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화 〉 15화. 단풍잎 마을 (6)
* * *
“오르페 양! 조심하시오!”
새튼의 고함에 오르페가 잽싸게 창을 놓고 두 손으로 방패를 들어 올렸다.
끼이익!
용족의 손톱이 방패를 긁었다.
“하.”
오르페가 혀를 찼다. 한 놈을 다 잡은 순간에 다른 녀석이 와서 훼방을 놓았다. 다행인 건 흥분한 용족의 시야가 좁아져 후방에 있는 지나와 그녀를 호위 중인 새튼에게 관심을 쏟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죽어!”
텅!
푸른 피부의 용족이 손톱을 회수하고 주먹으로 방패를 내리쳤다. 물러서지 않고 버티며 오르페가 다른 한 놈을 봤다.
“아, 아, 배고파.”
오르페의 창이 배에 꽂힌 노란 피부의 용족이 중얼거리며 벌떡 일어섰다.
“식사, 식사, 식사 시간이다.”
정신이 완전히 나간 노란 용족이 오르페의 창을 뽑아낸 다음 피를 질질 흘리며 네발로 달려들었다. 야생동물과도 같은 움직임.
우우웅!
“큭!”
피할 수 없다고 직감한 오르페가 노란 용족의 몸통 박치기를 정면으로 받아냈다. 갑옷에 걸린 마법 때문에 공격자가 튕겨 나갔지만, 가해진 충격은 오르페가 그대로 받았다.
후들거리는 몸을 강제로 진정시키는 오르페, 기회를 엿보고 있던 푸른 용족이 그녀의 방패에 박치기를 가했다.
텅!
결국 방패를 놓치고 쓰러지는 오르페.
‘멍청한.’
먼저 덤벼든 용족 두 명을 죽일 때 체력과 마나를 크게 소모해서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노빈과 훈련하면서 솜씨가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지만, 다수를 상대하기엔 아직 오르페의 능력이 부족했다.
“현기증 나니까 빨리 먹을래!”
주둥이를 크게 벌리며 오르페를 향해 다가가는 노란 용족.
푝!
지나가 쏘아낸 화살이 녀석의 눈을 정확히 꿰뚫었다.
“에에에엑!”
괴성을 지르며 쓰러지는 노란 용족. 동료의 죽음을 본 푸른 용족이 눈알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가까운 나무 뒤로 숨었다.
“하아…. 하아...”
숨을 고른 오르페가 일어서서 전황을 살폈다. 오르페가 죽인 용족이 둘, 지나가 하나, 보니타가 하나. 그렇게 총 7명 중에서 4명을 죽였다.
두 용족은 보니타, 라미나와 교전하는 중이니 푸른 용족만 처리하면 전투가 수월해진다.
“훅, 훅.”
노빈에게 배운 걸 되새기며 오르페가 창을 집어 들었다.
***
“마을에 바베큐 냄새가 진동하잖아! 도대체 무슨 축제가 열리고 있는 거야!?”
델라미온을 자극하기 위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 짜냈다. 어차피 인육을 탐하던 요괴들일 뿐이니 고인모독은 아니다.
크르르르...
이성과 어휘능력을 잃은 델라미온의 왼눈이 날 향했다. 내 피를 핥던 혀가 주둥이로 쑥 들어간다. 그렇게 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키야아아아악!
완전히 맛탱이가 간 노친네가 되어 세발로 돌진했다. 팔이 하나 없으니 균형을 못 잡아 존나 느렸다.
“와라.”
바로 몸을 틀기 위해 오른 다리를 뒤로 뺐다. 마지막 순간에 포기했으면 절대로 이기지 못했겠지.
“ 비기.”
결국 가장 중요한 건 의지다. 전투력 차이야 어쩔 수 없는 거고.
“승마의 인술.”
타이밍에 맞춰 바로 몸을 틀었다.
쐐액!
델라미온이 내 닌자슈트를 살짝 스칠 때, 난 녀석의 머리에 묶인 두건을 붙잡고 녀석의 등에 올라탔다.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인명을 앗아간 특급 탈것 델라미온은 즉살 처분 뿐이다.
딱딱!
이런 시발, 등껍질이 단단하고 울퉁불퉁해 엉덩이가 아프다. 일단 녀석을 멈추기 위해 녀석의 마지막 눈알을 향해 비수를 찔러넣었다.
쿠아아아아아!
