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12화 (12/119)

〈 12화 〉 12화. 단풍잎 마을 (3)

* * *

­ 깔깔깔깔깔깔

주변이 온통 먹물로 칠한 듯이 새까맣다. 머리를 움직여 확인하니 내 손, 발, 심지어는 몸통조차 안 보였다. 아니, 아예 없는 거 같다. 바닥도 없는 검은 공간에 내 두 눈만 둥둥 떠다니는 것 같은 느낌.

“뭐야? 나 어딨음?”

입이 없는데 어떻게 말할 수 있지? 뇌가 없는데 어떻게 생각하는 거지?

설마 보니타의 얘기를 듣고 깨달음을 얻어 열반의 경지에 올랐나? 하지만 아직 내 사명은 끝나지 않았다. 모든 악의 제거는 물론이고 아직 4번째 퀘스트도 못 끝냈는데 이렇게 지상을 떠날 수는 없다.

­ 그숲이후로직접만나는건오랜만이구나아이야

공간 전체에서 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특정한 장소에서 말하는 게 아니라 온 공간이 말을 거는 것 같았다. 마치 담당일진들에게 둘러싸인 찐따의 심정. 참혹한 집단교육의 현실이다.

­ 내정신파를견뎌낸유일한지구인은너뿐이야

머리가 어지럽다.

­ 대부분은미쳐버려서자살했거든

“씨발...”

정말, 정말로 거슬린다.

­ 너의정신방벽이너무두꺼워서다시말을거느라내심력이아주많이

“띄어쓰기를 하고 말하라고 씹덕년아­!!!!!”

이제는 참을 수 없었다! 씹덕들은 야부리를 털 수 있는 상황이 닥치면 즐거움에 취해 남의 기분 따위 생각 안 하고 속사포로 말을 쏘아낸다. 당장의 예시만 들어도 새튼 이 새끼가 있다. 적어도 새튼은 명확한 발음으로 얘기했지만, 이 미친년의 말은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철저한 문과적 닌자 신노빈에게 띄어쓰기와 문장 부호는 ‘예절’ 그 자체다. 예절을 지키지 않는 문법 야쿠자에게는 단호한 응징뿐이다.

­ 꺄아아아아아악

쩌저정~!

검은 세계가 깨져 나갔다. 곧이어 비명과 함께 모든 소리가 사라졌다. 별 좆밥새끼가 깝치고 있어.

몸에 힘이 돌아오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몽정했는지 바지가 축축했다. 아니 시발, 이게 다 땀이라고? 아직도 야심한 밤인데 잠은 다 잔 것 같다.

이상한 일이다. 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악몽을 꾼 적이 없었는데.

그래, 내가 악몽을 꿀 리가 없다. 이 모든 건 심복인 오큘을 잃고 복수심에 불타는 제육천마왕의 음모다. 내 마음속에 마구니를 심어 놓고 유인원으로 만들려는 비열한 수작임이 분명, 정말로 악랄한 년이 아닐 수 없다.

바지를 닌자탈의법으로 벗으려고 일어섰다가 그대로 천막 안으로 들어오려던 오르페와 눈이 마주쳤다. 내 눈을 보자마자 흠칫하고 놀라는 오르페. 다행히 아직 바지는 안 내렸다.

“깨, 깨어있었어?”

“닌자는 절대 깊게 잠들지 않는다.”

제육천마왕이라는 십새끼 때문에 깼다고 하면 폼이 안 난다. 어디까지나 내 의지로 일어난 것이다. 그 누구도 탈주닌자를 마음대로 다룰 순 없다.

“잠깐 바깥에 나와줄 수 있어? 중요한 내용이야.”

“닌닌.”

대충 챙겨입고 오르페를 바로 따라 나갔다.

이 깊은 분노, 누군가를 베지 않으면 사라지지 않는다. 오늘의 나는 달빛과 씹덕의 피에 미친 신노빈이다.

오르페는 날 울타리 앞으로 데려갔다. 설마 오르페도 엿보기 구멍에 맛을 들인 것인가?

“데려왔어요. 제가 아는 한 가장 강하고, 책임감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제 말해주셔도 됩니다.”

나무판자의 틈새에서 한 쌍의 눈이 튀어나왔다.

“안녕하세요, 모험가님. 라미나라고 합니다. 이번에 마을 사람들 몰래 신청서를 보낸 게 접니다.”

