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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3화 (13/119)

〈 13화 〉 13화. 단풍잎 마을 (4)

* * *

알다시피 파충류는 대부분 물 속성이다. 그 말은 불 속성에 약하다는 뜻.

굳이 어렵게 집에 찾아가서 하나하나 찔러 죽일 필요 없이 상하 관계의 속성을 이용해서 몇 놈 죽이고 시작하는 게 좋은 전략이다. 탈주닌자는 언제나 전략적으로 싸운다.

뜬그림자 상태에서 마을 한 바퀴를 돌아 기름이 가득 들어 있는 창고를 찾아냈다. 무슨 기름인지 모르겠지만 참기름은 아니겠지.

바로 기름통을 들어 올려서 바닥에 부은 뒤 입구를 제외한 울타리에 가까운 집들 위주로 꼼꼼히 기름칠했다.

“­마을에 기름 붓기.”

촌구석이라 그런지 불 피울 도구가 부싯돌만 보였다. 인간이 지성으로 쌓아온 문명을 요괴 따위가 이해할 순 없는 거다. 그들은 그저 야쿠자와 사무라이들의 지식을 이용할 뿐.

딱! 화르륵­!

바로 불이 붙은 걸 보니 꽤 좋은 돌일지도? 불꽃이 붙은 걸 확인한 후 바로 그나마 안전한 마을 중앙으로 달려갔다. 이제 은신하고 지켜볼 시간이다.

“뭐야? 왜 이렇게 밝아?”

“어떤 새끼가 한밤중에... 어, 어? 불이야 불!”

한두 명씩 뛰쳐나오더니 물을 붓는 요괴들. 기름 먹은 불이 그걸로 꺼질 리가 없다. 더 타오를 뿐이다.

활활활!

“악!”

“우갹!”

너무 가까이 다가간 몇 명의 옷에 불이 붙었다. 옷에 붙은 불을 꺼보겠다고 정신없이 내달리는 녀석들의 모습이 변해간다.

옷이 찢기고, 몸에 비늘이 빽빽하게 돋아나더니, 딱딱하고 큰 똥이 나오듯 엉덩이에 꼬리가 튀어나왔다. 돈 받고도 보고 싶지 않은 광경.

“크르르르르르­!”

“섹섹섹섹섹­!”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 파충류 요괴들. 이제는 아예 네발로 달리는 모습이 급박해 보였다. 그 생김새는 지구의 지하세계를 지배했던 파충류 요괴 렙틸리언과 흡사했다. 닌자를 피해 이세계로 넘어온 건가? 뭐가 됐든 요괴를 위한 세계는 없다.

불이 더 번지기 전에 디아나인지 다이노인지 하는 년을 먼저 빼내야 한다. 완전히 요괴화 한 녀석들은 뭐 알아볼 방법이 없으니 내버려 두고, 아직 인간 모습인 요괴들을 둘러봤다.

“언니…. 어디야...?”

찾았다. 2/3 사이즈 라미나 피규어같이 생긴 여자애가 꼬질꼬질한 토끼 인형을 끌어안고 서 있었다. 다행히 언니를 찾느라 마을 사람들과 떨어졌는지 혼자 있었다.

“네 요괴 언니가 보내서 왔다.”

“으앗!”

깜짝 놀란 디아나의 입을 손으로 틀어막았다.

“곧 언니 곁으로 보내줄 테니, 몸에 힘을 빼도록.”

울타리도 불타고 있었지만 내가 전력을 다해 던지면 화상 하나 없이 안전하게 배달할 수 있다. 일단 방해되는 토끼 인형을 빼앗고 불길 속에 던졌다.

“아앗! 그건 돌아가신 엄마아빠가...”

“조용히 하세요!”

바로 꿀밤을 먹여 재웠다. 참고로 난 노키즈존 카페의 VIP 고객이라 애새끼들이 징징거리는 소리를 제일 싫어한다.

“이얍!”

비로소 얌전해진 디아나를 바깥을 향해 전력으로 내던졌다. 요괴니까 땅바닥에 크게 충돌해도 중상은 입지 않을 거다. 아니라면 어쩔 수 없다. 난 최선을 다했으니 만족한다.

이제 구출작업은 완료.

“어메~!!”

“우아아아아악!”

자리를 옮겨 다른 곳들도 살펴보니 상당히 많은 숫자의 요괴들이 불타고 있었다. 혼란이 최고로 증가한 상황. 불이 번지다 보니 마을 전체를 확인하는 건 이제 힘들었다. 슬슬 움직일 때다.

