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16화 (16/119)

〈 16화 〉 16화. 탈주닌자라 불러주오 (1)

* * *

“그럼 좀 있다가 예약한 마차 앞에서 보는 거로 해요.”

지나가 손을 흔들며 떠났고, 새튼이 고개를 끄덕이며 펜과 종이를 배낭에 넣었다.

푸스킨 마을에서 아무 생각 없이 보낸 지도 일주일, 충분히 휴식을 취한 일행들은 오늘 오전까지만 쉬다 마르톨란으로 돌아가기로 정했다.

뭐, 너무 쉬긴 했다. 델라미온과의 싸움 이후로 마나가 이따금 요동쳐서 진정시키는데 시간이 많이 들었다. 라면을 끓이다 물이 넘칠 때 불을 줄이는 것처럼 조절해보니, 어떻게 진정되긴 했다.

오늘 아침 다시 확인해보니 마나량이 단풍잎 마을 이전보다 5배 정도 늘어난 느낌. 나머지는 디아나에게 ‘인간수업’ 강의해 주기랑 가까운 대장간에서 새 장비 구매하기 정도밖에 안 했다.

“음.”

바로 힘을 시험해보고 싶었지만, 푸스킨은 사건·사고가 일어나지 않는 곳이었다. 마을 경비병들이 시간 날 때마다 간트인가 뭔가 하는 고스톱을 쳤고, 동네 꼬맹이들이 와르르 몰려나가 패싸움을 할 정도로 평화롭고 한적한 마을이다.

굳이 사건을 일으켜 새로운 힘을 시험하는 것은 사무라이 새끼들이나 하는 짓이니 참기로 했다. 가끔 찾아오는 휴식을 즐기는 것도 탈주닌자의 덕목이다.

“나도 잠깐 놀다 올게.”

디아나의 머리를 빗겨주던 오르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3시간 정도 남았으니, 몸풀기도 할 겸 마을 구경이나 하러 떠났다. 당연히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 순찰이다.

이렇게 평범한 마을에도 똬리를 틀고 있는 게 ‘야사요(야쿠자, 사무라이, 요괴의 줄임말)’다. 특히 요괴 이 십새끼들은 형태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어린애의 침대 밑이나 아버지의 비밀금고 속에 은신해서 기회를 엿보고 있을 수도 있다.

시발, 마운틴고릴라(아빠)의 비상금도 요괴가 가져간 게 분명하다. 그때 당시에는 손도 안 댄 나만 처맞았는데, 다시 생각하니 분노가 치민다.

“닌닌.”

처음 가본 이세계의 광장은 시끌벅적하니 사람이 아주 많았다. 마르톨란 마을에서는 오르페 수련과 신기술 연습, 퀘스트에 정신이 팔려 이런 곳에 올 시간이 없었다. 광장에선 음식점이나 상점도 보였지만, 이상한 도구나 생물을 가지고 볼거리를 제공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게 이세계의 거리 공연인가? 축젯날이 아니면 엄격하게 통제되는 마르톨란과는 다른 맛이 있다.

“보십시오! 제가 직접 길들인 짧은 꼬리 여우입니다!”

이상한 생물이 여자의 모자 위에서 몸을 흔드며 춤췄다. 요괴인가? 원래 요괴라면 무조건 죽여야 한다 생각했지만, 이번 단풍잎 마을의 일로 인해 마음을 바꿨다.

지금은 ‘인간수업’ 수강을 완료하거나, ‘노예화’가 된 녀석이라면 굳이 죽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그러니 새튼의 이상성욕도 길들여진 요괴를 향한 거라면 어느 정도 봐주려고 한다.

물론 너무 어이 없는 짓을 한다면 실수로 새튼을 죽여버릴 수도 있다. 그건 어쩔 수 없는거고.

뭐, 따지고 보면 디아나도 내 명의로 소유한 포켓(pocket) 요괴다. 타인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면 남의 포켓요괴를 건드는 건 안 된다. 삼장법사의 애완요괴 제천대성을 요괴라고 죽이면 안 되는 것처럼.

­ 이것은~ 불세출의 용사 이야기~ 오오오~ 이르갈 왕국의 한 제독 이야기~ 오오오~

“닌?”