“안녕하세요, 라미나 씨. 떠돌이 검객 로빈입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인육을 먹습니다.”

뭐, 솔직히 예상해서 놀라지 않았다. 히틀러가 호문클루스를 사용해 자살을 위장한 뒤 달기지에서 요괴들의 알을 낳고 있다거나, 오사마 빈 라덴이 렙틸리언이 되어 지하세계에 군림할 가능성만큼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요괴들의 기괴한 상상력은 끝이 없어서, 그들의 광기와 정면으로 맞서야 하는 탈주닌자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생각해야 한다. 7살 때부터 띵크빅으로 영재훈련을 받은 나에게는 기본이었다.

“우리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신화시대 때 저주를 받아 몬스터가 되어버린…. 용족이라 불렸던 이계인들의 후손입니다.”

“그저 신화였던 게...!”

경악하는 오르페. 뭔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서 그냥 웃었다.

“하하. 정말 재밌는 이야기입니타꼬야끼 살법.”

휘릭­!

하지만 ‘요괴’라는 단어는 확실하게 들렸다.

“꺅!”

바로 타코야끼 살법으로 라미나의 눈을 찔렀다. 아쉽게도 요괴가 바로 몸을 빼내서 조금의 손상만 입힌 거 같았다. 역시 인간과는 반응속도가 다르다.

“로, 로빈! 이야기를 좀 더 들어...”

오르페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요괴는 박멸해야 한다.

토숏!

바로 3m쯤 되는 울타리를 뛰어넘었다. 병신들이 기어오르지 못하게 하려고 나무판자에 대못을 박아 넣었지만, 그냥 점프하면 간단하다.

다들 집에 들어가 자는지 아무도 없는 고요한 마을을 둘러본 후, 눈을 붙잡고 끙끙대고 있는 라미나의 머리끄덩이를 움켜쥐었다.

“응앗!”

무기를 안 가져와서 맨손으로 죽여야 한다. 드디어 닌자 핸드 커터를 선보일 때가 왔다.

“아이...”

“그래. 네 아이도 곧 지옥으로 보내주마.”

그래도 스스로 정체를 밝히는 요괴라서 편히 보내줄 예정이다.

“디, 디아나라는 아이는 아직 누구도 죽이지 않았어요…. 먹지도 않았고...”

“닌?”

“디아나는 인육을 먹지 않고도 살 수 있어요. 우리들과는 다르게...”

요괴가 사람을 죽이거나 먹지 않는다? 개가 똥을 끊겠다.

“거짓말, 곤란.”

“거짓말이 아닙니다. 제 목숨을 걸 수 있어요.”

“네 목숨은 내가 가지고 있는데?”

“...하늘에 맹세코 진심입니다.”

보니타의 '요괴는 요괴일 뿐' 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라미나는 뭘 위해서 목이 곧 떨어질 상황에도 ‘디아나’라는 요괴의 보호를 하는 걸까?

“디아나라는 요괴가 네 두목이냐?”

“요, 요괴요? 설마 몬스터? 아닙니다.”

라미나의 눈에 아련한 감정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요괴에게 분노와 쾌락 이외의 감정이 있다고?

“제 여동생입니다.”

요괴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이 있을 리가 없는데? 안 되겠다.

“울어봐.”

“네?”

“울어서 네 인간성을 증명해봐.”

“...저희 종족은 눈물을 흘릴 수 없어요.”

이 새끼들도 오큘처럼 포유류와 무언가의 혼종인 건가? 그러고 보니 아까 용족이라고 했던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저 또한 다른 이들과 똑같이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저도 그저 몬스터에 불과하겠죠. 절 언제 어떻게 죽이신다 해도 상관없습니다. 다만 디아나만큼은 마을을 벗어나서 평범한 인간처럼 살아갔으면 좋겠어요.”

“왜 이렇게 말을 길게 하냐. 그니까 요괴를 인간사회에 풀어놓겠다?”

“디아나는 그 누구보다 용족의 피가 짙습니다. 다른 이에 비해 감시자들의 저주에서 자유로운 편이죠. 로빈 씨... 만큼 현명한 분이 곁에서 상식을 가르쳐 주시고, 올바르게 인도해 주신다면­”

“날 삼장­닌자로 만들겠다?”

“그게 뭔지 잘 모르겠군요...”

아직 죄를 저지르지 않은 악을 교화시킨다. 근데 그것도 탈주닌자의 일인가? 새튼의 경우도 그렇지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일단 마을 사람들을 전부 죽여보고 디아나의 처분을 결정하는 건 어떨까?