이성은 죽었어도 전투본능은 그대로인지, 비수가 눈을 후벼파기 직전에 몸을 오른쪽으로 기울이는 델라미온.
휘리릭
지면과 충돌하기 전에 낙법으로 빠져나왔다. 하마터면 쥐포가 될 뻔했네.
“닌닌.”
그래도 이제는 육체적으로 여유가 좀 생겼다. 아랫배를 바로 지혈해 더 이상의 출혈을 막고, 마나로 부러진 뼈를 고정해 붙인 게 효과가 있다. 마나의 힘으로 신체 재생은 불가능해도, 자연회복력 상승까지는 가능했다.
반면 델라미온은 기울이는 자세 그대로 바닥을 굴러서 뇌진탕이 왔는지 머리를 계속 좌우로 흔들었다.
“도리도리 잼잼.”
이제 승산이 완벽하게 나에게 넘어왔다. 더는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아줌마 조깅하듯이 뛰어 델라미온에게 다가갔다.
쐐액! 쐐액!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왼손의 손톱을 꺼내 휘두르는 델라미온. 정확도가 떨어지는 공격을 맞아주는 건 학부모협회의 공세를 받은 창작물 속의 악당뿐이다.
푸슉!
바로 등 뒤로 이동해서 왼눈을 찌르고 후퇴했다.
케엑! 케엑!
맹인이 된 델라미온이 울부짖으며 떼를 썼다. 하지만 난 녀석의 엄마가 아니라 들어줄 수 없다.
“야, 넣는다.”
이제 힘이 빠졌는지 팔도 못 휘두르는 델라미온에게 다가가 손으로 아가리를 벌렸다. 충치가 진짜 존나 많네.
“이빨 모조리 압수.”
그 흉측한 것들을 비수로 깨부쉈다. 손톱에 비해선 별 볼 일 없는 내구성. 마지막으로 비수를 아가리에 깊숙이 찔러넣었다.
“에벳…. 에베벳....”
이상한 소리를 내면서 쓰러지는 델라미온. 녀석의 두건을 벗겨 주머니에 넣었다.
“두건도 압수. 십새끼야.”
컨셉도 못 지키고 복싱질이나 쳐 하는 삼류 새끼가어디서 돌연변이 닌자공룡 흉내를 내.
완전히 숨이 멎는 것까지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Requiescat In Pace(사요나라).”
그래도 처음 만나는 강적이니 어느 정도 예우는 갖춰줬다.결국 이 모든 경험이 피와 살같은 전투력 향상에 기여한다.
앞으로 델라미온같이 균형 잡힌 딜탱캐를 만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조금은 감이 잡힌 느낌이다.
“하...”
흥분이 가라앉아서 그런지 몸에 힘이 천천히 빠진다. 연기 때문인지 슬슬 졸리네.
“닌닌!”
정신 똑바로 차려 병신아!
적어도 마을 바깥까지는 나가야 한다. 닌자탈착의법을 사용해 떠돌이 검객 로빈으로 위장한 뒤 마을의 출입문을 찾아 걸었다.
***
‘멋짐’을 위해 최대한 여유로움을 가장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도마뱀 7마리의 시체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몇 놈의 몸이 부르르 떨리는 거로 보아 방금 처리한 모양. 아무래도 우리 조원들이 성공한 거 같다.
다들 바닥에 눕거나 앉아 쉬고 있길래 먼저 아는 척을 했다.
“마을…. 부셨다고...”
“로빈!”
요괴의 피로 범벅이 된 오르페가 가장 먼저 일어나 반갑게 맞이해줬다.
“미안. 바로 끝내고 합류하려고 했는데, 용족들의 저항이 상당히 거셌어. 난 아직 멀었나 봐.”
“닌닌.”
남은 요괴들을 확인하러 주위를 살폈다. 라미나는 가슴에 피를 흘리며 나무 근처에 기대어 있었고, 디아나는 언제 풀려났는지 라미나 옆에서 손을 휘두르며 징징대고 있었다.
라미나가 날 보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정말로…. 델라미온을 이기셨군요.”
“그 새끼? 좆밥이었어.”
죽은 요괴는 말이 없는 법이다. 꼬우면 이겼어야지.
“역시, 대단하세요.”
“로빈 군! 정말로 믿고 있었다오!”
“말도 안 되네요…. 전 이만큼 잡고 지쳤는데….”
