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31화. 골/돈/지/하/에/있/다 (1)
* * *
“이틀 전에 마차 합석을 신청하신…. 새튼 씨?”
“맞소.”
“들어오시죠.”
운전수의 허락을 받은 새튼이 마차에 탑승했다. 돈이 없으니 혼자 마차를 타는 건 불가능.비참한 처지였지만 한탄할 시간은 없었다.
“다들 안녕하시오?”
새튼이 먼저 탑승해 있던 사람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
다들 힐끔 보더니, 무시한다. 새튼이 오큘처럼 입을 삐죽 내밀 때였다.
“반갑소. 내 이름은 제임스요. 말동무가 필요했었는데 잘 됐구려.”
새튼의 맞은편에 앉은 후줄근한 망토를 걸친 중년 남자였다.
“반갑소. 새튼이요. 마찬가지였소.”
이야기 상대를 찾은 새튼이 씩 웃었다.
시간이 많이 소모되는 마차 이동 특성상 잡담은 필수다.
“새튼 씨. 우리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지 않소?”
“흠. 제 기억에는 없소만.”
“난 기억력이 매우 좋소.”
제임스의 샛노란 동공이 커졌다.
“최근 푸스킨 마을에서 이야기 구연을 본 적이 있지 않소?”
“‘검의 연주’ 말이오? 그렇소만?”
“나도 그때 그 자리에 있었소.”
“이런 우연이! 혹시 이야기를 좋아하시오?”
“매우 좋아하오.”
“하하하! 내 이름을 기억하시오. 언젠가 대문호가 될 자의 이름이니까!”
새튼이 호탕하게 웃으며 악수를 청했다.
“기운찬 분이시구려.”
말투가 완전히 똑같은 두 남자가 손을 맞잡았다.
“보따리 안에 있는 네모난 물건은 새튼 씨가 쓴 책이오?”
“맞소!”
“그렇군. 렝헬을 떠나려는 이유가 뭐요? 예술가에게 정말 좋은 도시일 텐데.”
말문이 막힌 새튼.
이번에 낸 신간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습니다.
비상금은 예전에 거덜 났고요.
어떻게든 먹고 살기 위해 모험가 일을 해야 했습니다.
지금 퀘스트를 받고 그 장소로 가는 중입니다.
이따위 말은 자존심상 절대로 말할 수 없었다.
“...예술가의 영감은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고 찾아오지 않소. 진정한 대문호들은 긴 여행으로 자신의 색깔을 찾는다오.”
“과연. 멋진 말이오.”
제임스의 눈이 새튼의 보따리로 향했다.
“실례가 아니라면, 잠시 읽어볼 수 있겠소? 내 워낙 책 읽는 것을 좋아해서. 사례는 톡톡히 해 드리리라.”
“사례까지야. 그냥 보셔도 되오. 원고라도 상관없소?”
“괜찮소.”
새튼이 아직 인정받지 못한 세기의 걸작 ‘강철을 마시는 새’를 넘겼다.
“글의 첫머리가 인상 깊구려.”
“특히 신경 썼소.”
사락. 사락.
제임스가 책을 넘기는 소리에 집중하느라 자기도 모르게 조용해진 새튼.
몇 시간이 지난 후, 독서를 끝마친 제임스가 입을 열었다.
“이건…. 아주 대단한 작품이오.”
벌떡!
“그, 그렇소?! 안목이 뛰어나시구려!”
“손님! 운전 중에 크게 소리 지르시면 안 됩니다!”
새튼이 손으로 입을 막고 다시 앉았다.
“낭만이 사라진 시대라는 소재를 진중하고도 섬세하게 다룬 작품이었소. 특히 기승전결이 정말 완벽하더군.”
“바로 그거요!”
“그렇지만 극의 무게감이 상당해 자칫하면 지루하다 느껴질 수도 있을 거 같소. 분위기를 환기해주는 인물을 추가하는 게 어떨까 하오.”
“그, 그렇소? 고려해 보겠소.”
제임스가 비싸 보이는 파이프를 꺼냈다.
“작가라…. 그렇군. 내가 생각하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소? 흥미롭다 싶으면 가져다 쓰셔도 상관없소.”
“얼마든지.”
“한 소년 이야기요. 용사를 동경하던 소년 이야기.”
잠깐 흡연 시간을 가지는 제임스.
“후. 정의로운 사람이 되고 싶은 소년은 아니었소. 적과 싸우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
“적과 싸운다면?”
