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25화. 탈주닌자 vs 야쿠자 (7)
* * *
골돈의 컴컴한 지하수로가 랜턴의 빛으로 밝아졌다.
철벅 철벅.
온갖 무기로 무장한 사람들이 대형을 갖추고 조심스레 걷고 있었다. 모두가 빛이 닿는 곳을 주시하며 작은 소리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귀를 기울였지만, 떨어지는 물소리와 그들이 걷는 소리만 들려왔다.
“아무도 안 지키네요.”
도른의 오른팔이자 쌍검술의 달인, 베리안이 확인하듯이 물었다.
“말했잖아. 골돈 새끼들도 잘 모른다고.”
델바나스 마적단의 행동대장인 ‘개백정’ 도른이 콧김을 팍 내뿜었다.
지하수로는 그가 첫 살인을 저지르고 정신없이 도망치다 발견한 장소. 감시자가 지배하던 고대시대에 지어졌다고 전해지는 골돈은 현 영주마저 모르는 비밀통로들로 가득했다.
‘이 꼴이 날 줄 알았으면 병신같은 암살자들에게 알려주는 게 아니었는데.’
이미 전부 죽었겠지만.
역시 중요한 건 직접 해야 한다. 지금까지 도른이 살아오면서 온몸으로 깨우친 교훈이 다시금 옳다는 게 증명됐다.
“이렇게 넓은데, 진짜로 아무도 없네.”
“도른 님 말씀이 맞았어. 그 새끼는 골돈에서 보낸 암살자가 아닌 거야.”
“스미스가 괜한 걱정을 했네. 경험 좀 있다고 뻗대더니.”
“솔직히 이상했어. 그 거렁뱅이 영주가 무슨 돈으로 그런 암살자를 고용하냐.”
“암살자 새끼들이 돈을 더 받아내려고 이상한 음모를 꾸미고 있던 거 아닐까? 생긴 거부터가 수상했잖아.”
“지랄, 같은 편을 살해했는데?”
“입막음한 거지. 워낙 음습한 놈들이니까.”
긴장이 놓였는지 소란스러워지는 일행들. 사납고 거칠어 보이는 녀석들 모두가 도른이 골돈 함락을 위해 고른 40명의 정예였다.
“사다리가 보입니다.”
맨 앞줄에 있는 ‘영리한’ 빌던이 낡은 사다리를 랜턴으로 비췄다. 조금 녹슬긴 했어도 이 정도면 상태가 괜찮은 편이다.
“준비하고, 소란스러워진다 싶으면 바로 올라간다.”
허리춤에 찬 손도끼를 빼 마나를 불어넣는 도른.
철컹
덩굴무늬 문양이 새겨진 손잡이가 그 마나에 반응해 부피를 늘렸다. 이제는 배틀액스로 변한 손도끼가 우우웅 하고 떨었다.
‘애송이와 늙은이. 기사가 두 명.’
충분히 할만하다. 숙련된 기사도 그가 아끼는 이 무기 앞에서 두 동강이 나 죽었다. 트렌 그 애새끼는 오늘 죽으리라.
100명이 안 될 게 뻔한 골돈의 병력이 날렵하고 강인한 하이너 무리를 전부 제압하는 것도 불가능하다.
‘충분하다.’
델바나스가 몬스터 조종이 가능하다고 말했을 때, 도른은 코웃음을 쳤다. 다음날에 마을 하나가 하이너의 습격으로 무너졌을 때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냥 운 좋게 알아낸 어떤 방법으로 몬스터들을 유인한 게 분명하다고 애써 합리화했다.
네? 제가요? 억!
그녀가 하이너의 무리 한 가운데로 신입을 던진 순간에서야 믿게 됐다. 놀랍게도 하이너들은 그놈에게 눈조차 돌리지 않은 채 식사를 마치고 유유히 흩어졌다.
다른 도적들은 델바나스 개인에 대한 두려움과 골돈 근처의 마을을 받아 가기 위해서라는 명목으로 합류했지만, 도른은 달랐다.
‘델바나스는 어떤 사실을 알고 있고, 더 엄청난 일을 벌이려 한다. 지금처럼 옆에서 거들기만 하면 더 큰 걸 얻을 수 있어.’
지금까지 살아남기 위해 싸웠지만, 이제는 큰 그림을 볼 때다. 어차피 많은 사람에게 증오받으며 쫓기는 몸, 어차피 뭘 해도 죽는다면 야망 있는 길을 걷는 게 낫다.
