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23화. 탈주닌자 vs 야쿠자 (5)
* * *
“찔러!”
마나가 실린 레너드의 고함이 골돈의 광장에 퍼져나간다.
“그렇지! 빠르게! 찌르고! 빠진다!”
수백 명의 사람이 레너드의 목소리에 집중하며 나무창을 휘둘렀다. 처음 시작할 땐 모두 미숙하고 느린 동작이었지만,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보듯 서서히 자세를 잡아가는 사람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뿌듯한 눈으로 지켜보는 레너드.
“하하! 거기 자네! 많이 좋아졌구먼! 이름이 뭔가?”
그가 웃음을 터뜨리며 까무잡잡한 피부의 금발 남성을 지목했다.
“귀상…. 존입니다!”
로빈에게 귀상어라 불리는 남자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존은 레너드가 딱 집어서 말했을 정도로 안정적인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보기 좋아! 열심히 하게!”
큰 칭찬은 아니었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며 감을 잡고 있는 청년에게 가벼운 응원을 보낸 것뿐.
그 단순한 한 마디에 존이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레너드 경!”
이제는 눈시울마저 붉어진 존이 더욱 열심히 나무창을 휘둘렀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을까.
“그만! 조금 휴식하고 다시 시작한다!”
레너드가 휴식 시간을 알리자 존을 비롯한 젊은이들이 자리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가쁜 숨을 내쉬면서도 입가에 웃음이 가득한 존.
“존, 이거 받아.”
탁!
유니콘, 유니스가 존에게 짐승 가죽으로 만들어진 수통을 던졌다. 가볍게 받아 채서 마시는 존.
“흐. 고마워. 목말랐는데 잘됐네.”
존이 수통에 입을 떼고 그대로 머리에 부었다. 땀과 모래로 범벅이 된 얼굴이 깔끔하게 씻겨나간다.
“혼자 신났네. 왜 그렇게 웃고 있어?”
심통이 났는지 존의 발끝을 툭 치는 유니스.
“재밌잖아.”
바보 같은 답변에 유니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다른 애들은 다 죽겠다고 아우성치는데. 끌려온 게 억울하지도 않아?”
“이미 일어난 일로 화내서 뭐 하냐. 달라지는 게 없잖아. 그냥 호신술이라도 익힌다 생각해.”
말문이 막힌 유니스가 콧김을 뿜었다. 네 명이 골돈에 온 지 일주일이 지났다. 적응한 건 존 한 명뿐. 나쁜 짓을 하려다 걸린 건 똑같으면서 뭐가 저렇게 당당한 걸까.
“목숨을 대가로?”
“꼭 진다고 생각해야 해?”
“...그런 건 아냐.”
“어차피 골돈 다음은 우리 마을이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열심히 하자.”
“...언니는 잘 지낼까? 그렇게 싫어했었는데, 요즘은 많이 생각나.”
계속해서 떠오르는, 피할 수 없는 비극을 잊기 위해 애써 화제를 돌리는 유니스.
“흠...”
간만에 그녀의 얼굴을 떠올린 존이 난감함에 머리를 긁었다. 존의 약혼녀이자 유니스의 언니. 그녀가 결혼이 결정된 날 돈을 더 가져오라고 얼마나 소리쳤는지 아직도 생생하다.
심리적 압박감을 견디다 못한 존은 이제 처제가 된 소꿉친구 유니스를 포함한 세 명과 함께 마을을 뛰쳐나갔고, 길안내를 해준다는 핑계로 행인에게 거금을 받아내려고 했었다. 그 결과 전부 골돈에서 훈련을 받게 됐지만.
“잘 지내겠지. 동네방네 큰소리 떵떵 치며 내 욕을 하고 다닐걸. 걱정하지 말고 우리 일이나 열심히 하자고.”
“풉, 생각만 해도 웃기네.”
“그래. 웃으면서 하자고. 보기 좋네.”
존이 일어서서 유니스의 머리를 톡톡 쳤다. 그 가벼운 손길에 그녀의 얼굴이 삽시간에 붉어졌다.
“자! 일어서! 다시 시작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레너드가 훈련의 재시작을 알렸고, 두 사람은 다시 멀어졌다.
***
“말해. 델바나스가 여기서 뭘 찾고 있었지?”
“나, 나도 자세한 건 모른다. 내가 아니라 내 동료의 임무였다니까.”
푹!
세일린의 기다란 송곳이 다시 타락닌자의 발톱을 후벼팠다.
“우아아아악! 진짜! 진짜로! 모른다고!”
