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 21화. 탈주닌자 vs 야쿠자 (3)
* * *
골돈에서 멀리 떨어진 평야.
수십 개의 천막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밤의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스미스입니다. 들어가도 됩니까?”
스미스가 여러 짐승의 가죽으로 뒤덮인 천막 앞에 섰다. 이 무리의 중심이라는 것을 과시하듯 화려하고 큰 천막은 기묘하고 불길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
그 분위기에 압도된 스미스가 동그란 안경을 몇 번 만지작거리며 긴장을 풀 때, 걸걸한 여자의 목소리가 천막 안에서 들려왔다.
“들어와.”
명령이 떨어지자 천막 안으로 들어오는 스미스.
갖가지 무기가 장식품처럼 진열된 천막의 중앙에서 델바나스가 하나 남은 눈을 부릅뜨고 양반다리로 앉아 있었다.
“보고해.”
“먼저, 사흘 전에 합류한 여자는 ‘응징자’ 세일린이라는 모험가입니다.”
“응징자? 뭔 별명이 그래?”
델바나스가 하찮다는 듯이 입꼬리를 비틀었다.
“부모를 강도에게 잃고 복수를 다짐했다는 거 같습니다. 용병단에 들어가 5년 동안 굴렀고, 지금은 온갖 지역을 돌아다니며 범죄자 사냥 퀘스트만 받는다고 합니다. 실력은 그냥 그렇지만 경험이 많아서 골치 아프다는 얘기가 많습니다.”
“성가실 거 같네. 가능하면 먼저 죽여둬야겠어.”
“새로 합류한 산적놈들도 그년을 아는 눈치입니다. 조심하는 게 좋겠죠.”
“이틀 전에 합류한 늙은이는?”
“레너드라는 자유기사입니다. 기사들 사이에서는 ‘운 좋은 레너드’라고 불리는 녀석이죠.”
스미스가 잠깐 숨을 골랐다.
“은여우 기사단에서 30년 동안 근무한 기사입니다. 텔라스 항전에서 전멸당한 기사단이죠. 비겁하게 혼자 살아남았다 해서 그런 별명이 붙여진 거 같습니다. 겁쟁이라고 가문에서도 쫓겨난 녀석인데, 주정뱅이라는 소문도 있습니다.”
“노망난 노친네가 뒤지러 왔나 보군. 그럼 원하는 대로 해줘야지. 어제 온 녀석들은?”
“정보가 없더군요. 정의감 넘치는 새내기 모험가들이 뭉쳐서 오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 번 더 조사해보겠습니다.”
“성문을 나무로 다시 만들고 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병신같은 새끼들.”
델바나스가 낄낄 웃었다.
“이번에 잡은 마을 녀석들은 어떻게 할까요?”
“얼굴 반반한 연놈들은 알아서 돌리고, 나머지는 밥으로 줘.”
“알겠습니다.”
“이제 가봐. 중요한 게 아니면 내일 찾아오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만.”
스미스가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천막을 떠났다.
"후."
혼자 남은 델바나스가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진 걸 확인하고 안대를 벗었다.
우우우웅
그녀의 오른쪽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 녹색으로 빛나는 구슬이 박혀 있었다.
“이변은 일어나지 않는 거 같다.”
우우웅
구슬이 진동하며 빛을 내뿜자 그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렇게 하겠다.”
델바나스의 혼잣말은 그렇게 끝났다.
으아! 으아아아!
끼야아악!
“음...”
바깥에서 들려오는 비명을 음미하며 델바나스가 하나뿐인 눈을 감았다. 오른쪽의 구슬이 빛을 잃고 잠잠해졌다.
***
원래 진짜 멋진 새끼들은 밤에 활동한다.
‘태양의 기사’ 이지랄 떨면 밤에 고개 숙이는 좆밥처럼 보이지만, ‘다크 나이트’ 하면 정확하게 뭔지는 몰라도 멋져 보이기 마련이다.
“닌닌.”
올블랙의 탈주닌자. 이게 진짜 멋이다. 반박하는 건 야사요 뿐.
끼익.
창문을 열고 지붕으로 기어 올라갔다.
오늘 할 일은 아군진영의 파악. 남들 앞에서는 당당하다며 떵떵거려도 뒤에서는 음모를 꾸미는 게 인간이다. 이런 식의 전쟁에서는 눈앞의 적군보다 뒤에 칼을 찔러 넣는 배신자가 더 치명적인 법.
