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27화. 야쿠자데스빔 (2)
* * *
“꺼어어어...”
흙투성이가 된 레너드가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으음...”
멀어지는 의식을 붙잡고 몸 상태를 확인하는 레너드. 훼손된 부위는 없었고, 구리 갑옷도 멀쩡했다.
뚝뚝.
다만 얼굴에서 피가 떨어지고 있었는데, 작은 나무 파편이 뺨에 박혀 있던 거였다.
“허...”
가볍게 뽑아낸 후 마나로 지혈을 마친 레너드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골돈의 모든 사람이 시간과 열정을 쏟아부어 완성한 성문이 삽시간에 무너졌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방법으로.
“아이고오...”
“어무이~!”
공성전에서 방어자의 이점을 모두 잃은 골돈의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공포는 빠르게 퍼져나가 레너드에게도 찾아왔다.
“...”
레너드의 몸이 벌벌 떨렸다.
골돈에 온 이유? 그냥 한심한 늙은이의 치기 어린 화풀이다.
‘내가 여기서 희생한다 해도 의미가 있나? 어차피 골돈 시민들 모두가 죽을 텐데.’
도중에 도망친 자신과는 다르게 텔라스 항전에서 끝까지 남아 싸우다 목숨을 잃은 동료 기사들이 떠올랐다. 그 누구도 지키지 못한, 정말로 무의미한 죽음.
‘이건 내 죽음이, 내 마지막 전장이 아니다. 적어도 조금 더 가치 있는 곳에서 죽자.’
레너드가 그렇게 변명 섞인 정당화를 마쳤다.
“이 개새끼들아! 이쪽이다! 이쪽이야!”
아직 포기하지 않은 세일린은 성문 앞에 서서 한 맺힌 외침을 토해내고 있었다.
“너드 경!”
슬픈 눈으로 그녀를 지켜보던 레너드가 몸을 돌렸을 때, 누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레너드 경!”
땀을 뻘뻘 흘리며 달려오는 남자였다.
“존?”
그 익숙한 얼굴에 레너드가 잠시 멈췄다.
“기억하시는군요! 합류하러 왔습니다!”
“...기사가 되고 싶었다고 말하던 젊은이.”
아무것도 모르는 젊은이들은 동화 속에 나오는 기사를 동경하기 마련이다.
“그렇습니다! 세일린 양이 먼저 앞서나갔군요?”
“...그렇지.”
젊은 시절의 레너드도 그랬다. 그래서 피나는 연습 끝에 기사가 됐고, 은여우 기사단에 들어갔다.
“...트렌 경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지휘관이 필요합니다.”
“...”
다른 기사단원들도 그랬을까? 이제는 영원히 알 수 없다.
“후...”
갑자기 도망치고자 했던 자신이 병신같이 느껴졌다. 어디까지 한심해져서 죽을 생각이었나.
“레너드 경? 괜찮으십니까? 아, 얼굴에 피가...”
한숨을 쉬는 레너드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존.
‘젊은 시절 꿈꾸던 기사처럼, 녀석들처럼.’
마음을 굳힌 레너드가 검을 뽑았다.
“다른 병사들을 이쪽으로 데려오게. 내가 지휘하지.”
“알겠습니다!”
존이 고함을 지르며 넋이 나간 병사들을 모았다.
“세일린 양! 이쪽으로 오시게!”
“방법은 있습니까?”
“만들어야지.”
다가오는 도적들을 노려보던 세일린이 뒤로 빠져 레너드 옆으로 합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을 차린 골돈의 병사들이 레너드를 중심으로 뭉쳐 방어진을 구축했고, 도적들이 입성했다.
“무기 든 녀석들부터 죽여!”
가장 빠르게 온 마적들이 말을 몰아 방어진을 에워쌌다. 그들의 손에는 날카로운 곡도가 들려있었다.
“배운 대로 하면 된다. 찌르고! 빠지고! 알겠나!”
