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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18화 (18/119)

〈 18화 〉 18화. 탈주닌자라 불러주오 (3)

* * *

이른 점심, 퀘스트 첫날 모였던 치킨집에 지나를 제외한 모든 조원이 모였다.

지나는 아빠와 함께 경비대에서 증언하고 있어 오지 못했는데, 원하는 대답을 내놓기 전까지 고문 같은 걸 당하고 있진 않을까 살짝 걱정됐다.

원래는 따라가서 살펴보려고 했으나 설명을 들은 오르페가 날 설득했다.

지나는 견습 모험가에 지나 아빠는 농민 출신이라 철가재 기사단 학살에 관여할만한 연줄도, 전투능력도 없다고 판단해 해코지는 당하지 않을 거라고 한다.

나도 별 중요해 보이지 않는 백성을 의심하기보다 탈주닌자라고 성명서를 밝힌 놈을 먼저 찾을 거 같긴 하다.

하지만 지구의 과학수사대라도 오지 않는 한 날 잡기는 힘들 거다.

증거가 될만한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았다고 자신하고 있다.

“다들 지금까지 정말 고생 많았어요.”

마지막으로 음식점에 들어온 보니타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평상복을 입고 있었다. 키가 커서 그런지 슈퍼모델 같다.

뭘 먹고 자라면 저렇게 커지는 걸까? 가족을 죽인 단토에 대한 증오심? 알 수 없다.

“보니타 씨가 가장 고생 많으셨죠. 많이 배우고 가요.”

오르페가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불판 위에 익어가는 닭고기만 보며 침을 삼키고 있는 디아나도 얼떨결에 오르페의 행동을 따라 했다.

갑자기 그녀를 위한 ‘인간수업’이 땡겼지만, 보니타도 있으니 다음으로 미뤄야겠다.

“다들 정말로 고맙소. 여러분들이 없었다면 전 몬스터들의 한 입 식사가 됐을 거요. 하하하!”

그건 진짜니까 웃지 마 병신아.

“자, 모험가패가 발급됐어요. 지나 씨에겐 제가 따로 드리도록 할게요.”

보티나가 모험가패를 하나씩 나눠줬다. 아무래도 5번째 퀘스트를 건너뛰고 승급한 모양, 길드의 판단에 만족하며 모험가패를 들어 올렸다.

동색으로 빛나는 동그란 모험가패는 크기나 모양이 지구의 동메달과 별 차이 없었다.

“로빈 씨, 진짜 괜찮으신가요?”

임무를 완수했다는 안도감과 거짓말을 했다는 죄책감으로 가득해 보이는 보니타. 왜 이러냐면, 내 ‘단풍잎 마을 부수기’의 실적을 전부 보니타의 공으로 돌려서 그렇다.

난 마을을 불태우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머리 좋은 모험가로 길드에 기록됐겠지.

“상관없습니다. 명예나 실적에 얽매이고 싶지 않습니다.”

세속적인 것에 얽매이는 순간 내 사명과 신념은 사라진다. 악은 사라지지 않고, 탈주닌자는 쉬지 않는다.

끊임없이 생명을 불태워 악과 맞서야 하는 삶, 그게 탈주닌자의 삶이다.

내가 쉬어야 할 때는, 이 세계에 낙원이 강림하고 난 뒤다.

미시적으로 원하는 게 있다면 까까시의 닌자도를 가지고 싶긴 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존나 가지고 싶다.

얼마나 가지고 싶은지, 까까시가 파돌리기송을 추며 닌자도를 돌리다 ‘이거요? 원하시면 줄게요. 제 파.트.너가 되고 나면? 응훗훗훗~!’라고 말한 다음 닌자도를 타고 날아가 버리는 꿈도 꾼 적 있다.

그날 분노로 잠을 못 이뤄 ‘인간수업’을 좀 이른 시간에 진행했다. 특훈에 디아나도 기뻐했었지.

까까시, 다시 마주치면 절대 곱게는 안 죽인다.

“로빈 씨의 뜻이 그렇다면…. 그래도 제가 개인적으로 보상해주고 싶어요. 원하시는 게 있으면 말씀하세요. 제가 가능한 거라면 해드릴게요.”

“특별히 원하는 건 없습니다. 그냥 지나와 지나 아빠만 잘 챙겨주세요.”

