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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4화 (14/119)

〈 14화 〉 14화. 단풍잎 마을 (5)

* * *

무장을 마친 오르페와 보니타가 입구 앞에 섰다. 매캐한 연기가 두 사람의 코끝에 닿았다.

“로빈 씨 혼자서 괜찮을까요? 몬스터 마을이라니... 처음 들어봐요.”

지나가 후방에서 활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활과 단검, 가죽 갑옷으로 무장한 그녀의 옆에는 화살통 5개가 쌓여있었다.

“로빈이 어떻게 하지 못한다면, 그건 진짜로 방법이 없는 거예요. 계속 여기 남아서 싸우겠다면 믿는 수밖에 없어요.”

창을 쥔 오르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단풍잎 마을에서는 계속해서 짐승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같이 싸워야죠. 그냥 걱정돼서 그래요.”

유약한 성격의 지나답지 않게 확신에 찬 말이었다. 보니타가 씩 웃어줬다.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가 빨리 처리하고 도우러 가면 되죠. 로빈 씨는 강하니 혼자서도 잘하실 겁니다.”

“맞소. 우리라면 금세 승리할 수 있을 거요!”

아직도 무장을 끝마치지 못하고 낑낑대며 걸어오는 새튼을 셋이서 동시에 쳐다봤다.

“다들 왜 그렇게 보는 거요? 예술가의 손길은 섬세해서, 시간이 좀 걸리는 법이라오.”

“그러시겠죠.”

매정한 오르페의 반응에 입맛을 다신 새튼이 보니타의 뒤에 섰다. 순식간에 조용해진 일행.

용족. 길드의 도감에는 단단한 피부와 날카로운 이빨, 손톱을 가진 중급 몬스터라 적혀있다.

‘4번째 퀘스트인데, 중급이라니.’

식은땀을 흘리던 새튼이 조금 떨어진 나무에 묶인 여자를 쳐다봤다. 기절한 라미나의 겉모습은 조금 까다로운 새튼 기준에서도 아름다운 미녀였다. 이 여자가 용족이라는 것을 아직도 믿을 수가 없었다.

“자, 좋게 생각하죠. 4번째 퀘스트로 이렇게 큰일을 해낸다면, 5번째까지 갈 필요도 없이 모험가패를 발급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애써 긍정적으로 말하는 보니타. 여기 모인 모두가 어려운 싸움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각자가 각오를 다지며 입구를 노려보던 그때.

쉬익!

공중에서 무언가가 날아왔다.

풀썩!

라미나를 닮은 소녀는 다행히도 들풀이 가득한 곳에 떨어졌다.

“아마 디아나라는 아이일 거예요. 새튼 씨, 팔과 다리를 묶어주세요. 라미나와 떨어진 곳에 놓아주시면 될 거 같아요.”

오르페의 반응이 제일 빨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디아나의 팔과 다리를 묶는 새튼. 손길이 섬세하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디아나의 작은 팔다리가 상처 없이 조심스럽게 묶였다. 새튼이 땀을 닦으며 일어났다.

“헛!”

새튼의 앞에 한 파충류 인간이 서 있었다. 날카롭게 잘린 밧줄을 들고 있는 그녀는 라미나였다.

“공격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녀를 저지하러 달려오는 일행 앞에 라미나가 무릎을 꿇었다. 당황한 새튼도 다리가 풀렸는지 라미나 옆에서 주저앉았다.

“여동생을 구하는 일입니다. 저도 돕고 싶습니다. 부탁합니다.”

라미나가 애정이 가득한 눈으로 디아나를 보았다. 그 모습에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보니타의 눈빛이 흔들렸다.

“알았어요.”

오르페의 말을 듣고 나서야 라미나가 일어났다. 새튼은 아직도 앉아 있는 상황.

쿵! 쿵!

입구의 출입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일행이 전투태세를 취하면서 숨을 골랐다.

“로빈 씨가 위험한 거 아니오?”