“병신들아! 기름이잖아. 기름! 물을 부으면 어떡해!”

“씨발, 자다가 방금 일어났는데 그딴 걸 어떻게 생각해! 네가 좀 꺼보던가!”

“이, 일단 자리를 옮기자.”

아직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요괴들이 투닥거리며 싸우다 살기 위해 일부러 기름을 붓지 않은 마을의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내가 뜬그림자로 은신해 있는 자리로 말이다.

촥촥촥촥!

“억...!”

“옥....!”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목이 잘리는 요괴들. 가볍게 칼이 들어가는 걸 보니 변신을 안 한 상태에서는 육체의 내구성이 평범한 인간과 같은 거 같았다. 이러면 대기하는 것보다 슬슬 움직여서 빨리 죽이는 게 이득이다. 바로 달려 나가서 무리에서 떨어져나온 녀석들부터 죽였다.

“끄륵....”

이제 나에게 살인은 스포츠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건 평범한 화재가 아냐! 계획적인 공격이야!”

드디어 요괴들이 뭉치기 시작했다. 이제야 눈치챈 걸 보니 퇴화했다던 라미나의 말은 사실인 모양. 먼저 요괴로 변신한 공룡들이 변신 중인 녀석들을 보호하면서 날 찾고 있었다. 남은 수는...대충 30명 정도인가?

몇 명은 입구로 빠져나간 거 같은데 불타고 있는 상태인 데다 모험가 파티가 막고 있을 테니 걱정 없다. 이딴 새끼들 한두 명도 못 죽이면 모험가가 아니라 자택 경비원이나 해야 한다.

“닌닌.”

난 뭉쳐있는 요괴들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누, 누구냐!”

“병신아! 딱 봐도 저 새끼 짓이잖아! 죽여!”

­ 키야호으!

변신이 완전히 끝나 대머리 파충류가 되어버린 녀석들이 괴성을 지르면서 네발로 기어 왔다.

이제 신기술을 선보일 때가 왔다.

'교관몰살' 때 깨달은 사실이 있다. 세상에 믿을 놈은 나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그 격전에서 좆밥 후보생들은 일말의 도움조차 안 됐다. 전부 오르페처럼 그 승리에 자기들도 기여했다고 뇌내망상을 하고 있을 뿐, 사실상 나 혼자만의 승리다.

그러니 대부분의 상황에서 적은 다수고, 난 혼자라고 산정해야 한다. 문제는 내가 아무리 잘 죽여도 10명 이상이 각각 흩어져서 도주한다면 잡기 힘들다는 거다. 적들과 싸우며 백성들을 구출하는 임무라고 한다면 오히려 더욱 어려워진다.

아무리 몰살을 잘해도 두 손 두 다리로는 인질까지 구하면서 싸울 순 없는 거다. 적들이 아예 날 배제하고 내가 지켜야 할 것들을 다굴쳐서 부숴버린다면 난 막을 수 없다.

혼자서 공격과 방어 두 개를 완벽하게 다 해내는 사람이 있다면 탈주닌자가 아니라 부처라고 불려야 한다.

아무튼, 내 해결책은 이거다.

“이제, 모든 것이 닌자가 된다.”

내가 '단수'가 아니게 되어 놈들의 관심을 끌면 된다.

뜬그림자가 뛰어난 위장술인 이유는 단순히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을 띠어서 그런 게 아니다. 지나간 자리에 흐릿한 잔상을 남기면서 흔들리지 않는 ‘자연스러움’을 연출하는 게 가능한 인술이라 그렇다.

이번 건 그걸 응용한 기술이다. 초월적인 속도로 놈들의 주변을 한 바퀴 돌았다.

붕붕붕붕붕!

“놈이 이상한 짓을 한다!”

재빠르게 두 다리로 일어서 균형을 잡는 요괴들.

난 뜬그림자 효과로 인해 잔류하는 잔상들에 마나를 입혀 입체성을 불어넣었다. 더욱 선명한 화질로 요괴들의 주변에 나타나는 신노빈들.

“어? 늘어났다?”

“이런!”

당황한 요괴들이 멈춰 섰다. 이게 내 신기술이다. 마나량 자체가 적었던 삼류의 꼬리들은 상상도 못 했을 기술.

“­ VR닌자, 는 좆같네.”

갑자기 존나 싸 보인다.

“­ 닌자포위진.”

그렇게 정했다.