“용사라면 무찔러야 할 적이 있지 않겠소? 숙명의 적과 마주해,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초인. 소년이 생각하는 용사란 그런 거였소.”
“틀린 말은 아니오.”
“어느 날 이 소년에게 위기가 닥쳤소. 가난했던 부모가 자신을 ‘그늘’에 팔아버린 거지.”
“그늘?”
“어린아이들을 암살자로 육성하는 잔인한 암살 조직이오.”
“저런.”
“그곳에서 007이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소년은 혹독한 훈련 끝에 암살자가 되었소. 한 번의 임무도 실패한 적 없는 암살자가.”
“음.”
“시간이 흘러 소년은 남자가 됐고, 따분함을 느꼈지. 그늘에서 내려주는 임무는 남자에게 있어 아무것도 아니었거든. 그가 더 넓은 세상을 노리는 건 필연적이지 않겠소?
남자는 탈출을 시도했고, 긴 추격전 끝에 그늘에서 벗어났소. 같이 훗날을 도모한 친우들은 모두 죽었지만 말이요.”
“참혹한 이야기구려.”
“그늘을 빠져나온 남자는 질서의 비호를 받는 양지로 갔고, 점점 강해져 금세 높은 곳에 올랐소. 이 위치에서라면 적수를 찾을 수 있을 거라 굳게 믿었지.”
어느새 제임스의 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하지만 평생을 갈망하던 숙명의 적은 오랜 시간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았소. 그늘에서의 삶과 다를 게 하나도 없었지.
명령을 받아 별것도 아닌 자를 죽이고, 명령을 받아 입만 산 녀석을 죽이고…. 이 얼마나 따분한 삶이겠소?
남자는 긴 권태에 빠졌다오. ‘학살자’가 나타나기 전까지 말이오.”
“학살자?”
“남자가 붙인 그자의 별명이오. 갑자기 나타난 학살자가 남자가 추적하던 그늘의 조직원을 몰살시켰소. 그것도 한순간에. 남자가 얼마나 경악했겠소? 또, 얼마나 기뻤겠소?
이제야 만난 거요. 자신과 같은 부류의 사람을. 목숨을 걸고 싸울 만한 상대를.
숙적을.”
차분하게 말을 쏟아내는 그 모습이 상당히 뒤틀려 보였다.
새튼을 제외한 사람들이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분위기가 이상해질 무렵.
“도착했습니다!”
운전수의 목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아,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되었군.”
“잘 들었소. 그러니까….‘용사가 되고 싶었던 악당’ 이야기구려?”
“악당…. 그렇게 볼 수도 있겠군.”
제임스가 들고 있던 파이프를 품속에 넣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막상 말해보니 어디에서나 들을 수 있는 시시하고 뻔한 이야기 같군. 이거 좀 창피하오.”
“세상 사는 게 다 그렇지 않겠소? 모든 이야기는 뻔하기 마련이오.”
새튼이 가볍게 윙크를 보냈다.
“그 이야기에 ‘감성’을 넣어 맛있게 요리하는 게 예술가라오.”
“참 재밌소. 새튼 씨는 오래 사셨으면 좋겠소. 진심이오.”
제임스가 품격 있게 웃으며 눈인사를 하고 떠났다.
“극의 긴장감을 풀어주는 인물…. 인간의 마음을 지닌 몬스터 미녀라면? 이건 먹힐지도?”
길가의 바위에 앉아 한참을 중얼거리는 새튼.
말이 지나치게 많은 두 남자의 만남이 그렇게 끝났다.
***
몸 상태는 일주일이 더 지나고 나서야 호전됐다.
그동안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이번 파워업으로 얻을 새로운 힘을 상상했다.
궤도폭격의 술을 쓸 수 있게 된 건 아닐까?
델바나스의 광역기 스킬을 얻게 된 건 아닐까?
둘 다 아니라면 저번처럼 마나량이 대폭 증가하려나?
좆같게도, 셋 다 아니었다.
우우우웅
모두가 잠든 야심한 새벽.
녹색 빛의 파장이 주위로 퍼져나갔다.
대충 계산한 결과 파장의 거리는 300m 정도.
지이잉
파장이 잡아낸 골돈의 백성들이 초록빛으로 빛났다.
그렇다.
이번에 새로 얻은 능력은 전에 델바나스가 내 위치를 파악하는데 사용하던 적외선빔이다.
그거랑 코딱지만큼의 마나량 증가.
심지어 이 능력도 자연스럽게 발휘된 게 아니다.