불안해진 새튼이 드디어 무거운 엉덩이를 들고서 보니타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델라미온이 보이지 않아요.”

불타는 단풍잎 마을을 살피던 라미나가 대신 대답했다.

“델라미온? 누구인가요?”

“용족 최강의 전사. 500년 동안 인간사냥을 해온, 단풍잎 마을의 살아있는 전설입니다. 로빈 씨가 패배했다면 델라미온이 울타리를 넘어왔을 겁니다. 오르페님 말씀대로 그분은 엄청난 강자였군요.”

오르페와 짧게 대화한 라미나가 무언가를 감지했는지 귀를 쫑긋 세우더니 두 손을 벌렸다. 날카로운 손톱이 금세 자라났다.

“옵니다.”

쾅!

출입문이 부서지더니 7명의 용족들이 뛰쳐나왔다. 네발로 달리는 그들의 몸이 새까맣게 탄 거로 보아 불길을 뚫고 나온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의 도움이 되리라. 오르페가 창대를 겨누고 그들을 노려봤다. 지나가 쏜 화살을 신호로 전투가 시작됐다.

***

어린 시절, 유인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나약해진 나를 진정한 남자로 만들어 준 한 명작이 있었다.

­ 돌연변이 닌자공룡~! 돌연변이 닌자공룡~! 무적의 전사들!

그것은, 어린 시절의 추억.

­ 부처의 계시를 받은 한 고고학자가 첨단과학과 불경의 힘으로 부활시킨 공룡 사총사!

그 추억을.

“와...”

“음?”

이 좆같은 요괴새끼가 더럽혔다!

“와자뵷­!!!!”

참을 수 없는 분노를 터뜨리며 놈에게 달려갔다. 당장 저 녀석의 두건을 빼앗아야 했다!

“공포에 미쳐버린 건가.”

델라미온도 지지 않고 몸을 잔뜩 웅크린 후 코뿔소처럼 돌진했다. 엄청난 속도에 녀석의 두건이 휘날렸다.

마음 같아서는 물러서지 않고 그대로 들이박아 충돌사고를 일으키고 싶었지만, 폐기되는 차량은 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번에는 저 새끼가 토마스고 내가 고라니다.

“닌자 줄행랑.”

타타타타타타­

어쩔 수 없이 달리던 속도를 천천히 늦추고 충돌하기 직전에 왼쪽으로 빠져나갔다.

샥!

“하!”

순식간에 델라미온의 손톱이 내가 있었던 곳을 긁었다. 순식간에 다섯 갈래로 파이는 땅. 시발, 이렇게 빠르다고?

도움이 될만한 게 없나 빠르게 주위를 둘러봤다. 좆같게도, 불길로 둥글게 뒤덮인 이곳은 이미 타오르는 투기장이 된 상태였다. 닌자가 엄폐물도 없이 싸운다? 전투력이 반은 깎여나간다.

쐐액!

날카로운 녀석의 손톱에 긁힌 허벅지의 보호대가 떨어져 나갔다. 바로 몸을 틀지 않았으면 오뚝이가 될 뻔. 밀착된 틈을 타 심장 근처에 검을 박으려 했으나, 델라미온이 갑작스럽게 몸을 틀더니 꼬리를 휘둘렀다.

붕!

일말의 차이로 피하고 뒤로 빠졌다. 이 새끼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안잡힌다.

빠르고, 강했다. 생김새는 짝퉁이지만 실력은 진짜였다. 괜히 흥분해서 아무 생각 없이 날뛰었으면 델라미온의 때 가득 낀 손톱에 갈려 5등분의 닌자가 됐을 거다.

“난 수천의 사람을 죽였다.”

길게 뻗어있던 델라미온의 손톱이 줄어들고, 녀석의 주먹이 껍질로 뒤덮였다. 변신하는 틈을 타 3개의 비수를 날렸지만 녀석이 풋워크로 간단히 피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우리 종족의 생존을 위해서였다.”