10개의 분신(잔상)과 함께 놈들을 둘러싼 광경은 그야말로 예술적. 문제는 내가 계속해서 뜬그림자 상태로 다리를 놀리면서 움직여야 분신이 유지된다는 거다. 존나 힘드네 진짜.

“와자뵷­!!!”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기합을 내지른 후 닌자포위진과 함께 달려갔다. 놈들에게는 수십 명의 인간이 돌격하는 거로 보일거다.

물론 실제로 물리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는 건 나뿐이다.

공중앞돌기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놈들의 사이로 파고들었다. 녀석들은 아직도 뭐가 진짜인지 구분을 못 해 혼란스러워하고 있다.

촤촤촤촤촥!

불이 붙은 팔을 잘라내고도 움직이는 녀석이 있어 재생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정보. 하지만 녀석들은 목이 잘려도 다시 움직일 만큼 강하진 못했다. 그렇다면 전부 참수형으로 해버리면 된다.

“이, 이게 뭐야!”

“잡았다! 아니잖아?”

“어딜 보는 거야? 그건 잔상이야!”

요괴라서 그런지 동물적인 육감이 뛰어나다. 존나 큰 세로동공을 희번덕거리며 내 움직임을 읽으려고 애쓰는 녀석들이 꽤 보였다.

스걱!

하지만 어림도 없다. 눈깔로 야리기만 하는 것과 몸통을 움직여 막는 건 다르다.

“­느려.”

씹덕들이 아무리 턱을 쳐들고 노려보며 부당한 폭력에 저항해도 담당일진의 싸대기 한 방에 고개를 숙이는 것과 마찬가지.

눈빛으로는 물리적인 파괴력을 이길 수 없다. 물론 학교의 담당일진들은 전부 사라져야 한다. 난 어디까지나 야쿠자, 사무라이, 요괴들의 담당일진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닌자.

“케에에에엑­!”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잔상에 정신이 팔린 마지막 요괴의 목까지 따버렸다. 전투에 필요한 모든 것을 이용한 탈주닌자의 완벽한 승리.

“과연.”

갑자기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 바로 뒤를 돌아봤다. 검은 비늘의 공룡인간이 두 발로 꼿꼿하게 서 있었다. 아기공룡 듈리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저런 모습일까.

“기사도, 암살자도, 마법사도 아니구나. 이런 건 처음 보는군.”

상위의 포식자가 초저주파를 뿜어내는 거 같은 목소리. 지금까지 싸웠던 도마뱀들이랑 격이 다른 똥폼을 보아하니 이 새끼는 분명 산군급이다.

지금까지 어디 있었던 거지?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던 새끼라 잊고 있었나?

불꽃 때문에 사방이 혼란스럽기도 했고, 닌자포위진의 마나 소모가 생각 이상으로 커서 집중력이 좀 낮아지긴 했다. 아무튼 쟤만 죽이면 진짜 마지막이다.

“이제 너의 움직임이 보인다.”

허세를 부리며 기지개를 피는 마지막 공룡.

동료가 뒤져가는 걸 방관하며 내 움직임을 읽고 있었던 거 같다. 일말의 동료애조차 없는 이기주의적 성향, 요괴다웠다.

우두두둑!

아니 시발?!

갑자기 녀석의 덩치가 1.5배 불어나더니, 기존의 비늘 위에 갑옷같이 단단한 껍질이 자라났다. 2m가 넘는 갑옷 거인으로 변신한 공룡이 날 오른손으로 가리켰다. 대형 손톱깎이가 필요할 정도로 날카롭게 자란 손톱이 갈고리처럼 휘어져 있었다.

“내 이름은 델라미온. 300년 전에는 왕국에서 ‘솔리트론의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전사여, 그대의 이름은?”

어마어마한 적폐 요괴 델라미온. 이딴 틀니공룡이 이렇게 오랫동안 목숨을 연명할 수 있던 것도 이 세계에 닌자가 없어서다.

뭐가 됐든, 먼저 예의를 지켰으니 나도 그에 답해야 한다. 예의는 중요하다.

“야쿠자, 사무라이, 요괴들의 담당일진. 탈주닌자 신노빈이다.”

델라미온의 세로동공이 빛났다.

“내 세월에 맹세코, 널 산 채로 삼켜주겠다.”

송곳니를 드러내더니 왼손에 들고 있던 두건을 머리에 쓰는 델라미온.

그 순간, 지구에서의 추억이 떠올랐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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