의자에 묶인 녀석의 주위가 피로 흥건하다. 역시 야쿠자 슬레이어. 손속에 자비가 없다.
“음...”
불편한지 미간을 찡그리는 오르페. 고문술을 나중에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녀와 구경하는 중이다.
“조금의 귀띔이라도 듣지 않았나? 그걸 말해.”
“아냐! 들은 적 없어! 어, 엄마를 걸고!”
이제는 엄마까지 팔아가며 애원하는 타락닌자. 부모가 없는 고아라서 쉽게 걸 수 있는 건가? 이게 고아 조직 사갈의 꼬리 평균이다.
세일린이 말없이 지켜보다 다른 쪽 발톱을 찔렀다.
“겍!”
놈이 오징어처럼 늘어뜨리며 기절하는 놈. 오른팔에 댄 부목만 빳빳하게 선 게 기묘하다. 오리주물럭의 술에 당해서 이제는 오른팔보단 촉수 하나에 가깝지만.
“물 좀 뿌려주시죠.”
옆에서 덜덜 떨며 지켜보던 병사가 양동이에 가득 찬 물을 바가지로 떴다.
“쩝.”
이제 슬슬 질리네. 열심히 하는 세일린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고문이랑 맞지 않는 거 같다. 내 제트킥이랑 딱밤이 저것보다 더 위협적이지 않을까.
“정말 재밌는데, 오줌이 마렵네! 어쩔 수 없지!”
“그, 그걸 큰 소리로 말하지 마.”
쪽팔려 하는 오르페와 같이 고문실을 빠져나왔다. 야쿠자 슬레이어의 기분을 배려하는 스윗닌자.
“로빈. 그 이후로 거기에 다시 가본 적 있어?”
오르페가 아주 낮은 톤으로 조심스레 물었다. 바로 무표정으로 돌아오는 거 보면 역시 철면피다.
“아니.”
내 능력을 조금이라도 맛본 야쿠자들이 날 견제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럿이서 같이 돌아다니며 날 찾고 있지 않을까? 델바나스 그년도 밥 먹고 똥 싸는 중에 가끔 그 이상한 레이더를 발사할 게 분명하다.
우선은 그렇게라도 적의 노동력을 소모해야 한다.
다시 찾아가서 몇 놈 목을 베고 온다? 솔직히 힘든 일은 아니다. 그렇지만 그게 큰 도움이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평야라서 깊숙이 들어가면 빠지기도 힘들고,결국 핵심간부들은 중앙에 뭉쳐 다녀서 노릴 수가 없다.
결국 전쟁밖에 답이 없는 상황이다. 공성전같이 혼란스러운 상황이 되어야만 나도 활개 치면서 다닐 수 있다. 다 무너져가고, 쥐좆만해도 골돈은 요새 도시. 2~300명 정도는 어느 정도 버틸 여력이 있다. 그렇게 버틸 때 내가 핵심간부만 죽여도 승산이 높아진다.
이게 사실 내 생각은 아니고 대부분 오르페의 생각이다. 포위섬멸진을 주장했는데 씨알도 안 먹혔다. 이게 진또배기인데, 존나 억울하다.
“좋아. 이번에도 혼자서 너무 고생할 필요 없어. 이번은 좀 여유 있게 해보자.”
씩 웃으며 내 어깨를 붙잡는 오르페. 은근히 힘을 주고 누르네.
단풍잎 마을에서도, 아일린을 팰 때도 내가 돌발적으로 혼자 행동한 게 억울했나? 가끔은 오르페의 말을 들어 주는 것도 괜찮다 싶어서 따랐다. 솔직히 지금 내게 뾰족한 변수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근데 너무 할 게 없는데. 디아나 인간수업이라도 해줘야 하나?”
“디아나? 마을 여자아이들과 놀고 있을걸.”
벌써 현지 주민과 그렇게 친해졌다고? 애들이라 그런가? 이러나저러나 좋은 일은 아니다. 내 할 일이 또 없어졌기 때문에. 또 무기력하게 술집에서 앉아있긴 싫은데.
“심심해서 그래? 그러면 대련이라도 할까?”
“대련? 너 그거 하느라 바쁘지 않아?”
뭘 하느라 바쁘다고는 들었지만, 정확히 기억은 안 나서 그냥 그거라고 했다. 탈주닌자의 뇌는 효율적으로 작동해서 불필요한 정보는 단기간 내에 사라지게 되어있다. 슈퍼 브레인컴퓨터 신노빈.
“오늘은 시간 나. 어때? 허락받고 성 바깥으로 나가서, 방해 안 받고 하는 거야.”