아름다운 미성이 광장에 울려 퍼졌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소리의 방향을 따라 걸었다. 혹시 거리 뮤지컬이라도 하는 건가? 뮤지컬은 언젠가 꼭 보고 싶었는데.

­ 리랜드! 리랜드! 타락한 왕국의 수호자~ 리랜드~ 리랜드! 불의에 항거해 왕명을 어긴 자! 리랜드! 리랜드! 그는 누구인가? 리랜드! 리랜드! 민초를 위해 전장에 나선 자~!

뮤지컬은 아니었고, 웬 여자가 돗자리를 깔고 앉은 관객들 앞에서 기괴한 안무를 펼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관객 뒤에 선 한 남자는 큰 두루마리를 잡고 서 있었는데, 아마 저 두루마리에 쓰여 있는 글을 여자가 읽고 노래를 부르는 거 같다.

­ 용감한 리랜드! 충성스러운 심복들과~ 30척의 전투선을 이끌고~ 왕국을 지킬 거라 다짐하나~ 오오오~ 코름갈드 왕국의 전투선은 250척~! 저항할 수 없는 전력차! 절망스러운 전력차!

뮤지컬 대신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아 나도 관객들 사이에 앉았다. 일단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예쁘다 보니 보고만 있어도 재밌긴 하다. 관객들이 상당히 많았는데, 대다수가 남자인 걸 보아 나랑 똑같은 생각으로 여기 온 거 같다.

위문공연 생각나네. 뭐든 얼굴이 중요하다.

­ 포기할 수 없었던 리랜드! 물러설 수 없었던 리랜드! 감시자의 옛 협곡을 지나~ 공포의 바다를 건너~ 해룡 베헤나에게 도움을 청하네~! 얼어붙은 그녀의 심장을 녹이는~ 리랜드의 강한 열망과 의지~!

해룡? 이것도 요괴인가? 그게 아니라면 신수(??)인가? 처음 들어보는 놈들이 너무 많아 어디부터 어디까지 요괴인지 모르겠다.

­ 마침내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굽이치는 파도’에서 벌어지는 전쟁~ 오오오~ 베헤나를 탄 리랜드가 앞장서 돌격하니~ 코름갈드의 전투선 두려워 흩어지네~

“어우씨.”

부처의 얼굴이 보여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이게 또 이야기가 길어지니 졸리다.

대충 들어보니 30척의 아군 전투선과 덩치 큰 괴물 하나로 적선 250척을 이겼다는 거 같은데, 구라도 정도껏 쳐야 한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냉정해서, 현실성이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순간 관심을 끊게 되니까.

“자, 여기까지 '검의 연주' 1부였습니다. 잠시 쉬면서 창작을 위한 후원금을 받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관객 뒤의 남자가 바구니를 들고 다가오더니 관객들의 돈을 걷었다. 하긴, 세상에 공짜는 없다. 대충 주머니를 뒤적일 때, 한 사람이 불쑥 일어서더니 돈을 걷는 남자에게 물었다.

“내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소. 정말 중요한 안건이오. 해룡 베헤나는, 순결한 처녀였소?”

시발 깜짝이야. 자세히 보니 새튼이었다. 관객이 하도 많아서 이 새끼까지 있는지 몰랐다.

“아, 아시다시피 이 작품은 현실에 있었던 사건을 배경으로 했습니다. 그러니.”

“순결했소?”

“실존했다고 전해지는 생명체니, 저희는.”

“순결했소?”

“...그렇습니다. 제 작품에 나오는 베헤나는 확실히 순결한 처녀입니다.”

“그럼 됐소.”

확인받은 새튼이 남자의 바구니에 돈을 넣었다. 그러고 보니 새튼이 안부를 묻는 척하면서 디아나를 오묘하게 본 거 같기도 하다. 시팔거, 빨리 모험가패를 받고 파티를 깨야지.

“이야기 구연(??)은 처음 보오? 표정을 보아하니 적응을 못 하는 거 같소.”

“닌?”