“길드에 강하게 말해볼게요. 길드가 힘을 쓰면 경비대에서도 지나 씨와 아버님을 함부로 대하지 못할 거에요.”

길드가 은근 호감이다. 보니타 씨만 좋은 샐러리맨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백성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단체가 하나쯤은 있다고 믿고 싶다.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단체가 하나라도 있으면, 세상은 조금씩이라도 좋아지니까.

“그거면 충분합니다.”

최대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오르페의 입꼬리도 살짝 올라가는 거로 보아 녀석도 내 SSS급 미소에 반한 모양.

“...로빈 씨는 영웅이라 불려도 손색이 없으신 분이에요.”

정면에서 이런 말을 들으니 부끄럽긴 하다. 고개를 돌려 닭고기를 포크로 뒤적이는 디아나를 노려봤다. 울상을 지으며 슬그머니 젓가락을 내려놓는 포켓요괴.

“자, 그럼 오늘이 우리 일행의 마지막 식사로군. 쩝쩝. 지나 양이 없는 게 아쉽지만, 쩝쩝. 인연이라는 건 생각보다 끈끈한 법이니, 쩝쩝.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요. 쩝쩝.”

새튼이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며 가장 먼저 고기를 맛봤다. 먹든지 말하든지 한 가지만 하라고 병신아. 어떻게 이렇게 행동 하나하나가 아니꼬울 수 있을까?

귀족 집안의 삼남이라면 눈초리 받기 딱 좋은 위치라 철이 일찍 들어야 정상 아닌가?

역시 ‘절대’라는 건 없다. 병신은 어떤 상황에서도 병신이기 마련이다.

그야말로 병신 보존의 법칙.

­ 쩝쩝쩝쩝.

새튼의 한 입을 신호로 다들 식사를 즐겼다. 순식간에 찾아온 정적. 먹을 때는 조용해지는 게 사람이다.

한 순간이라도 쉬면 음식을 빼앗긴다는 그 공포가 인간을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적당히 먹었을 때 새튼이 입을 열었다.

“단풍잎 마을 사건이 끝나고 곰곰이 생각해봤소. 역시 나는 모험가가 될 체질이 아닌가 보오.”

그걸 이제야 안 새끼도 레전드다.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더니.

“그래도 작품에 대한 영감은 꽤 얻은 거 같소. 몬스터…. 이제는 알 거 같소.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고, 이해할 수 없는 적이오.

라미나 양과 디아나 양 같이 이성이 있는 존재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폭력적인 본성에 의해 움직이는 생물체 같더군.”

이건 좀 의외다. 항상 생각이 없어 보이는 거 같이 굴더니, 나름대로 괜찮은 해답을 냈다. 이 정도면 기특할 지경. 그래도 이딴 새끼한테 쓰담쓰담을 해주긴 싫다.

“한편으로는 그런 몬스터들을 무찌르며 사람들을 수호하는 전사들이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졌소. 이제부터는 영웅들에 대한 이야기를 써볼까 하오.

몬스터가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지, 그들과 피부를 맞대는 전사들이 어떤 심정으로 맞서는지 알리고 싶소.”

새튼의 눈이 결의에 차 있었다. 난 이 눈을 안다. 내가 처음으로 닌자를 접한 순간에 저랬으니.

누군가가 그랬다. 꿈꾸는 자는 힘이 세다고. 새튼도 나처럼 강해졌으면 좋겠다.

“시간이 날 때마다 양피지에 몇 자 적긴 했소. 제목도 정했는데, ‘강철을 마시는 새’요. 괜찮지 않소?”

대체 뭔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꽤 멋져 보이는 제목이다. 하지만 나라면 독자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무서운 요괴가 이렇게 많은데, 전사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로 정했을 거다.

이게 천재와 둔재의 차이다.

“책의 첫머리도 정해놨소. 들어보시오. 세계를 불태우던 감시자들의 광기도 잊히고, 용사들의 무덤도 진흙 속에 묻혀버린...”

“1절만 하시죠.”

오르페가 적당히 끊어줬다. 은근히 새튼 담당 일진이다.

“보니타 씨. 저와 오르페, 포켓요…. 디아나는 마르톨란을 떠나 더 위험한 곳에 가 백성들을 수호하기 위해 싸우려고 합니다. 근방에서 그런 곳이 있습니까?”

