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화 〉 29화. 야쿠자데스빔 (4)
* * *
히히힝!
“으아악!”
병사들의 나무창에 배가 꿰뚫린 말이 쓰러졌고, 마지막 마적이 땅바닥을 굴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일린이 녀석을 향해 달려갔다.
퍼걱!
“어...억...”
그녀의 가죽신발 앞부분에 박힌 못이 마적의 두개골을 관통했다. 피를 바닥에 흩뿌리며 죽어가는 마적.
붕!
세일린의 시야가 닿지 않는 뒤쪽. 근육질의 도적이 동물 뼈로 만들어진 몽둥이를 내질렀고, 그녀가 빠르게 뒤돌아 대응했다.
텅!
서로를 튕겨내는 세일린의 쇠곤봉과 도적의 뼈몽둥이.
“이, 이 새끼!”
기습에 실패한 게 어지간히 분했는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살짝 뒤로 물러서는 도적.
동물 가죽으로 무장한 녀석의 키가 평범한 성인 남성과 비교해도 머리 하나 정도는 더 컸다.
적어도 도적단의 부두목급.
녀석을 견제하며 살펴보던 세일린이 양손으로 쥐고 있던 쇠곤봉을 오른손으로 넘기더니, 빈 왼손으로 허리춤의 단도를 뽑아 녀석에게 던졌다.
쉭
보자마자 몸을 틀어 피한 도적의 왼 다리를 살짝 베고 지나가는 단도.
“빌어 처먹을 년아. 용병단에서 투척술은 안 가르쳐 주디?”
전투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얄팍한 부상. 도적이 세일린을 조롱하며 몽둥이를 높게 들어 올렸고.
풀썩.
그대로 허물어지듯 주저앉았다.
“어어?”
땅바닥에 떨어진 단도의 날 끝에는 파란 가루가 묻혀 있었다.
“마비독.”
퍼걱!
그 짧은 한마디와 함께 휘둘러진 쇠곤봉이 도적의 골통을 박살 냈다.
“녀석들이 흩어진다! 밀어붙여!”
단도를 주워드는 세일린의 뒤에선 레너드가 병사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쇳덩이로 맞았는지 투구가 살짝 찌그러든 상태였음에도 쉬지 않고 고함을 지르는 노기사.
“바짝 붙어!”
“가자!”
승리에 대한 희망과 전투의 열기에 취한 병사들이 나무창을 앞세우고 전진했다.
“합!”
그들 중 가장 눈에 띄는 활약을 보여주는 건 선봉에 선 오르페였는데, 그녀가 창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적이 하나씩 죽어 나갔다.
“오르페 양! 실력이 정말 대단하구려! 이것이 젊음인가? 하하하!”
서걱!
호쾌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뒷걸음치던 도적의 머리를 베는 레너드.
“지, 지원은 안 와?”
“바깥 새끼들은 왜 아직도 들어오지 않는 거야!”
마적단이 전멸해 구심점을 잃은 도적들이 혼란에 빠졌다. 힐끔힐끔 부서진 성문을 봤으나 지원군은 오지 않는다.
끼야아아아아아아악!
도망쳐!
“뭐, 뭔데!”
“바깥 녀석들이 도망친다!”
“이런 좆같은!”
바깥에서 끔찍한 비명과 함께 퇴각하는 발소리가 들렸고, 이제야 정신을 차린 도적들이 도망치기 시작했다.
“놈들이 도망친다! 따라가라! 다시는 골돈을 넘볼 수 없게 만들자!”
““우와아아아!””
존과 유니스를 비롯한 골돈의 병사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사실상 승리가 확정된 상황. 과묵하던 세일린도 쇠곤봉을 하늘로 들어 올려 그들을 축하했다.
“오르페 양은 조금 쉬시오. 지금까지 고생 많았소!”
“감사합니다. 레너드 경.”
한숨 돌리며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내는 오르페. 자신이 이전보다 확실히 강해진 게 느껴진다.
로빈이 있었기에 강해질 수 있었다.
‘로빈, 또 해냈구나.’
빈약한 무장의 오합지졸 도적들이긴 하지만 수백 명이 넘었다. 혼자서 그만큼이나 죽이는 건 왕국 최강의 기사들이라 칭송받는 칠검경이 아니고서야 힘든 일.
로빈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 세상의 축복이 아닐까.
