하는데...”
좆노잼.
1시간 넘게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던 설정까지 풀어놓는 인간 트리위키 새튼 이 십새끼에게 질려서 그냥 오르페에게 딴 걸 물어봤다.
“여자 기사단이 남자 기사단보다 많은 이유가 있다 했잖아. 그게 뭐임?”
“음…. 좀 긴데... 마나는 생명의 원천이라는 게 마탑의 정의야.”
하, 씨발. 벌써부터 졸렵다. 이런 걸 기억하고 있는 새끼들은 얼마나 할 짓이 없었던 거지? 갑자기 불행한 유년기를 보냈을 오르페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야쿠자 슬레이어 비긴즈.
“여자가 아이를 배게 되면, 아이가 어머니의 생명력 일부를 가져간다고 해. 모든 생명은 그런 식으로 탄생한다고 배웠어.
그래서 여성 마나 사용자들은 한계에 부딪히거나 완전히 정착하지 않는 한 이성 교제가 금지돼. 남녀 혼성 기사단이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너무 졸려서 눈감을 뻔했네. 잠시 부처의 얼굴이 보였던 거 같다. 티가 났는지 오르페가 말 속도를 올렸다.
“그러니 대다수의 가문에서는 딸아이를 혼성보단 여자 기사단에 넣고 싶어 하는 편이지. 반면 남자는 그런 위험이 없으니 남자 기사단보단 혼성으로 많이 가.
혼성 기사단의 여자들은 대부분 반려자를 찾으러 온 거라 교제가 자유롭거든. 남자 기사단은 내가 알기로는 배우자가 있는 기사가 대부분인 걸로 알고 있어. 전부 나름의 이유가 있는 거지.”
대충 정리하면, 노처녀 기사단, 유부남 기사단, 커플 기사단으로 나눌 수 있다는 거다. 그래서 그 야쿠자도 노처녀 히스테리를 부리며 발광했던 것인가.
하지만 이해해줄 생각은 전혀 없다. 그딴 변명을 일일이 쳐 듣고 있으면 탈주닌자라도 흰머리가 날 수밖에 없다. 난 아직 그러기엔 젊다.
“자, 도착했습니다. 이 그림에 나와 있는 대로 걷다 보시면 단풍잎 마을이 나옵니다. 제가 내려드린 길로 다니는 마차가 꽤 되니, 일 다 보시고 여기서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그럼 이만!”
히히히힝!
운전수가 지도 하나 딸랑 남기고 가버렸다. 바깥을 보니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얼마 안 머니 마을까지 가서 숙박하죠.”
“닌닌.”
퀘스트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피곤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