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화 〉 26화. 야쿠자데스빔 (1)
* * *
‘예술가들의 전당’의 본점이 있어 모든 예술가가 한 번은 거쳐 간다는 렝헬.
예술과 낭만의 도시, 렝헬입니다.
그 도시의 이름이 걸린 표지판 밑, 한 남자가 큰 종이를 이불 삼아 자고 있었다. 예술가들의 노숙은 렝헬에서 가장 보기 쉬운 광경 중 하나인지라 행인들도 그를 무시하고 지나쳤다.
“으음...”
밤의 추위에 얼어붙은 덥수룩한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흰 김을 뿜어내며 일어난 실패한 예술가의 이름은 새튼.
“웬 종이가...?”
종이를 덮고 잔 기억은 없는데. 누군가 놓고 갔나? 중얼거리던 새튼이 외투누더기에 가까운의 주머니에서 안경을 꺼내 의문의 종이를 읽었다.
“당최 무슨 소리인지...”
어이가 없어진 새튼이 종이를 북북 찢었다. 팔리지 않는 싸구려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음모론으로 가득한 전단지.
팔리지 않는 싸구려.
갑자기 그 문장이 새튼의 가슴을 후벼팠다.
이건 대박이야!
마르톨란에서 엄청난 영감을 얻은 그는 ‘강철을 마시는 새’의 집필이 끝나자마자 렝헬로 달려갔었다.
이런 건 정통 환상소설이 아냐!
그렇게 ‘예술가들의 전당’에서 쫓겨났고.
새튼 씨? 요즘 사람들이 왜 소설을 읽는다고 생각하십니까? 깨달음과 교훈을 위해? 말하기 전에 생각해 봤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혼자 있을 때 시간을 때울 게 필요해서입니다. 진중한 전사들의 땀내 나는 이야기? 그딴 걸 누가 읽습니까? 미쳤습니까?
자존심을 굽히고 찾아간 ‘초콜릿 양피지’에서도 쫓겨났다.
“흑...”
새튼의 눈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다. 낭만(외설) 소설 업계에서는 나름 알아주는 그였기에 이런 대우는 견디기 힘들었다. 이제는 비상금마저 다 떨어진 상황.
과수원이라도 하나 물려주마. 가문의 이름에 먹칠하지 말고 돌아오도록.
형님의 말이 오늘따라 사무치게 아팠다. 그러나 여기서 물러난다면 대문호의 이름이 울 터.
“...눈물 흘려도 좋다. 마음의 눈물만 흘리지 않으면 된다.”
혼자서 떠드는 그를 사람들이 병신 보듯이 쳐다보고 갔다.
꼬르륵.
“...길드 일이라도 구해봐야겠군.”
새튼이 소매 끝으로 눈물을 닦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오늘도 살아가야 한다.
***
야쿠자&요괴 곤약 사건 이후로 사흘이 지났다.
“그래서 성벽 쪽 지휘는 트렌 경이 맡는 게 좋을 거 같군.”
“알겠소.”
슬슬 야쿠자들이 움직이기 시작해 적어도 3일 안에는 전쟁이 시작될 상황.
곧 닥칠 공성전 준비를 위한 회의가 큰 천막에서 열렸고.
“전 병사들과 같이 성문을 지키겠습니다.”
“세일린 양이 있다면 든든하지.”
그렇게 4시간이 지났다.
미쳐 버리겠네 진짜. 중요해 보이는 일이길래 꼽사리를 낀 내 잘못이다. 졸음을 참기 위해 허벅지를 꼬집는 것도 슬슬 효과가 없다.
“델바나스는 지휘관이라 선봉에 설 일이 없으니, 전투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건 도른이요. 내 동료도 그 녀석의 손에 목숨을 잃었소.”
아그득빠그득 이를 가는 트렌. 젊은 나이에 저렇게 이를 많이 갈면 나중에 틀니가 된다. 도를 넘은 증오는 해로운 법.
그나저나, 도른? 들어본 거 같은데 누구였지? 손도끼의 주인이었나? 오르페가 날 보고 끄덕이는 걸 보니 맞는 거 같다. 이미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긴 하지만 비밀로 해야 하니 어쩔 수 없다.
공성전 때 괜히 섀도복싱이나 안 했으면 좋겠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죠.”
드디어 끝났다. 오르페는 뭐가 또 그렇게 궁금한지 다른 사람들을 붙잡고 뭘 묻고 있다. 수업 시간이 끝나고도 질문을 멈추지 않는 아이를 보는 느낌.
“스벌.”
나에게도 누군가 붙어서 이것저것 시키거나 물어볼 수도 있겠다 싶어 재빨리 천막을 떠났다. 몇 걸음만 걸으면 바로 바깥이라 그나마 다행.
터벅터벅.
조금 걷다 보니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어이, 귀상어.”
“사, 사장님.”
양아치 사총사 중에서 가장 많이 ‘교화’된 녀석이다. 몸도 처음 만났을 때보다 더 튼튼해진 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단련한 티가 난다.
주변을 둘러보니 다른 녀석들도 보였는데, 아귀는 노안이 찾아온 상태였고, 유니콘은 별문제가 없어 보이는 게 귀상어 다음으로 상태가 좋았다. 코주부는 머리카락이 빠지고 있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탈모는 아닐 거다. 아마 영양실조 때문에 일시적으로 일어나는 거 같다.
내 책임은 일절 없다.
“잘하고 있어.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렴.”
“하하...”
뭐가 그렇게 멋쩍은지 웃는 귀상어. 녀석이 갑자기 나무창을 쥔 두 손에 힘을 꽉 쥐었다.