첩자도 있다고 하니까 한 번 확인해야 한다.
스스스슥
뜬그림자를 쓰고 지붕 위를 달렸다.
폴짝!
마르톨란과는 다르게 건물이 적어서 가다가 크게 점프를 해야 했다. 이단 점프라도 배워야 하나? 슈퍼 마루오 이 새끼는 잘만 하던데 아직도 원리를 모르겠네.
탁.
일단 첫 번째 목표인 영주의 자택에 도착했다. 조명등도 드문드문 켜져 있고, 경비도 몇 없다. 이게 진짜 흙수저 영주구나. 마르톨란 남작은 양반이었다.
“후.”
닌자호흡법으로 한 박자 쉬고 창문으로 들어갔다. 복도에는 전 영주들로 보이는 사람들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는데, 다들 하나같이 기운이 없어 보였다. 권력보단 영양제가 필요했던 게 아닐까?
좀 더 살펴보다가 유일하게 불빛이 새어 나오는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걱정하지 마시지요. 모험가들이 잘해주고 있습니다. 골돈의 모두가 하나 되어 싸우려고 합니다.”
“과연 승산이 있을까요? 전 마지막까지 영지를 지키고 싶지만, 다른 사람들이 제 고집 때문에 고생하는 건 보기 힘들어요.”
“그들 모두 골돈을 사랑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겁니다.”
문이 굳게 닫혀 있어 바깥에서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트렌과 조안나다. 인원이 부족하니 트렌이 직접 밀착 경호를 하는 거 같다. 초짜라도 기사는 기사니 수십 명이 들이닥치거나 실력자가 암살 시도를 하지 않는 이상 괜찮을 거다.
“트렌 경. 골돈에 남아있어 줘서 고마워요. 저에겐 당신뿐이에요.”
“마찬가지입니다. 아가씨.”
별로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이지만, 둘은 그렇고 그런 사이인 거 같다.
쪽쪽쪽쪽.
이건 좀 재밌는 부분인데?
잠깐 들으면서 쉬다가 다시 업무를 수행하러 나갔다. 일단 자택은 이상 무. 다음 타겟은 레너드다. 어제 대화하는 걸 엿들으면서 숙소를 파악했다.
“미안하오…. 미안하오…. 나도 죽어야 했는데…. 나도...”
스륵.
집으로 들어가니 수십 개의 술병을 껴안은 레너드가 침대 위에 누워있었다. 거나하게 취해서 그런지 앞도 안 보이는 거 같다.
“어째서…. 어째서 이렇게 된 건지…. 대의를 위해서 싸웠는데…. 한 번도…. 단 한 번도...”
알코올 냄새가 홀아비 냄새와 섞여서 장난이 아니다. 오래 있기 싫어 물건 몇 개를 빠르게 뒤적였다.
시발, 이게 진짜 가스실이다.
“...그래서 그런 건가? 난 평생 헛것을 쫓으며 살고 있던 건가?”
끊임없이 문답하는 레너드도 이상 없음. 진짜 죽으러 온 할배인지 유서까지 적혀 있다. 인생의 마지막을 실버타운에서 보내신 할아버지가 생각나 좀 씁쓸하긴 하다. 내 꿈을 비웃지 않던 분이셨는데. 그냥 치매 때문에 그런 거였나?
바로 야쿠자 슬레이어의 집으로 향했다. 영주의 자택에서 생각지도 못한 변수 때문에 시간이 좀 낭비됐다.
이야.
이 여자는 ‘진짜’다.
마당, 지붕 위, 복도 등 어딜 가도 마름쇠가 잔뜩 뿌려져 있었다. 거의 작은 요새였는데, 창문을 들어 올려 침입하니 바닥 밑에도 날카로운 날붙이들이 잔뜩 있어서 밟을 뻔했다. 예민한 내 감각으로 하나하나 피해서 오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
“...쿨.”
세일린은 투구도 벗지 않고 무장한 상태로 가장 큰 방의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는데, 자면서도 한손검을 꼭 쥐고 있었다. 이렇게 편집증이 가득한 사람은 나도 처음 본다.
이 정도는 되어야 야쿠자 슬레이어를 칭할 수 있는 건가?
딱 봐도 문제없는 ‘정의로운 우리 편’ 느낌이라 별다른 조사 없이 나왔다. 보기만 해도 든든하다.
...~! ...~! ...~!
“닌?!”