나날이 급격하게 강해지는 로빈을 향한 동경심과 경외감을 품고 오르페가 다시 걸었다.
***
“크, 오오오.”
조종당하는 꼭두각시처럼 기괴하게 움직이던 델바나스가 다시 또 멈췄다.
“아아, 오오.”
입을 쫙 벌리더니 고개를 높이 드는 오야붕. 뭔 지랄을 할지 감이 안 잡혀서 일단 물러섰다.
“브웨에에엑~!”
갑자기 입으로 녹색 액체를 뱉어낸다.
아니, 내 쪽으로 발사했다!
촤촤촤촤촤!
피하고 공격하려 했지만, 델바나스가 소방관이 물대포 쏘듯이 계속해서 쏘아내 그냥 전력질주로 그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치이이이
“염산 브레스?!”
바닥에 닿자마자 지면을 녹여버리는 게 딱 그거다. 대체 무슨 원리지?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색깔이나 저 찐득해 보이는 점성으로 보아 요괴들이 먹고 미쳐버린 곤약의 정체가 저게 아닌가 싶다.
“우아아아악!”
눈먼 브레스에 직격당한 안경잡이의 몸이 녹아내렸다. 저래서 길가에서 잠들면 안 되는 거다.
촤촤촤!
이제는 탄막 게임이 되어버린 전장.
골돈에 피해가 가지 않게 산 쪽으로 유인하려 했지만, 델바나스는 신장개업한 가게의 바람 인형처럼 몸을 괴상하게 비틀면서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거의 SSS급 괴담.
“노처녀 애꾸눈 야쿠자! 이쪽이다!”
어그로에도 꼼짝 안 하는 걸 보아 귀도 안 들리는 모양.
“으워워워어~!”
구토를 멈춘 델바나스가 오페라 가수처럼 노래를 부르더니 입고 있던 옷을 잡아 뜯었다.
“닌?!”
조금의 기대감을 품고 구경했으나, 내가 원하던 광경은 나오지 않았다.
“크르르...!”
완전히 검게 변한 두 눈.
녹색으로 빛나는 혈관.
검은 털이 숭숭 돋아난 피부.
황금볏과일박쥐처럼 날개가 돋아난 등.
갑자기 누드쇼를 벌이더니 완벽한 요괴로 변한 델바나스의 두 눈이 정확히 날 향했다.
변신 중에 사라졌는지 오른눈에 박혀 있던 빛나는 구슬이 보이지 않는다.
중요한 건 아니겠지?
“크워어!”
알몸의 박쥐요괴가 날 향해 달려들었다. 등에 달린 날개는 그냥 패션이었나?
두리번두리번.
뭐 사용할 게 있나 주변을 둘러보니 내 닌자도와 델바나스(였던 요괴)의 전기 채찍이 눈에 들어왔다.
뎅구르르
몇 번 굴러서 둘 다 회수하고 녀석과 맞섰다.
뎅겅! 부웅탁!
보검인 닌자도로 베어도 다시 붙는 박쥐요괴의 몸. 아무래도 자르고 베는 것은 일절 통하지 않는 거 같다.
“크어어어!”
박쥐요괴가 팔을 휘두르며 공격했지만, 하나도 위협적이지 않았다.델바나스가 강했던 이유는 장비와 판단력, 속도 때문이었다.
이 녀석은 특별한 무기도 없었고, 무뇌아처럼 내가 있는 방향을 향해 펀치를 날리기만 했다. 어째선지 이동속도도 더 느려졌고.
옷과 함께 사이좋게 찢어져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그녀의 신발이 사실 마법 도구였던 게 아닐까?
“그냥 장비빨이었네.”
갑자기 이 모든 게 죽고 싶어질 만큼 시시해졌다. 아까 도망친 야쿠자들이나 잡는 게 더 재밌을 지경.
파지지직!
아까 얻은 전기 채찍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전기가 잘 흐르는 걸 보니 오야붕만을 위한 전용 장비는 아니었던 거 같다.
“닌닌.”
베기가 통하지 않는 이상 현재 남은 방법은 딱 하나다. 속성을 통한 공격.
지하국대적의 목에 재를 뿌리면 붙지 않는다.
이 녀석의 특징으로 보아 지하국대적과 비슷한 종류의 요괴가 분명.
따라서 이 요괴의 약점은 재.
재는 불과 나무가 만들어낸 합작품.
불, 전기, 마그마는 상하관계에 있지만 따지고 보면 같은 속성이다.