각자 한마디씩 해주는 조원들. 조별과제를 하드캐리 해줬으니 이 정도 ‘참 잘했어요’는 기본으로 받아야 한다.
“이제... 전부 끝났군요. 정말 감사합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라미나가 나에게 고개를 숙였다.
“닌닌.”
이제 라미나만 죽이면, 모든 게 끝난다.
“로빈 씨. 디아나를 부탁합니다. 제 여동생에게 강하게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세요. 제가 가진 건 이거뿐이지만, 부모님께 아주 귀한 물건이라고 들었습니다.”
라미나가 특이하게 생긴 목걸이를 건네줬다. 일단 멋지게 생겼으니 받자.
“음...”
태연하게 말하고 있기도 하고, 인간과는 신체 능력이 다른 요괴라서 조원들도 그냥 크게 다쳤구나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지만, 검붉은 피가 밑으로 계속 새어 나오는 걸 보니 라미나는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죽을 게 분명한 상태였다.
이러면 내가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
“로빈 씨가 어떤 강적을 만나도 항상 승리하기를 매일같이 하늘에 기도할게요. 제가 어떤 곳에 있든지.”
의미심장한 말을 하며 미소짓는 라미나. 나머지 조원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 그녀가 발걸음을 돌렸다.
“언니? 어디 가! 같이 가야지!”
종종걸음으로 달려오는 디아나를 라미나가 제지했다.
“난 따로 갈 거야. 하고 싶은 일이 있어.”
“같이 가야지!”
“디아나! 징징대지 마!”
소리 지르는 라미나의 표정이 고통스러워 보인다.
“언제까지 나랑 있을 수 없다는 거 알잖아!”
“그래도...”
“내 말 아직도 이해 못 했어? 이제 널 돌봐주기 지쳤다고! 이제 싫다고!”
“언니...잉...”
“이제 나를 위해 살겠어. 따라오지 마.”
아예 따라올 생각조차 못 하게 하려는 듯이 숲을 향해 달려가는 라미나. 망가진 몸으로 저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앙…. 언니...! 으앙!!!!”
“조용히 따라오세요!”
너무 시끄러워서 꿀밤으로 잠깐 재웠다. 어린애 울음소리는 요괴의 초음파만큼 끔찍하다.
“우리도 슬슬 갑시다. 어디에서 치료라도 받아야겠어요.”
디아나를 오르페에게 넘겨주고 조원들을 재촉했다. 솔직히 온몸이 쑤셔서 죽을 맛이다.
“슬프네.”
디아나를 업은 오르페가 라미나가 들어간 숲을 쳐다봤다. 눈치 빠른 녀석.
짐을 챙기고 서서히 갈 채비를 마칠 때였다.
털썩.
나밖에 듣지 못할 아주 먼 거리. 누군가가 쓰러졌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무아미타불."
인간의 마음을 가진 요괴도 있는가? 그렇다면 부처께서도 보듬어 주실 것이다.
***
바로 마차를 타고 가지 않고 주변의 마을(요괴 마을 아님)에 들렸다.
붉은고래 마탑이 마을병원도 운영하고 있어서 적당히 큰 마을에서는 그곳에 가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보니타는 먼저 말을 타고 돌아갔는데, 모험가 길드에 빨리 알려야 할 만큼 중요한 일이기에 그렇다고 한다.
잘하면 길드에 도착하자마자 모험가패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숙소에 머무르며 피로를 해소한 우리 조원들의 상태는 이제 다들 좋다.
내 몸도 상당히 회복되어 며칠만 지나면 금세 멀쩡해질 거 같다. 강철같은 정신과 육체는 탈주닌자의 기본소양이다.
“어서 일어나.”
옆 숙소에서 오르페를 끌어안고 자는 디아나를 깨웠다.
오르페가 많이 달래줘서 그런지 잘 따르는 디아나.
"오늘의 수업을 시작한다."
그녀의 언니가 나에게 교육을 부탁했으니, 난 디아나를 철저히 교육해줄 의무가 있다.
“말해라. 신념과 사명은 무엇인가.”
“우음...”
눈을 비비면서 하품하는 디아나.
“대답해!!! 신념과 사명이란!!! 무엇인가!!!”
“모, 모르겠어요!”
“모르면 알때까지 공부하세요!”
그녀에게 인간의 삶을 알려주려면 아무래도 시간이 좀 걸릴 거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