가드를 취하고 거리를 좁히는 델라미온. 도망갈 구멍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불길 근처로 몰아붙이는 솜씨가 꽤 노련했다.

“넌 왜 마을 사람들을 죽인 거지?”

붕붕­

몰아치는 잽이 귓가를 때렸다. 닌자공룡이 아니라 복싱공룡이었다. 한 대라도 맞으면 절굿공이에 맞아 쫀득해진 인절미가 될 게 분명. 공격이 너무 무거워서 검으로 쳐낼 수도 없었다. 이런 무식한 공격을 칼등으로 막는 순간 내 팔이 수수깡처럼 부러진다.

뜬그림자를 써 조금씩 잔상을 남겨 피하면서 도망갈 기회를 노렸다.

“마을은 너희들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그냥 보내주려고 했지.”

교장 선생님처럼 쉬지 않고 훈계와 연타를 날리는 델라미온. 모든 교장 선생님이 이 정도의 공격력을 갖추고 있었다면 훈화 시간에 조는 아이는 없었을 거다.

“혹시, 우리가 사람을 먹는 몬스터이기 때문에 죽인 건가?”

유효타도 넣지 못하는 무기를 들고 움직이기엔 너무 긴박한 상황. 그냥 들고 있는 검을 델라미온에게 던졌다. 죽이려면 일단 살고 봐야 한다.

텅!

가볍게 녀석의 외피에 튕겨 나가는 검. 아 닌자도 어딨냐고! 지금 멋지게 까까시가 등장해서 닌자도를 넘겨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쓰레기 닌자인 그년이 나타날 리가 없다.

“우린 태어난 순간부터 저주에 걸린다. 식인을 하지 않으면 이성을 잃어버리는 저주.”

턱턱턱턱턱턱!

공격을 피하면서 주먹으로 몸통을 몇 번 두들겼지만, 꿈쩍도 안 했다. 오히려 유효타는 내 주먹에 들어왔다. 이런 미친 딜 교환이 세상에서 어딨냐.

“우리에게 식인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의식이다. 알고 있었나?”

화악!

이대로는 승산이 보이지 않았기에 위험을 감수하고 불길로 뛰어들었다. 존나 뜨겁네 진짜. 그래도 두건으로 얼굴을 감싸서 큰 화상은 입지 않았다.

“다시 묻겠다. 대체 무슨 권리로 마을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거지?”

끊임없이 설교하는 델라미온, 이 새끼는 진짜 '틀니'다. 하지만 탈주닌자는 적의 말장난에 절대 어울려주지 않는다. 불길이 꺼져가는 길로 달려갔다.

“흡.”

몇십 분 동안 불타더니, 이제는 안개 마을이 되어버린 단풍잎 마을. 뜨거운 연기에 숨이 막혔지만 아직은 참을만했다.

“내 마을에서 도망칠 곳은 없다.”

불길을 뚫고 다가오는 델라미온의 발소리가 들린다.

끼익.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집이 보여서 창문으로 들어갔다. 안에는 질식해서 죽은 요괴가 다섯 마리 있었는데, 꽤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거 보니 촌장 정도의 위치에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하, 좆됐네 진짜.”

델라미온과 싸우기 전부터 마나를 너무 많이 소모했다. 닌자포위진 이 멋진 쓰레기자식. 언제나 그렇지만, 똥폼이 남자를 죽인다. 이제 남아있는 무기는 비수 3개 정도. 이 집에 있는 거라고 해봤자 천으로 된 옷 몇 개와 조금 튼튼해 보이는 큰 금고뿐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솔직히 막막하다. 도망치는 건 쉽지만, 난 여기서 저 새끼를 막아야 한다. 저런 대요괴가 다시 세상을 활보하는 순간 수많은 백성의 피가 강처럼 흐르게 될 게 분명하다. 그것만큼은 막아야 한다. 난 탈주닌자니까.