완벽한 오단논법에 의해 전기공격이 녀석에게 통한다는 정답이 완성됐다.
“와자뵷!”
붕 차르르르
“크오?”
채찍이 저절로 녀석의 몸에 칭칭 감기는 걸 확인하고 다시 마나를 흘려보냈다.
파지지직!
“오오오오?!”
녀석의 몸이 충격으로 덜덜 떨렸다. 몇 초 후 신노빈표 전기 통구이가 될 게 자명.
이번만큼은 현대인의 과학상식이 빗어낸 승리다.
“오오오...”
내가 잘못 보고 있는 건가? 녀석이 전기충격에 익숙해지는 거 같았다.
지지지직...
“오…. 오...”
이제는 제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 보이는 녀석.
“미치겠네 진짜.”
내가 도출해낸 정답이 틀렸다고?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변을 받아들일 수 없던 나는 채찍에 흘리던 마나를 끊었다.
“오코노미야끼 살법.”
과학 전부 좆까라 해라.
믿을 건 내 단련된 신체뿐이다.
촵촵촵촵촵!
꽁꽁 묶인 녀석의 몸을 찰흙처럼 주물렀다.
우두두둑
“오아아아!”
놈의 뼈가 전부 으스러질 때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주물렀다.
촵촵촵촵촵!
“...”
축구공처럼 둥글게 변한 녀석의 숨이 끊겼다.
“아니, 시발.”
그냥 처음부터 타격으로 승부 봤으면 끝나는 일이었네.
누가 보고 있었으면 쪽팔려서 자살했을 거다.
그렇게 인생무상을 느끼고 있을 때, 녀석의 몸이 빠르게 부식되기 시작했다.
치이익...
그렇게 사라지는 녀석. 이제는 별 감흥도 없다.
도망친 야쿠자들이나 쫓으러 등을 돌리려 할 때였다.
우우우우웅
델바나스=박쥐요괴가 있던 자리에 녹색 구슬만이 남아 빛을 뿜어냈다.
이 이질감과 미묘한 익숙함.
단풍잎 마을에서 악몽을 꿀 때랑 비슷한 감각이다.
우우우우웅
구슬이 나에게 말하는 거 같았다. 손을 뻗어서 잡으라고. 힘을 줄 수 있다고.
“꺼져.”
뎅겅!
당연하지만, 탈주닌자인 나에게 요괴의 힘 따위는 필요 없다.
바로 구슬을 두 조각 냈다.
사아아아아!
“닌?!”
샥!
잘린 구슬에서 연기가 흘러나오더니, 내 코로 들어갔다.
이건 대체?!
갑자기 눈앞이 깜깜해졌다. 악몽을 꿀 때처럼.
넌…. 벨카투나의 숙주?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의 영혼이 느껴지지 않는군…. 육체 주인의 영혼도….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입도 열리지 않는다.
천천히 알아봐야겠군. 이제부터 넌 내 숙주다. 내가 인도하겠다. 보아라. 이곳으로 가라.
이상한 지식이 강제로 주입된다.
정신방벽이 아주 강하구나. 그렇지만 소용없다. 받아들여라. 내 이름은 하스샨다. 내가 인도하겠다. 이곳으로 가라.
몸이 멋대로 움직이려 한다.
그렇지만 그 어떤 새끼라도 탈주닌자를 끌고 다닐 순 없는 법.
통제권을 빼앗긴 몸에 힘을 줘 움직임을 멈췄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절대로 움직이지 않겠다고 생각하니 됐다.
...좋다. 너는 특별한 방법이 필요하겠군.
@#@##@##@#@#@#@#@#@#@#@#@#@#@#@#@#@@@
엄청난 무의식의 쓰나미가 몰려와 '나'라는 존재를 산산이 조각내려 했다.
어떻게든 의식을 유지하기 위해 내 사명을 계속 되새겼다.
야사요를 없애고 무고한 생명을 구해 낙원을 구현한다.
야사요를 없애고 무고한 생명을 구해 낙원을 구현한다.
야사요를 없애고 무고한 생명을 구해 낙원을 구현한다.
.
.
.
.
.
.
.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을까.
이 정도면 됐겠군. 보아라. 이제부터 이게 네 기억이다.
그리고 주위가 변했다.
“...”
됐기는 스피릿고문 요괴 씹새끼가.
당연하지만, 난 아직도 멀쩡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