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화 〉 20화. 탈주닌자 vs 야쿠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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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무카는 딱 한 곡만 부르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앵콜!’ 이 지랄 했으면 진짜 미칠 뻔했네.
푹 쉬고 일어난 다음 준비를 마치고 일행들과 바로 영주의 자택으로 향했다. 디아나는 아직 실전을 겪기엔 어려서 자택경비를 맡겼다.
“골돈의 영주인 조안나 골돈이에요. 다들 와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영주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였다. 골돈 남작가 내전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영주보다는 사서에 어울리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크서클이 0.5 오르페만큼 있는 거로 보아 그동안 마음고생을 심하게 한 것 같다.
“이분은 골돈의 유일한 기사. 트렌 경입니다. 군대 지휘 겸 제 호위를 맡고 계시죠.”
그녀의 옆에 장승처럼 서 있는 젊은 남자가 짧게 고개를 숙였다. 철가재 기사단원이나 아일린같이 특유의 기백이 없는 게 아무래도 초짜 기사 같았다.
“짧게라도 직접 소개를 들을 수 있을까요? 골돈을 지켜주러 오신 여러분들의 이름을 직접 듣고 싶습니다.”
조별과제의 자기소개 시간이 시작됐다.
“자유기사인 레너드요. 마지막 전장을 찾아 이곳에 왔소.”
지구의 지하철에서 가끔 보이던 우주총사령관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구리갑옷을 입은 할배가 먼저 나섰다. 자연스럽게 ‘마지막 전장’을 강조하는 눈치 없는 영감탱이다. 다 뒤질 거란 말이랑 뭐가 다르냐고.
“그,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레너드 경.”
순식간에 어두워지는 영주의 안색.
“떠돌이 검객 로빈입니다. 제 동료들과 함께 골돈을 수호하러 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로빈 씨.”
이어서 오르페가 나서려고 했으나, 낡은 갑옷과 투구로 무장한 여자가 더 빨리 입을 열었다.
“모험가 세일린입니다. 범죄자를 처치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야쿠자 슬레이어?!?!
순간 육성으로 내뱉은 줄 알았네. 그 정도로 너무나 반가웠다.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은 야쿠자를 향한 증오로 맹렬하게 타오르고 있을 것이 분명하다. 오르페가 아니라 세일린이 야쿠자 슬레이어였다니? 조금은 배신당한 기분이다. 뭔가 억울해서 오르페를 살짝 노려봤다.
“왜, 왜그러는데.”
“날 속였어.”
“어?”
대충 실망한 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당황한 오르페가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더니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모험가 오르페입니다. 저는...”
그다음부터는 졸려서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양아치 패밀리가 자기소개를 끝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큼큼, 다들 이쪽을 봐주시오. 골돈을 위협하는 도적 떼의 핵심 인물들이오.”
영주실 중앙의 탁자에다 현상수배지 같이 생긴 것들을 펼쳐놓는 트렌.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눈을 굴리던 초짜 기사가 한 수배지에 손가락을 올렸다.
“이 녀석의 이름은 ‘포악한’ 델바나스. 불족제비 기사단의 유망주였으나, 성격이 하도 포악해서 퇴출당했다 하오. 지금은 마적단의 우두머리로, 인근 도적들을 규합해 골돈을 함락시키려고 하고 있소.”
오른눈에 안대를 찬 표독스럽게 생긴 여자였다. 그림으로만 봐도 야쿠자 특유의 사악함이 줄줄 흘러내렸다. 이 년만 죽인다고 끝나진 않을 거다.
“마적단의 이인자인 ‘전술가’ 스미스요. 가즈안 용병단의 부단장이었다고 하더군.”
별 특징은 없는 안경잡이였다. 꼭 머리가 애매하게 좋은 새끼들이 야쿠자 편에 붙어서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는다.
“이 자식은….‘개백정’ 도른이요. 마적단의 행동대장인데, 사람을 참수해서 거리에다 매달아 놓는 게 취미인 악한이오. 전투능력도 뛰어나 위험한 자요.”
배틀액스를 들고 있는 근육질의 남자였다. 개인적인 원한이 있는지, 트렌이 그 그림을 보며 이를 갈았다. 솔직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다.
트렌의 설명은 계속됐는데, 별로 중요한 녀석들은 아닌 거 같아 세일린을 힐끔거리며 시간을 보냈다. 뭔가 말을 걸 기회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상이 위험한 인물이오.”
“그렇군. 질문이 있소.”
조용히 경청하던 레너드가 트렌에게 물었다.
“적들의 숫자는 얼마나 되오?”
“...250. 그 이상은 된다고 판단하고 있소.”
너무 놀란 아귀와 코주부가 주저앉았다.
“아니 시발!”
“우린 다 뒈졌어!”
“조용히 하세요!”
딱!
너무 시끄러워서 잠깐 잠재웠다.
“힛?!”
깜짝 놀란 영주가 기묘한 소리를 냈다.
폭력에 익숙하지 않은 책벌레라 그런가? 이제는 익숙해져야 하니 본보기를 보여준 셈 치자. 노블레스 오블리주 휴먼이 되려면 강해져야 한다.
“후…. 영지 내에서 전투 가능한 병력은 얼마나 됩니까?”
한숨을 쉬는 세일린. 솔직히 나도 궁금하긴 하다. 오면서 본 병사들이 수가 그렇게 많지 않았던 거 같다. 한 100명 되려나?
“...60명 정도 되오. 전문적인 훈련을 받은 병사는 20명 정도고, 40명은 자발적으로 합류했소.”