“주어가 없으니 기묘하네.”
솔직히 말하면, 나와 오르페의 전투력은 산군과 찍찍이만큼 크다. 내가 이 대련으로 얻을 건 아무것도 없는 수준. 그래도 지금까지 군말 없이 날 따라준 그녀를 위해 이 정도야 희생할 수 있다.
“좋지. 한번 해보자고.”
내 친구이자 식모인 오르페의 파워업을 도와주면서, 겸사겸사 신기술이나 만들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
오르페가 창을 휘둘러 내 비수를 쳐냈다.
“하압!”
기합 좋고. 골돈에서 구해 온 적당한 한손검을 꺼내 휘둘렀다.
“헬리콥터 검법.”
오랜만에 사용하는 기술이다.
투다다다다다!
무한으로 즐기며 회전하는 내 검이 그녀의 방패를 무자비하게 때렸다.
“읏...!”
헬리콥터 검법. 이게 이름은 웃겨도 어떻게 보면 공방일체의 검법이다. 사용자가 속도만 받쳐준다면 말 그대로 헬리콥터의 로터처럼 계속 회전하면서 상대를 압박하는 게 가능하니까.
“아아, 시시하군.”
일단 방패를 들어 올려 방어에만 전념하는 오르페의 판단도 나쁘진 않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닌자가 되기 위해 온갖 무술을 독학한 나에게는 부족해 보였다. 오르페의 가능성을 최대한 끌어내야겠다.
“이것이 ‘재능’의 차이인가? 하품이 다 나오는군.”
하암.
가짜로 하려고 했는데 진짜로 나왔다. 고문실에서 좀 지루하게 앉아있긴 했다. 슬슬 자극받는지 날카로워지는 오르페의 눈. 얘도 은근 자존심 강하다니까.
“햣!”
눈으로 검의 동선을 쫓던 오르페가 손의 위치가 바뀔 때 생기는 잠깐의 빈틈을 읽고 창을 찔러넣었다. 역시 빨리 배우긴 한다.
챙!
물론 손잡이 끝으로 창을 쳐내 자연스럽게 막아냈다.
“공격이 뭔가 부족해. 일종의…. 영혼 말이야.”
“영혼?”
이걸 막상 설명하려고 하니 힘들다.
“있잖아. 영혼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합?”
“그런 게 전투에 필요해?”
“나처럼 강해지려면 필수적이지.”
“...그럼 나도 ‘와자뵷!’해야 하는 거야?”
“그게 그렇게 싫어?”
“...솔직히 그래.”
정말 하기 싫어 보이네.
그래도 기합을 넣어야 강해진다는 건 사실이다. 기합을 내지르면 아드레날린이 분비돼 집중력이 높아진다는 건 지구에서 이미 과학적으로 증명됐다. 한 동작 한 동작이 전투의 승패를 가르는 냉혹한 싸움의 세계에서 집중력은 중요한 요소다.
사실 나도 트리위키에서 본 정보라 정확히는 모르지만.
“굳이 그게 아니더라도, 너만의 외침이 필요하다는 거야.”
“나만의 외침?”
“일단은 기술명을 만드는 것부터 시작하자.”
“...‘타코야끼 살법’같은 거?”
“그래. 그런 거.”
“...”
또 존나 싫어하네. 이것도 싫다 저것도 싫다. 뭐 어쩌잔 거지?
“일단은 ‘찌르기’부터 시작하자.”
“찌르기? 그게 왜?”
“찌르면서 크게 외쳐!”
기습적으로 검을 찔러넣었다.
“핫!”
바로 방패로 막아내는 오르페. 속도를 조절하고 있긴 하지만 삼류들은 못 막아낼 기습이었다. 장담하는데 실전만 더 겪으면 금세 까까시만큼 강해질 수 있을 거다.
“찌, 찌르기!”
바로 쏘아지는 창을 비스듬히 쳐냈다. 머리도 좋은 편이라 한 번만 말해도 다 알아듣는다. 이게 오르페 최고의 장점이다.
“더 크게 말하고 다시!”
“찌르기~!”
전투의 열기로 인해 얼굴이 붉어지는 오르페. 좋은 현상이다.
“너만의 기술명도 붙여서 말해봐! ‘데스 찌르기’라던가!”
“그건 좀...”
“이얍!”
“끄악!”
망설임이 일격을 허용했다. 방패를 놓치고 만 오르페.
“승리를 위해서라고 생각하라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으이씨...!”
오르페가 두 손으로 창을 잡고 다시 달려들었다.
“즉사 찌르기~!”
“그렇지!”
이제야 이해했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