“...사장님. 사실 전 옛날부터 기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아, 괜히 아는 척했네. 이제 곧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겠지. 이건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난 지금 집에 들어가서 자고 싶군.”
“저도 압니다. 제 신분과 능력으로는 절대 될 수 없다는 걸요. 그래도 이 며칠간은 정말로 즐거웠습니다. 기사가 되지 않아도, 그냥 일반 병사가 되어도 누군가를 지키는 일은 할 수 있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합….”
너는 떠들어라. 나는 간다.
혼자서 열심히 떠드는 귀상어를 뒤로 한 채 성벽을 내려갔다.
남의 시시콜콜한 사정을 듣는 거만큼 재미없는 게 없다. 그런 걸 좋아하는 건 관음증 환자 또는 그 사람으로 위장하기 위해 개인정보를 캐내는 요괴뿐이다.
“가장 늦게 온 사람이 술래!”
“디아나! 혼자 너무 빨리 가잖아!”
계단을 타고 내려가니 디아나가 아이들과 뛰어놀고 있었다. 내 인간수업을 받을 때보다 즐거워 보이는 게 조금은 화가 난다.
전시상황이라 모든 애는 집구석에 처박혀 있어야 했지만, 골돈의 영주가 아이들의 삶까지 빼앗을 순 없다고 강력히 주장해 이렇게 됐다. 전쟁이 시작되면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겠다고 말하긴 했다.
미친 듯이 웃는 디아나에게 눈으로 경고를 보내고 광장으로 향했다. 집에 가는 길이 이렇게 멀다.
“...나무정령.”
도착한 광장. 전쟁의 광기로 인해 미쳐버린 소년이 퀭한 눈으로 고목이 있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며칠째 저 자리에서 나무토막 하나만을 꼭 붙들고 있는 게 좀 안쓰럽다.
난 위로가 서툰 편이니 그냥 무시하기로 했다.
그렇게 걷던 도중이었다.
“비, 비상! 비상!”
이등병이 헐레벌떡 뛰어서 감시대를 나왔고,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크게 비명을 질렀다.
“노, 놈들이 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가는 날이 장날이다.
***
“병력의 수는?!”
판금갑옷으로 무장한 트렌이 병사들과 성벽 위에 섰다.
말을 타고 앞서오는 마적단과 수많은 도적 떼가 평야를 질주하고 있었다.
“저, 적으면 500. 많으면 700인 거 같습니다!”
“근방의 도적이란 도적은 다 불러모았군.”
괜찮다. 성문은 완성됐고, 성벽 위로 돌이라도 던질 수 있는 젊은이의 수도 수백이 넘었다. 적들에게 특별한 공성 병기도 없는 거 같다.
“아무리 수가 많아도 결국은 도적 떼.”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선봉에 도른이 보이지 않았다. 전황을 살펴보던 트렌이 크게 외쳤다.
“전쟁이다! 훈련을 받지 않는 자는 아이들과 노인들을 대피시키고, 받은 자는 각자 위치로 향해라!”
허우적대던 사람들이 질서를 갖추기 시작했다. 몇 안 되는 궁수가 자세를 잡았고, 투석구를 든 사람들이 성벽으로 향했다. 나무창을 든 병사들이 성문에 안쪽에 자리를 잡은 순간 모든 준비가 끝났다.
턱.
그리고 적들 또한 골돈의 앞에 당도했다. 말에서 내린 델바나스가 숨을 들이쉬더니 크게 소리쳤다.
“문을 열고 전부 떠나라! 지금 도망치면 죽지 않을 수도 있다!”
병사들의 기를 죽이고, 미세한 마음의 균열을 만들려는 헛소리. 뻔한 보이는 그 수작질에 트렌이 대항했다.
“너희들은 고작해야 약탈자일 뿐이다! 주변 마을을 수탈하고 골돈에 칼을 들이민 죗값을 치르게 해주마!”
“그래!”
“아예 장님으로 만들어 주마!”
도적들도 지지 않고 욕지거리를 쏟아냈다.
“영주년이랑 붙어먹었다는데 진짜냐?”
“골돈의 미래가 아주 창창하겠구먼!”
적당한 거리에서 양 진영이 기선제압을 위해 분노에 찬 고함을 쏟아내며 분위기를 과열시킬 때.
갑자기 델바나스가 외투를 벗더니 골돈 성벽을 향해 오른손을 뻗었다.
“...?”
이변을 느낀 트렌이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이었다.
델바나스의 몸이 녹색으로 빛나더니.
피슝
쭉 뻗은 오른손으로 초록빛 투사체를 쏘아냈다.
“피해!”
조금 늦은 명령에 허겁지겁 사람들이 대피했고, 거리상 피할 수 없다 판단한 트렌이 방패를 들어 올렸다. 투사체가 성벽에 닿는 순간.
콰앙!
골돈의 성벽 중앙이 파괴돼 무너져 내렸고.
“켁~!”
부서진 방패와 함께 날아오른 트렌이 바닥에 떨어졌다. 중상은 확실한 상황.
“아아...!”
“말도 안돼...”
공성전이 시작되기도 전에 혼란에 휩싸인 골돈.
“도망쳤어야지.”
델바나스가 비웃으며 다시 오른손을 들어 성문을 가리켰다. 다시 발사되는 투사체.
쾅!
그렇게 허무하게 성문도 부서졌다.
"흠..."
과부하가 걸린 듯이 몸에서 녹색 연기를 뿜어내며 주저앉는 델바나스.
“돌격!”
그런 그녀를 대신해 최측근인 스미스가 공격명령을 내렸다.
“우와아아아!”
골돈의 패배가 확실한 상황, 마적단을 위시한 도적들이 진격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