갑자기 옆에 있던 남자가 한 대 패고 싶을 정도로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었다. 누더기를 걸치고 저렇게 처웃으니 뭔가 이질감이 느껴진다. 남자의 몸 주변에 이상한 기운이 맴돌았는데, 마법 도구 같은 걸 가지고 있는 거 같았다.

뭐, 험한 세상에서 비장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처음 들어보는 거 같은 반응이구려. 내 설명하는 걸 좋아하니 특별히 설명해주겠소.”

“존나 필요 없을 거 같습니다.”

“거절할 필요는 없소. 이야기 구연이란, 문학가의 이야기와 음유시인의 목소리가 합쳐진 작은 공연이라 할 수 있소.”

아, 벌써 졸리네. 그렇지만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악당도 아닌 새끼를 패 버리기는 좀 그렇다.

“인지도가 적고 불러주는 곳이 없는 젊은 예술가들이 돈을 벌기 위해 머리를 쓴 거지.

지금과 같이 관객들과 소통할 시간이 주어져, 자신들의 이야기와 노래가 얼마나 훌륭한지 평가받을 수도 있소.

듣자 하니 어떤 구연은 바로바로 평가를 받고 이야기를 수정해 관객의 입맛을 맞춘다고 하더군.”

“네. 그렇군요. 정말 궁금했습니다. 전 이만.”

이대로는 오전이 지날 때까지 자버릴 거 같아 바로 일어났다.

“잠깐.”

갑자기 남자가 내 팔을 붙잡았다. 이 새끼도 설마 훈계를 참지 못하는 델라미온과 같은 과인가?

“이야기 구연은 왕국의 모든 지역에서 볼 수 있소. 그걸 모른다니 이상하군.”

“네?”

“혹시 이르갈 왕국 사람이 아니오?”

“그, 제가 변방 사람이라서 그럽니다.”

“변방에서도 이야기 구연을 한다오. 어느 지역이든 예술가들은 있는 법이니.”

아 시발, 오르페에게 제대로 물을 걸 그랬다. 567 이 고아 새끼는 진짜 아는 게 너무 없다.

“아무튼 변방에서는 없습니다. 먹고 살기 바빠서 예술가들이 다 굶어 죽었거든요.”

“그런 변방은 들어본 적이 없는데.”

“모르면 공부하세요.”

수상하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는 남자. 뭐 이렇게 집착이 많은지 모르겠다. 나도 지지 않고 눈을 크게 떠서 눈싸움을 받아들였다. 원래 이런 건 박력이다.

“로빈? 무슨 얘기 중이야? 늦었어. 우리 빨리 가야지.”

등 뒤에서 오르페의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오르페가 디아나의 손을 잡고 서 있었다. 아직 오전이 지나기에는 시간이 좀 남았는데, 저렇게 말하는 걸 보아 대충 상황을 눈치챈 모양이다.

“...아내와 딸이오?”

“그런데요.”

“따님 머리색이 두 분과 다르오.”

“제가 능력 좋은 바람둥이라서요. 그럼 바빠서 이만.”

뭐가 됐든 타이밍이 좋다.

탁.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나갔다.

“저, 관객분?”

아, 돈을 안 냈네. 다시 다가가서 문학가의 바구니에 돈을 넣어줬다.내 동작 하나하나를 지켜보던 남자가 품 안에서 비싸 보이는 파이프를 꺼내더니 흡연을 하기 시작했다.

“...요즘 일 때문에 민감해져서 말이오. 그냥 한 번 물어봤소. 너무 신경 쓰지 마시오.”

저 새끼는 왜 옷을 안 사고 저딴 거에 돈을 쓰는 걸까. 생각해보니 군대에서 담배 사느라 월급을 탕진해 적자만 남기고 떠난 선임도 있었지. 비흡연자인 나는 모르는 세계가 있다.

“뭐, 없는 곳도 있겠지. 잘 가시오.”

연기로 도넛을 만들던 남자가 손을 휘휘 저었다. 새끼가 존나 캐묻더니 쿨한 척하네. 별 대꾸 안 하고 오르페와 합류했다.

“말 잘했어. 존나 귀찮게 굴더라.”

“그럴 거 같았어. 저 사람은 누구야?”