레너드가 사기를 돋우기 위해 외쳤고.
“그래. 이렇게 죽는 게 억울하진 않지.”
“해보자!”
“골돈 만세!”
“난 귀상어 존이다!”
병사들이 호응했다.
“이야아아아!”
그렇게 두 군세가 충돌하기 직전, 검은 그림자가 하늘에서 떨어졌다.
“오늘 몰살당하는 건.”
뎅거덩!
그림자의 일섬에 순식간에 날아가는 마적들의 목.
“야쿠자뿐이다.”
갑자기 나타난 검은 초인이 대지를 밟고 마적들을 노려봤다.
“누, 누구야?”
“아군인가?”
갈팡질팡하는 골돈의 병사들.
“누구시오? 도와주러 온 거요?”
보다 못한 레너드가 직접 물었지만, 그는 대답 없이 당황하는 마적들의 움직임만 살폈다.
“타, 탈주닌자야! 우릴 도우러 왔어!”
그들 사이에 있던 오르페가 어쩐지 부끄러워하며 외쳤다.
“탈주닌자? 그게 뭔데?”
“나도 못 들어봤는데.”
“와자뵷~!”
갑작스러운 탈주닌자의 난입에 전장이 혼란에 빠졌다.
***
씨발, 어쩐지 이상하다 싶더니 바지를 거꾸로 입었네.
웃통 벗고 있을 때 갑자기 폭발음이 들려서 허겁지겁 입고 왔더니 이렇게 됐다. 침착하게 닌자탈착의법을 썼어야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감수할 만한 불편함이다.
"하압!"
즉사 찌르기는 끝까지 안하네. 독하다 독해.
어찌됐든 오르페는 무사해 보였다. 디아나는 안 보였지만 잘 있지 않을까? 본질은 요괴인 만큼 쉽게 죽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저, 저 새끼! 그놈이잖아! 저번에 염탐하던!”
뒤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던 삿갓 쓴 야쿠자가 소리를 빽 질렀다. 저번에 천막촌에서 봤던 그놈이네. 다시 보니 나름 반가웠다.
“그, 그러네!”
“골돈 편이었어?”
“스미스 님이 수상하다 했잖아!”
“도른 그 병신 때문에!”
당연히 야쿠자들의 트래쉬토크를 듣는 취미는 없었다. 바로 급가속해서 달려갔다.
“이 새끼!”
말을 탄 야쿠자 라이더들이 고추(채소의 일종)처럼 생긴 휘어진 칼을 휘둘렀다.
가볍게 피해 주고 꿀밤을 먹여줬다.
“수박 깨기 살법.”
펑펑펑펑!
“끼야악~!”
이쁘게 박살 나는 야쿠자들의 수박통. 여름의 바닷가 간접체험이다.
이히힝~
주인을 잃고 울부짖는 말들의 비명이 골돈에 울려 퍼졌다.
“미, 미친! 맨손으로!”
추운 저녁, 여동생을 때리고 맨몸으로 집에서 쫓겨난 오빠처럼 와들와들 떠는 야쿠자들.
절대 경험담이 아니다.
“닌닌.”
보호구를 착용한 놈들이 생각보다 적다. 주먹이 더 유용한 상황이라 닌자도를 집어넣었다.
닌자 펀치 한 대만 갈겨도 뒤질 녀석들이다.
“전진! 전진한다!!”
레너드가 판단을 마쳤는지 병사들을 이끌고 돌진했다.
행동반경이 겹치면 위험하니 멀리 떨어진 놈들이나 패야겠다.
폴짝!
“어어!”
“나, 난다!”
바로 공중제비를 돌아 야쿠자들의 뒤로 갔다. 그나마 눈치 빠른 삿갓남이 칼을 휘두르며 덤벼들었다.
“골돈 빵구낸 거 어떤 새끼야.”
팍!