마지막으로 동네 한 바퀴만 돌고 들어가려 하니, 주택가에서 좀 떨어진 우물 근처에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래도 요괴 소환사의 사악한 주문 같아서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긴 분홍 머리 여자애가 두 손을 하늘 높이 들어 올리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검은 마차 붉은 마차 황금색 마차~!
무카, 또 너야?
마차 마차 마차~! 마차~! 마차~! 마차 마차 마차~!
마차 운전수가 되고 싶으면 마차 모는 법이나 배울 거지, 왜 음유시인이 된 걸까? 딱밤이 마려웠지만, 꾹 참았다. 어떤 경우에서라도 평범한 백성에게 폭력을 행사하면 안 된다.
이제 슬슬 들어가야겠네.
스스스슥
“...?”
눈 앞의 풍경이 움직였다.
약간의 잔상을 남기면서 움직이는 사람의 형체. 이건 뜬그림자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효과다.
후보생인가? 아니면 그날 자리에 없었던 사갈의 꼬리 조직원? 뭐가 됐든 쫓아야 한다. 녀석보다 더 숙련된 뜬그림자를 펼치며 따라 움직였다.
스슥 스슥
한 명이 아니었다. 먼저 움직이던 녀석이 다른 방향에서 오는 놈들과 합류했다. 자기들끼리만 알아볼 수 있는 수화를 하다가 다시 움직이는 녀석들. 서로 알아보는 걸 보니 수준이 다 비슷비슷한 거 같다.
철벅.
녀석들이 지하수로로 내려갔다. 나라면 몇 초 안에 도착할 거리를 굼벵이처럼 5분이나 기어가는 머저리들.
훈수가 너무 두고 싶다. 나중에 타락닌자인 게 밝혀지면 저승길 선물로 한 마디 해줘야 하나?
“5명 전부 무사히 집결.”
“내부 지도 완성.”
“기사 한 명 확인. 암살 불가능.”
“의뢰인의 요구사항 확인. 사람이 더 필요.”
“장소 도착 후 전달.”
군대놀이하는 애새끼들처럼 줄임말을 쓰는 녀석들. 복면을 벗고 땀을 닦길래 면상을 확인하니 불륜 산악회 멤버처럼 생긴 3~40대 중년들이었다. 일단 후보생은 아니네.
“출발.”
철벅. 철벅.
다시 복면을 쓴 중년들이 움직였다. 녀석들이 오물을 밟는 소리 때문에 내 발소리가 완벽히 묻혔다.
바깥에 나가 누군가와 접선하기로 했나? 사갈의 꼬리가 여기 있을 만한 이유는 누군가의 청부를 받고 움직였다는 것뿐이다. 대화로 유추해보아 의뢰인이 골돈의 편은 아니다.
정황상, 이 타락닌자 새끼들이 야쿠자와 손을 잡은 게 분명했다.
“도착.”
지하수로를 빠져나와 골돈과 좀 떨어진 장소로 나온 녀석들이 몸을 털었다. 보이지 않는 6번째 멤버가 되어 꽁무니를 쫓고 있던 나를 눈치챈 놈은 한 명도 없었다.
이쯤 되면 거의 전지적 관찰자 시점.
“수고하셨어요.”
나무 뒤에 숨어 있던 한 그림자가 그들에게 다가왔다.
“잘하신 거죠?”
“대부분은. 암살은 실패했다. 기사가 한 명 붙어 있어. 영주도 조심성 있어 음식에 뭘 넣기도 힘들었다. 네가 직접 가야 할 거 같군.”
“암살까지야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림자가 장갑을 낀 손으로 검집을 만지작거리며 웃었다. 이 십새끼가 진짜.
이게 문제다. 피해자는 꿈에도 가해자를 만나 잠 못 이루는데 가해자는 친구들이랑 깔깔거리며 싸돌아다닌다. 지구든 이세계든 변하지 않는 사회의 어둠.
“이제 저에게 맡기시고 먼저 돌아, 응?”
보아하니 더 만날 사람은 없는 모양. 뜬그림자를 해제하고 녀석을 노려봤다.
“이 도둑새끼. 내 물건을 함부로 가져가?”
뚜둑!
“엣?”
아직도 멍때리는 옆의 아줌마 목을 비틀었다.
풀썩.
그대로 절명.
6명? 기사 12명도 두들겨 팬 나다. 도망쳐도 따라가서 하나씩 죽일 수 있다.
“5, 567?!?!?!”
특히 넌 진짜 죽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