‘우선은 델바나스의 신뢰를 얻고, 몬스터를 조종하는 법을 알아낸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도른 님. 아무래도 이상합니다. 지금쯤이면 하이너들이 골돈 안으로 침입했어야 합니다.”
베리안이 불안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천장 위를 가리켰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 꽤 지났다.
“벌써 다 잡힌 건가?”
“싸우는 소리도 안 들렸어.”
“몬스터들이 그냥 도망친 거 아냐?”
“좆같은 소리.”
불안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순수하게 일신의 전투력만으로 뽑은 놈들이 절반이라 잡음이 너무 많다. 노련한 전사보단 잔인한 살인마에 가까운 녀석들의 성향 탓이다.
도른이 조용히 으르렁댔다.
“다들 아가리 다물어라. 대갈통 박살 나기 싫으면.”
“...”
어지간한 범죄자는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도른의 악명이 높았기에 반항하는 놈은 없었다.
“우선 후퇴할까요?”
조심성 많은 베리안의 눈이 왔던 길을 향했다.
“흠.”
이번에도 실패하면 공성전이라는 선택지만 남는다. 아무리 구시대의 잔재라 해도 골돈은 엄연한 성. 아무리 병력에서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큰 희생이 따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은 선봉에 설 도른과 직속부하들이 치를 희생.
어떻게든 공성전만은 피하고 싶은 도른이었지만.
“물러난다.”
지금까지 일어난 변수가 너무 많았다. 일이 꼬였다고 판단한 도른이 등을 돌렸다.
쩡!
“어?”
일행의 맨 끝에서 랜턴을 들고 있던 여자가 쓰러졌다.
“이런 씨발!”
베리안이 튀어 나가 엎어진 여자의 몸을 뒤집었다. 랜턴을 부신 날카로운 비수가 그녀의 심장에 꽂혀있었다.
쩡! 쩡!
“악!”
“헉!”
한 발짝 늦은 비명과 함께 랜턴의 불이 하나하나 꺼졌다. 소형 방패를 가지고 있던 자들이 앞서 나와 보호 자세를 취했고, 나머지는 무기를 빼 들고 비수가 날아온 방향을 살폈다.
“멍때리지 말고 서로 붙어.”
도른의 명령에 부산하게 움직이던 부하들이 뭉쳤다.
똑. 똑.
순식간에 고요해진 지하수로, 진흙을 밟는 소리도 없이 물이 떨어지는 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불길한 정적에 몇몇이 몸을 살짝 떨었다.
사악 사악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움직였다. 부하들이 그것의 정체를 찾기 위해 랜턴을 이리저리 휘둘렀지만, 빛은 거기까지 닿지 않았다.
“랜턴 하나 저쪽으로 던져봐.”
도른이 배틀액스 끝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바로 알아챈 빌던이 포환 던지듯이 랜턴을 날렸다.
뎅그르르!
랜턴이 뿜어내는 빛의 끝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칼을 빼 들고 있었다.
붕!
발 빠르게 가장 먼저 다가간 베리안이 검을 휘둘렀는데, 갑자기 그것이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에에?”
그게 베리안의 유언이었다.
촥!
소리 없이 뒤에서 나타난 그것이 베리안의 목을 잘랐고, 동시에 천장에서 그것과 똑같은 옷을 입은 자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아, 아!”
“엇!”
모두가 천장을 보며 무기를 찔러넣었지만, 닿자마자 그것들이 사라졌고.
쩡!
마지막 랜턴이 꺼졌다.
붕
어둠이 내려앉은 지하수로에서 무언가가 공기를 갈랐다.
“이...이게.”
삭! 하는 소리와 함께 도른의 앞에 있던 부하들이 사라졌다.
“대, 대장님! 이”
소리치며 도른을 찾던 빌던도 말을 잇지 못하고 조용해졌다.
주르륵.
지하수로에 침묵이 내려앉았고, 뜨겁고 끈적끈적한 게 바닥에 잔뜩 흘러내려 도른의 신발을 적셨다.
“누, 누구냐.”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도른이 양손으로 배틀액스를 쥐고 뒷걸음질 쳤다.
“처, 천막으로 찾아왔던 놈이냐? 골돈의 편이었나?”
전부 다 함정이었나? 내색하지 않으려 노력했지만 소용없었다. 도른의 입술이 크게 떨리고 있었다.
‘이 녀석을 이길 수 있나?’
냉정하게 판단하면, 아니다. 움직이는 것조차 볼 수 없었다.
“난 ‘개백정’ 도른이다.”
적의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도른의 두 눈이 암흑을 훑었다.