“위험한 곳... 변방에 가까운 골돈 남작령에서 모험가와 용병, 숙련된 전사를 모으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길드에서도 요청장이 왔는데, 응답하는 사람들이 적었어요.”

“어떤 일 때문입니까?”

“내전이 일어나 골돈에 남아있는 사병의 수가 적어졌고, 그 틈을 타 강도 집단이 연합해서 영지를 노리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다음 목표가 정해졌다. 야쿠자가 설칠 때는, 언제나 닌자가 나타나서 정리해줘야 한다.

“가실 생각인가요? 길드 베테랑 모험가들이 응하지 않는 걸 보면, 아주 위험한 일이 될 가능성이 커요. 로빈 씨야 괜찮겠지만 오르페 씨나 디아나는.”

“전 괜찮습니다. 디아나도 평범한 아이가 아니니, 괜찮을 겁니다.”

딱 잘라 말하는 오르페가 참 기특하다. 그녀의 다크서클도 상당히 줄어든 거로 보아 이제 마음이 어느 정도 안정된 게 아닐까.

그래도 야쿠자들에 대한 증오는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피해자가 끙끙 앓으며 스스로 용서하고, 뉘우치고, 잊는 건 소용없다.

그럴 사이 야쿠자는 더 많은 사람의 구멍에서 피를 쥐어 짜낸다. 닌자몰살만이 유일한 처방책이다.

“이제 슬슬 헤어질 시간이군요. 저희는 골돈에 갈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바로 자리에 일어섰다. 원래 이런 건 일사천리로 진행해야 한다. 오줌싸개 혼내주기로 몸풀기는 했지만 부족하다.

악인들의 피를 마시는 혈참새 신노빈은 아직 목마르다.

“후, 막상 이렇게 되니 아쉽구먼. 하지만 아까도 말했듯이, 우리는 다시 보게 될 거요. 그때 내가 로빈 군의 이야기를 쓰고 있을지도 모르겠군.”

“네. 정말 재밌겠군요.”

진짜 나온다면 보이는 족족 전부 불태울 거다. 서둘러 작별 인사를 마치고 바깥으로 나갔다.

***

“아일린…! 아일린…. 흐흐흑...”

비통한 울음소리가 성당에 울려 퍼졌다. 붉은 갑옷의 여기사가 얼굴이 퉁퉁 부은 시체를 더욱더 세게 껴안았다.

“제, 제 친딸 같은 아이였습니다. 그렇게 용맹하고 정의로운 아이였는데, 어째서...”

마르톨란 남작은 침을 삼켰다. 눈앞의 기사, 유검경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노도(??)와도 같은 분노 때문에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

“남작님. 말해주십시오! 대체 어떤 자입니까! 얼마나 잔인무도한 자길래 이 아이를 이 꼴로 만든 겁니까!”

“저, 정체는 아직 조사중이오. 녀석이 종이를 하나 남기긴 했소.”

유검경이 마르톨란의 손아귀에서 빼앗듯이 종이를 낚아챘다.

“탈주...닌자...!”

그녀의 녹색 눈동자가 증오에 잠겼다.

“죽음을...!”

종이를 집어 던지더니 레이피어를 높게 들어 올리는 유검경. 레이피어가 붉은빛으로 휩싸이면서 요동쳤다.

와아아아아앙­쇼오오­이이이이­!

소문에 의하면, 유검경의 검은 죽인 자의 영혼을 거둔다고 한다. 피를 원하는듯한 그 끔찍한 소리에 마르톨란이 몸서리쳤다.

나락에 떨어진 자의 비명과도 같은 검음(?音). 이렇게 강렬한 증오를 받아낼 녀석이 조금은 불쌍해졌다.

“탈주닌자에게 죽음을!”

그녀가 그렇게 울부짖으니.

““탈주닌자에게 죽음을!!!””

유검경 휘하의 기사단 전부가 외쳤다. 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가 흔들릴 정도의 함성에 마르톨란도 잠시 귀를 막았다.

‘무언가…. 무언가 일어나고 있다.’

돌이켜보면, 소중한 명작 모음집이 사라진 순간부터 이변은 시작됐는지 모른다. 재앙은 갑작스레 들이닥치지 않는다.

조금씩, 조금씩 주변을 갉아먹으며 다가온다. 그걸 잘 알고 있는 마르톨란이었기에 더욱 불안해졌다.

‘희생자가 많이 나오지 않기를.’

그게 마르톨란의 유일한 소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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