자택에 있던 모든 사람의 표정이 굳어졌다. 세상에 처녀가 적다는 사실을 들은 것처럼 아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는 유니콘. 양아치인 그녀도 처녀가 아니겠지.
아무래도 해답은 ‘포위섬멸진’ 뿐인 거 같다.
“이제야 내 운명이 정해진 모양이군.”
레너드가 씁쓸하게 웃었다. 뒤질 거면 너 혼자 뒤지라고 병신아.
“영주님. 이건 단순한 도적 떼 퇴치가 아니라, 전쟁입니다. ”
믿음직한 야쿠자 슬레이어가 담담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무리 배워먹지 못한 도적놈이라고 한들 몽둥이 정도는 가볍게 휘두를 겁니다. 성문이 박살 난 성채로는 공성전도 쉽지가 않아요. 강제징용을 해야 합니다.”
강제징용? 갑자기 굳건이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무리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라도 2년 동안 관심병사로 지내기는 힘든 법이다.
“가, 강제징용이라니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사지에 내보낸다는 건가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게 놔둘 수는 없지 않습니까. 게다가 전쟁터에서 함께 싸우는 것만이 돕는 건 아닙니다. 나무를 베어 기둥을 만든 다음 성문을 보강하는 일을 맡길 수도 있는 법이죠.”
구구절절 맞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는지 영주도 대답하지 못하고 한숨만 쉬었다.
“그건 내 전문이오. 영주님이 그럴 생각이 있으시다면, 물심양면으로 돕겠소.”
이제야 쓸모있는 소리를 하는 레너드.
“성문만 완성된다면 돌팔매질만 가르쳐 줘도 한 사람의 몫은 해낼 것이오.”
“...좋습니다. 우선 성문부터 다시 만들어보죠.”
***
“안돼! 나무의 정령님이! 안돼!”
소년의 절규가 골돈에 울려 퍼졌다.
쓱싹쓱싹.
하지만 젊은이들의 잔혹한 톱질은 멈추지 않는다. 평화와 안전을 위해서는 어른들이 직접 아이의 동심을 짓밟아야 한다. 낙원은 아직 멀다.
“영차! 영차!”
쿵!
소년의 라임오렌지나무가 쓰러졌다.
“으으…. 으으…. 끼에에에~! 끼에에에에에~!”
그를 달래줄 포르투가마저 없는 삭막한 세계. 상처입은 익룡이 울부짖는 소리를 견디지 못한 한 남자가 소년을 들쳐메고 떠났다.
“나무 하나만 더 자르면 성문을 만들겠군.”
“저쪽에도 나무가 하나 더 있어요. 그걸로 해보죠.”
백성들의 노동을 지켜보며 한마디씩 주고받는 레너드와 세일린. 솔직히 나도 쉬고 있어서 개꿀이긴 하다. 왠지 저런 단순노동에는 의욕이 나지 않는다. 저 나무가 고목 요괴였으면 가장 먼저 뛰쳐나갔을 텐데.
“훈련은 어떻게 시키실 생각인가요?”
“신체 건강한 젊은이들에게는 창을 다루는 법을 가르치려 하오. 영지 내에 무기가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소.”
“저기 트렌 경이 오시는군요. 한 번 물어보죠.”
대체 뭔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네. 그냥 양아치들하고 놀았다. 오르페가 열심히 듣고 있으니 괜찮다.
“사장님. 저희가 진짜 잘못했습니다.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보내주세요... 약혼자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 삼대독자입니다.”
“할머니가 오늘내일하십니다.”
“어머니가 많이 아프셔요.”
조별과제 발표 시간마다 전부 들어본 핑계뿐.
“그들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거다. 자부심을 품고 싸우도록. 아니면 나한테 죽던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난 정찰하고 올 테니, 오르페 잘 쫓아다녀라. 수고.”
트렌의 말에 의하면 골돈 내부의 첩자도 있다고 한다. 일단 그 새끼들부터 헬리콥터 검법으로 족쳐놔야겠다. 세일린이 하도 바빠 보여서 말을 묻기가 좀 그러니, 이런 일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
“주모. 여기 맥주 하나.”
그나마 인기척이 느껴지는 술집에 들어가 앉았다. 성채 공사 때문에 건장한 사람들이 전부 빠져나가서 그런지 아주 고요했다.
시바, 평범한 인간은 정찰을 어떤 방식으로 하지?
탈주닌자 신노빈은 그냥 아무 집이나 들어가서 파헤치면 된다. 그렇지만 지금의 나는 떠돌이 검객 로빈, 그런 식으로 움직일 수는 없는 법이다.
대충 영화에서 본대로 술집에 앉아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긴 한데, 그냥 다들 피곤해 보이는 아줌마랑 아저씨뿐이다. 수상한 대화라도 하나 싶어 귀를 기울였다.
“기저귀값이 많이 올랐어.”
“골돈, 이대로 괜찮은가?”
“요즘 젊은이들은 말이야.”
“옛날이 좋았지. 이제 떠나고 싶어도 떠날 수가 없네.”
진짜 별 거 아닌 대화뿐이네.
“...”
결국 그렇게 5시간 동안 앉아서 멍때리다가 집으로 들어왔다. 오르페는 종이에다 뭘 잔뜩 적고 있었고, 양아치 패밀리는 레너드에게 기초훈련을 받고 있었다. 기분이 좀 묘하지만 상관없다.
지구에서는 ‘주마등’이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주인공은 마지막에 등장한다는 뜻이다.
탈주닌자로 100인분 이상 할거니까 괜찮다. 그렇게 생각하며 저녁만을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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