“난 마적단의 행동대장이고, 델바나스의 측근이다. 저항하지 않겠다. 날 생포하면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어떻게든 살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며 도른이 배틀액스를 천천히 바닥에 내려놓았다.
“다시 들어 올려.”
조금은 헐떡이는 듯한 목소리가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원하는 게 뭔지 말해라. 내가 할 수 있으면 들어주겠다.”
어정쩡한 자세로 배틀액스를 다시 든 도른의 머리에 식은땀이 맺혔다. 살려줄 생각이 없나?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야 한다.
“지금 무슨 상황인지 말해.”
“상황...? 아, 델바나스가 몬스터 무리를 조종해 골돈을 공격하기로 했고, 우린 그 혼란을 틈타 위로 올라가려 했다.”
“요괴를 조종한다? 곤약을 먹여서?”
“요괴든 곤약이든 알 수 없는 말이군. 너희들끼리 쓰는 은어인가?”
살려줄 생각이 없는데 이렇게 대화하는 이유는? 녀석이 지쳐 있으니까? 아니면 사용하던 마법 도구의 지속시간이 끝나서?
‘지금이 기회인가?’
이름 높은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마법 도구의 기상천외함은 도른도 잘 알았다. 델바나스만 해도 순간가속이 가능한 장화를 가지고 있었으니까.
‘환상을 보여주고, 기척을 없애는 도구? 있을법해. 그리고 조금은 지쳐 보였어.’
베리안의 목을 가볍게 칠 정도로 녀석은 빠르고 강했지만, 쉬지 않고 40명을 죽여서 그런지 말투에 피로감이 느껴졌다.
“넌 검성회의 일원인가?”
“난 사무라이가 아니다.”
즉답.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다.
모든 건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 위해, 녀석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시간을 벌려고 도른이 질러본 말이었다.
“이얏!”
힘이라면 지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하고 녀석이 있을 자리에 배틀액스를 내려
텁.
“엇?”
찍다가 두 손이 무언가에 잡혀버렸다.
“아?”
손을 빼내려고 아무리 힘을 줘도 빠지지 않았다. 바보 같은 표정을 지은 채로 녀석과 눈을 맞추는 도른.
“0.7 까까시.”
그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끝으로 도른의 목이 공중을 날았다.
***
씨바, 너무 급하게 뛰어와서 기술명을 한 번도 못 말했네. 이건 감점 포인트다.
“내 말이, 맞지?”
오르페가 드디어 도착했다. 숨을 고르기 위해 헉헉대는 게 꼭 뽀삐같다.
“이 도끼 좀 봐. 막 줄어들고 늘어나.”
마나를 흘리니 방금 득템한 도끼의 손잡이가 다시 길어진다. 이건 좀 좋아 보이네. 챙겨놓으면 어떻게든 쓸 거 같은 예감이 든다.
“델바나스 부하들? 저기 죽어있는 놈은 도른 맞지?.”
“그런 듯?”
“다 죽여버렸네. 잘했어. 어차피 이걸 다 설명하기는 힘들 거야.”
암살자 한 놈을 잡은 건 상식적으로 가능한 일이지만, 요괴떼랑 야쿠자 40명 도살은 떠돌이 검객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닌힘숨(1화참조)을 하려면 일단 오르페 말대로 비밀로 하는 게 맞다.
“그럼 시체는 그대로 여기에 놓는 거로?”
“그래. 하이너야 다른 몬스터들이나 동물들이 알아서 먹겠지. 어차피 지나가는 사람도 없어.”
깔끔하게 마무리된 거 같다.
“내 배낭 좀 줘봐.”
“여기.”
오르페에게 받은 배낭을 열었다. 닌자슈트를 배낭에 챙겨놓기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악은 어디에서나 도사리고 있어서, 탈주닌자는 준비성이 철저해야 한다.
“이게, 존나, 안 들어가네.”
“배틀액스를 배낭에 넣게? 아무리 손잡이가 줄어들어도 그렇지.”
“내용물을 좀 버리면 돼.”
배낭 정리를 안 한 지 꽤 됐지. 바닥까지 뒤적이니 이상한 책들이 나왔다.
“그거 마르톨란 영주 책 아냐? 안 돌려줬어?”
“그러네?”
뭐, 까먹을 수도 있지. 다시 마르톨란에 간다고 해도 그건 먼 훗날의 일이다. 그냥 대충 바닥에 버렸다.
“안되네.”
이래도 안 들어가? 독하다 독해. 그냥 다음에 와서 회수해야겠다. 아무튼 이제부터 내 도끼다.
“이제 돌아가자.”
“...그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