공격을 피하기 귀찮아서 그냥 칼날을 잡고 내 쪽으로 끌었다. 이제 어지간한 놈들 움직임은 다 읽힌다.
“에에?”
“대답해.”
칼과 함께 딸려온 삿갓 야쿠자의 멱살을 잡고 살짝 흔들었다.
“오억!”
빠가닥!
분명히 살살 보듬어 줬는데도 녀석의 목이 꺾였다. 존나 당황스럽네.
“누구든 상관없으니 대답해~!”
텅!
삿갓의 몸을 둔기 삼아 야쿠자들을 후려쳤다.
쿵!
“우아아아아악!”
날아간 야쿠자들이 뒤에 있던 야쿠자들과 서로 박치기를 하더니.
더러럭
땅바닥에 데굴데굴 굴렀다.
“데, 델바나스입니다!”
“살려주십쇼!”
당연하지만 야사요를 살려준다는 건 불상이 두 쪽 나도 안 되는 일이다.
“고마워.”
텅기덕~ 쿵 더러럭
리듬감을 살려 그렇게 몇 번 흔들어 줬더니 어느새 다 죽어있었다.
“이…. 이게 뭐냐...”
성문으로 들어오던 뉴페이스 야쿠자들이 입을 떡 벌리고 이쪽을 봤다. 야쿠자 무한리필집이 되어버린 골돈.
아직도 이렇게 많다니, 하나하나 맨손으로 때려잡다간 끝이 없겠다.
“저놈부터 죽여!”
다가오는 야쿠자들을 적당히 혼내주면서 휘두를 만한 게 없나 찾았다. 부서져서 조금 작아진 기둥이 눈에 들어온다.
되려나? 한 번 해보자. 양손으로 기둥을 들어 올렸다.
드드드드.
“음...”
역시 이건 좀 무겁다. 아직 슈퍼닌자까지는 아닌 모양.
“이럇!”
붕 붕 붕
화려한 기둥 돌리기가 야쿠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쳐, 쳐다만 보고 있지 말고 피해!”
늦었다.
쐐액
그대로 날아간 ‘골돈의 분노’ 호.
쿠궁!
그것과 입맞춤한 야쿠자들이 순식간에 빈대떡이 됐다.
“우아아아악~!”
겁에 질린 야쿠자 몇 놈이 도망친다. 이 정도면 골돈의 병사들도 쉽게 싸울 수 있겠지.
야쿠자 라이더 위주로 죽여서 남은 건 보병뿐이라 괜찮을 거 같다.
“델바나스.”
이제 바깥으로 나가 이 새끼를 잡아야 한다.
뭔 개수작을 부렸는지 몰라도, 한순간에 골돈에 구멍을 뚫은 걸 보니 방심하면 안 되는 상대가 분명. 델라미온 그 새끼도 이렇게 강력한 광역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둘 다 ‘델’ 씨네.
탁탁탁
바로 성문으로 나갔다. 바깥에는 아직도 야쿠자들이 존나 많았다. 어떻게 다 죽일지 막막할 정도.
“쏴!”
타타타!
야쿠자 아처들의 화살을 피하면서 델바나스를 찾았다.
내가 찾던 적발의 애꾸눈 야쿠자는 전기밥솥처럼 몸에 김을 내뿜고 있었다.
“넌 뭐냐. 왜 날 방해하는 거지.”
다짜고짜 자기소개를 시키는 델바나스.
“뭐긴 씹새야. 그런 걸 물어볼 때는 네 소개부터 하는 거야.”
예의를 모르는 무식한 야쿠자 새끼. 이 새끼에 비하면 델라미온은 양반이다.
“닌자포위진.”
화살이야 쉽게 피할 수 있지만, 녀석한테 광역기가 있으니 주위를 분산시키는 게 가장 합리적인 전술일 터.
전술.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타타타탓!
닌자도를 뽑아든 수십 개의 잔상과 함께 달려나갔다.
바지가 갑자기 또 신경쓰이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