“후, 후.”

닌자호흡법으로 다시 정신을 가다듬었다. 죽는 한이 있어도 죽인다. 그렇게 정했다.

쾅!

델라미온의 몸통박치기에 문이 산업용 철구에 맞은 것처럼 박살 났다. 재빠르게 금고 뒤에 몸을 감추고 숨을 죽였다. 기회는 단 한 번.

쐐액­!

델라미온의 손톱이 금고를 향한 순간, 젖먹던 힘까지 전부 짜내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닌자 비보잉.

휘리릭!

“타코야끼 살법.”

푹!

금고에 오른손이 박힌 델라미온의 어깨를 타고 올라가 오른쪽 눈을 비수로 찔렀다. 대요괴라도 눈은 말랑말랑했다.

서걱.

이어서 내 아랫배를 델라미온의 왼쪽 손톱이 베고 지나갔다. 검붉은 피가 쏟아져 나왔다. 선지해장국 한 그릇이 뚝딱 나올 정도. 순대가 안 나온 게 어딘가.

바로 마나를 아랫배로 흘려보내 상처 부위를 감쌌다. 이러면 조금은 지혈이 된다. 재생능력이 없는 게 한이다.

크우아아아아아!

괴성을 지르며 눈에 박힌 비수를 빼내는 델라미온을 뒤로 하고, 눈앞의 옷가지를 돌돌 말아서 배에 꽉 묶었다. 아직이다. 아직은 결정타가 아니다.

다시 비수를 꺼낸 사이, 델라미온이 금고에 박힌 오른팔을 왼팔의 손톱으로 끊어냈다. 정말 과감한 판단력이다. 요괴라 그런지 녀석의 오른팔의 피가 빠르게 멎었다.

조금의 시간도 주지 않겠다는 듯이 돌진해오는 델라미온. 맞으면 즉사라서 겨우 몸을 움직여 피했다.

“훅, 훅.”

피가 너무 빠져나갔는지 어질어질하다. 닌자호흡법으로 중화시키고, 한쪽 시야를 잃고 주춤대는 델라미온에게 달려들었다.

붕!

녀석이 거리를 벌리기 위해 꼬리를 휘둘렀다. 씨발, 갑자기 신발에 돌이 들어갔다.

“우갸악!”

결국, 피하지 못하고 직격당했다. 자폭 스위치를 누른 악당처럼 멀리 날아가는 나. 손에 쥐고 있던 비수는 떠나간 지 오래다.

풀썩.

오르페에게 인술을 좀 더 열심히 알려줄 걸 그랬나? 죽을 때가 되니 별생각이 다 난다.

어쨌든 마지막으로 눈깔 하나는 더 가져가야겠다. 오른팔이 고장 났는지 잘 안 움직여서 왼팔로 마지막 비수를 꺼냈다. 신노빈 인생 최후의 타코야끼 살법.

이 새끼는 자토이치가 아니니까 내가 눈깔 하나만 더 없애면 전투력이 급감할 거다. 장님이 된 델라미온 정도는 숙련된 전사 몇 명이 동시에 공격하면 죽일 수 있다. 어쩌면 오르페가 얘를 죽일 수도 있겠지.

몸에 힘이 점차 빠져나갔다. 폭주족의 차에 치였을 때랑 똑같은 감각이다.

"..."

죽는 게 두렵진 않다. 단지 사명을 다하지 못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안 오는 거지?

“끙...”

간신히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하악…. 하악...”

델라미온이 잔뜩 붉어진 왼눈을 빛내며 금고 옆에 고여있는 내 피를 핥고 있었다. 갑자기 노망이라도 났나?

­ 단토의 눈이 붉어지더니, 끔찍한 비명을 지르면서 뛰어올라….

아, 그렇구나.

고철 로봇처럼 삐거덕대는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이…. 좆같은 요괴 새끼...”

죽기는 씨발, 탈주닌자가 이렇게 갈 수는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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