“디아나의 인상착의를 말해.”

너무 끔찍하게 못생겼다면 실수로 죽여버릴 수도 있다. 제천대성이 깜찍한 돌원숭이가 아니라 마운틴고릴라였다면 삼장법사도 즉시 목탁을 그 흉물의 머리에 내리쳐 죽였을 것이다.

“일단 15세 정도의 소녀고, 머리카락은 저와 같은 금발에, 눈은 저와 같은 주황색에.”

“닥쳐. 거기까지.”

설명 존나 못하네 진짜. 그냥 자기랑 똑같이 생겼다고 하면 될 걸 왜 이러는 걸까. 어휘 능력이 부족한 걸 보니 요괴는 요괴다.

“감사합니다. 그럼 제가 디아나를 데리고 올 테니 떠날 준비를 해 주십시오. 그 후에 절 죽이셔도...”

“닌?”

“네?”

“탈주닌자는 악을 방관하지 않는다. 너희 마을 전원 몰살행이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그것도 악(evil)의 피에 굶주린 혈참새 탈주닌자 신노빈이라면 더더욱. 이 새끼들을 방관하면 이 마을 주변 백성들의 씨가 전부 말라버릴 것이다.

“마, 말도 안 되는 생각입니다. 비록 퇴화하긴 했으나 저희는 이계인 중에서도 가장 강력했던 자들의 후예들입니다. 부디 생각을 재고해­”

“닌자 손은 약손.”

“깩!”

바로 배때지에 정권을 꽂아 꿈나라로 보내줬다.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는 애들은 수면 부족으로 인해 그런 거니 바로바로 재워줘야 한다.

“로, 로빈. 어떻게 하려고 그러는 거야...”

당황한 오르페의 목소리가 나무 틈새로 흘러나왔다. 일단 라미나를 집어 들고 울타리 바깥으로 집어 던졌다.

휙­ 풀썩!

“라, 라미나 씨?”

“그 새끼 일단 요괴니 꽁꽁 묶어두고, 나머지 일행들을 깨워서 설명해. 전부 무장하고 나와서 마을 입구에 대기하고 있다가 빠져나오는 새끼들은 전부 죽여버려. 울타리 바깥으로 라미나 닮은 애가 날아오면 걔도 끌고 와서 묶어놓고.”

“...또 혼자 싸우려고 하는 거야?”

“누군가는 설명해야지. 시간 없으니 빨리. 아, 그리고 지금 당장 달려가서 내 닌자슈트 좀 가져와 줘.”

“알겠어.”

털레털레 떠나는 오르페.

드디어 실전의 때가 됐다. 급박했던 폐광산과 다르게 시간도 넉넉한 편, 오늘 단풍잎 마을은 마르톨란 축제보다 더 뜨겁게 불타오르는 핫플레이스가 될 것이다.

“­아아.”

그야말로 단풍잎 부수기. 탈주닌자의 꿀잠을 깨운 죗값, 달게 받아라.

***

오르페는 신노빈에게 옷을 던져주고 난 후 일행들을 깨웠다.

“우...”

보니타와 새튼이 크게 하품을 했고, 아직도 어리둥절한 지나가 눈을 비볐다. 재촉하는 오르페였지만, 단잠에서 깨어난 일행들은 피곤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움직일 뿐이었다. 오르페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이래선 상황을 설명하기도 힘들다.

화르륵­!

“어?”

갑자기 울타리 안이 밝아지더니, 불빛이 번져나가기 시작했다. 잠이 깬 일행들이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저거 불난 거 아니오? 이게 무슨!”

벌떡 일어나서 잠옷 차림으로 뛰쳐나가는 새튼. 놀란 오르페가 허겁지겁 새튼을 따라 나왔다.

“무장은 하고 가세요! 어...!”

그들이 본 광경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단풍잎 마을이 불타고 있었다.

타닥타닥!

­ 끼야아아아아악!

­ 이에에에에에에!

­ 크오오오오오오!

나무 타는 소리와 짐승들이 울부짖는 비명이 울타리 바깥까지 새어 나왔다. 급하게 따라 나온 일행들도 그 광경에 소름이 돋았는지 그대로 굳어버렸다.

­ 와자뵷!!!!

그리고, 그 모든 소음을 한 남자의 기합소리가 집어삼켰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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