화장실에서 괄약근에 힘을 줄 때 제멋대로 발사되더라.
“끙.”
지금도 괄약근에 힘을 주고 사용하고 있다.
델바나스 이년도 이렇게 사용했을까?
멀리서 보면 된장국, 가까이서 보면 똥인 게 삶이다.
온종일 야사요를 죽이면서 분을 풀고 싶었지만, 아직 풀어야 할 숙제가 하나 있다.
스피릿요괴 한스싼다가 내 뇌에 주입한 골돈의 비밀 지하 지도.
이제 안전해진 골돈을 떠나기 전에 이곳을 무조건 찾아가야 한다.
“로빈. 디아나도 준비 끝냈어.”
“조용히 나와. 가자.”
이번 일은 오르페는 물론이고 디아나까지 함께한다.
아까 닌자레이더로 확인한 결과 골돈의 백성 모두 꿀잠을 자고 있었으니 들킬 문제는 없다.
다들 전쟁이 끝났다며 얼쑤절쑤 춤추며 놀더니 이렇게 위기의식이 없어졌다.
“...저도 꼭 가야 해요?”
“디아나. 언제까지 수업만 할 수는 없단다. 실전을 쌓아야 좋은 닌자공룡이 될 수 있어요.”
사람끼리 죽이는 공성전은 미성년자라는 사회적인 신분을 고려해 빼줬지만, 이것까지 빼줄 수는 없는 법.
이 핑계 저 핑계 계속해서 빠지다간 나중에 꼭 해야 하는 조별과제에서도 빠지게 된다.
그 꼴만은 삼장닌자이자 스승으로써 볼 수가 없다.
터벅터벅.
도착 장소는 골돈 광장 구석의 우물. 물이 고이지 않는다고 버려진 곳이다.
팍!
제트킥으로 나무판자를 부쉈다.
“밑도 나무판자로 봉쇄했네?”
“이중 잠금이냐고.”
한 번 더 걷어차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깊지는 않네.”
오르페의 말대로 우물의 깊이는 평범했다. 여기서 끝난다면 비밀통로가 아니지.
드륵.
우물을 구성하던 가장 큰 돌덩이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일반적인 성인 장정 10명이 힘을 합쳐도 못 움직일 무게. 하지만 상대는 탈주닌자다.
드르르릉
어느 정도 밀더니 자동으로 돌덩이가 움직였다.
“와아...”
“벌레 들어간다.”
떡 벌어진 디아나의 입을 닫아주고 앞으로 걸었다.
요괴면 벌레도 잘 먹으려나? 이건 나중에 시험해야지.
“물이 고이지 않는 게 아니었네. 고일 수가 없는 거였어. 이렇게 넓은데.”
“닌닌.”
좁은 비밀통로의 끝에서 나타난 거대한 문.
“저건 뭐지?”
사람 형상을 취한 고철 로봇이 그 옆에 서 있었다.
“양철 나무꾼?!”
세계관을 잘못 찾아온 건 아닌지?
“오르페. 설명해. 저것도 요괴야?”
사이버요괴는 지구에서도 존재했다.
대학을 만들어 사람을 끌어들인 후 종족 값을 바꿔버리는 잔인한 요괴.
당연히 그 녀석들도 닌자들이 박살냈다.
“나도 처음 봐. 움직이려나?”
거미줄과 넝쿨로 가득한 이 녀석이 움직일 가능성?
솔직히 없다고 생각한다.
꾹.
“에?”
“디아나? 뭘 밟은 거야?”
“그, 그냥 구경하다 갑자기 발이 쑥 들어가길래…. 요.”
아 진짜 돌아 버리겠네.
인간수업이 아니라 정훈교육을 먼저 해야 했나?
지이잉
고철 로봇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감시자...]
몸을 천천히 움직이더니 날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녀석.
[감시자는...죽어야 한다.]
위잉철컥. 위잉철컥.
느릿느릿 걸어오는 게 엄청 답답하다.
“멈춰! 넌 누구야!”
어느새 창과 방패로 무장한 오르페가 녀석을 멈춰 세웠다.
[용사?...어째서...]
깡!
제트킥을 한 방 먹여주니.
통!
녀석이 여섯 조각으로 박살이 났다.
머리, 가슴, 팔, 다리.
완벽한 분해.
“사이버요괴 새끼가 건방지게 누굴 죽이네 마네.”
처음 보는 사람에게 삿대질을 처하는 고철 새끼가 요괴가 아닐 리가 없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