“자세한 내용, 곤란.”

솔직히 설명하기도 귀찮다. 오르페가 흡연 중인 남자를 노려봤다.

“저 파이프, 붉은고래 마탑에서만 생산하는 고급품이야. 평민이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냐.”

정체를 숨기고 놀러 나온 귀족? 완벽하게 하려면 파이프를 쓰지 말았어야지. 근데 솔직히 좋은 파이프가 있는데 별 잡것을 쓰기는 나도 싫을 거 같다.

이제야 흡연자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게 됐나? 더 신경 쓰기는 귀찮아서 오르페, 디아나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런 무자비한 학살자가 이런 곳에서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문화예술에 돈을 지불할 리 없지. 촉이 빗나갔군.”

귀가 너무 좋은 탓에 남자가 뭐라 중얼거리는 것도 들렸지만,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내용 같아서 넘겼다. 저렇게 혼자 지껄이는 걸 전문용어로 ‘독백충’이라 한다.

“어, 저거 닭꼬치 좀 사고 가자.”

걷다 보니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가게를 발견했다. 튀김옷은 없지만, 닭고기에 양념을 발라서 구워낸 게 맛있게 보였다. 여섯 개 정도 산 다음에 오르페에게 두 개를 건넸다. 디아나가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더니, 손을 뻗었다.

인형을 버려서 그런지 아직도 날 안 좋게 생각하는 거 같다. 뭐, 언젠가 적당한 거로 하나 사주면 되지 않을까. 낡고 더러웠으니 별 중요한 물건은 아니었겠지.

“신념.”

물론 난 그냥 줄 생각이 없다. ‘인간수업’은 원래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법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정하는, 지켜야 할 규칙.”

“칙?”

“이에요.”

그녀의 손에 쥐어지는 닭꼬치 하나.

“사명.”

“사람이 죽기 전에 반드시 이뤄야 할 목표에요.”

“참 잘했어요.”

닭꼬치 두 개를 다 넘겼다.

“열심히 공부하다 보면, 네 언니도 만날 수 있단다.”

부처의 품에 안겼을 때 말이지. 나도 감정이 있어서 어린애에게 언니가 죽었다는 말은 하기 힘들다. 언젠가 자연스럽게 알게 되지 않을까.

그때가 오면 디아나도 내 아량에 감사하게 되겠지. 난 이미 충분히 좋은 스승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먹거리 탐방을 하다 마차를 타고 떠났다.

***

“닌자기상법.”

한숨 자고 일어나니 마르톨란이었다. 해가 져 사람들이 슬슬 집에 들어갈 시간이었는데, 축제가 아직도 한창인지 온 도시가 시끌시끌하다. 이미 광장에서 시간을 좀 보내서 그런지 보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흐아~! 그럼 가보겠슈.”

운전수가 크게 하품 한 번 하더니 떠났다. 평소같이 무표정한 오르페와 불안해 보이는 디아나, 피곤해 보이는 새튼과 지나. 전원 이상 없이 마르톨란으로 복귀했다.

“뭐, 내일 점심쯤 다 같이 길드에 가서 보니타 씨나 만나죠. 그럼 이만.”

다들 아무 생각도 없어 보이길래 먼저 해산하자고 말하고 떠났다. 뒤에서 오르페랑 디아나가 쫄래쫄래 따라오는 걸 보니까 시종이 늘었다는 게 실감 났다. 디아나에겐 뭘 시키는 게 좋을까? 설거지와 빨래 정도는 어린애도 할 수 있겠지?

“닌?”

그렇게 디아나를 위해 열심히 생각하고 있었는데, 멀리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지나야! 지나 맞지?! 어이구, 어떡해. 지금까지 어디에 가 있던 거야?”

“네? 저 퀘스트 때문에…. 아주머니. 무슨 일 있어요?”

“어서 집에 가봐! 기사님들이 몰려오고…. 분위기가 장난 아냐.”

“집이요?! 아, 아버지는 어떻게 되셨나요?”

“나도 잘 모르겠어... 며칠 전부터 기사님들이 널 찾더니….”

처음 보는 아줌마와 지나의 대화가 심상치 않았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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