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 32화. 골/돈/지/하/에/있/다 (2)
* * *
“비켜.”
텅!
6등분의 고철이 멀리 굴러갔다. 깔끔해진 문 주변.
“이제 문 연다.”
“알았어.”
3m 정도 되는 문. 좌우에 새겨진 검 문양이 상당히 멋지다.
‘멋’을 좀 아는 녀석이 만든 게 분명.
끼이이익
손잡이를 잡고 억지로 문을 벌렸다.
문 중앙에 이상한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지만, 특별히 느껴지는 기운은 없다.
유통기한이 다 된 모양.
“자, 닌자 입장.”
뒤에서 멍하니 서 있는 오르페와 디아나에게 따라오라고 턱짓했다.
“아!언니!”
갑자기 소리치는 디아나.
붕
오르페의 뒤에서 고철 조각들이 공중에 뜨더니.
철컥. 철컥.
간담처럼 합체했다!
“사이버지하국대적?!”
델바나스 남친이라도 되는 건가?
[나는...누구지?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건가?]
원상태로 돌아오더니 갑자기 생뚱맞은 소리를 하는 고철.
물론 알 바 아니다.
[넌...?]
깡!
다시 제트킥을 날렸다.
통!
다시 분해되는 녀석.
“이게 뭐야...”
“부활, 곤란.”
또 일어나면 바로 ‘오코노미야끼 살법’이다.
잠시 후.
[진정해라. 내가 착각했다. 난 오랜 시간 동안 정지해 있었다. 내 인공뇌가 잘 작동하지 않는다.]
녀석의 머리통에서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까의 무성적인 기계음은 위장술이었나?
“꺄악~!”
깜짝 놀랐는지 네발로 달려 오르페의 뒤로 숨는 디아나.
“합체는 안 하냐?”
[난 위험하지 않다. 피해를 끼칠 생각도 없다. 그걸 알리고 싶다.]
이렇게 저자세로 나오면 죽이기 좀 그렇다.
침착하고 이성적인 걸로 보아 일반적인 요괴 같지도 않고.
라미나, 디아나랑 같은 과인가?
“다음부터는 나쁜 말 하면 안 돼. 알았지?”
여동생의 행복을 위해 목숨 바친 라미나를 봐서 살려주기로 했다.
[사과를 표한다.]
말귀를 알아들으니 편하다.
“그래. 이제 꺼져. 3분 안에 안 가면 진짜 죽인다.”
“뭔지는 모르지만 크게 위협적이진 않는 거 같아. 길 안내를 맡기자. 저쪽에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좋은 생각인데?
역시 내 외장형 두뇌 오르페답다.
“길 안내를 하렴. 헛짓하면 철구슬로 만들어 버린다.”
[알았다.]
다시 조립된 깡통이 몸을 일으켰다.
[궁금한 게 몇 가지 있다. 물어봐도 되나?]
“안돼. 빨리 안내해.”
[알았다. 나중에 천천히 묻지. 어떤 걸 보고 싶은가?]
“핵심만.”
난 영화도 오튜브의 10분짜리 리뷰로 본다. 아니면 트리위키로 보거나.
솔직히 다들 그렇지 않을까?
씹덕이 아닌 이상 2시간이 넘는 동영상을 재밌다고 하나하나 살펴보는 사람은 없다.
다들 대충 본 다음 ‘아~ 그거~! 재밌었지~!’ 하고 넘어가는 게 현실.
[그럼 이 시설이 만들어진‘원인’을 원하겠군.알았다.]
녀석이 앞장서 지하기지 안내를 시작했다.
“이 금속 인간. 일반적인 몬스터와 다르게 차분한 소통이 가능해. 정령일수도 있어.”
오르페가 속삭였다.
금속 인간? 로봇을 모른다면 그렇게 말할만도 하다.
“이따위로 생긴 고철정령은 없어.”
난 정령을 본 적이 없지만.
[이쪽이다.]
기지는 상당히 컸다. 골돈의 바닥 전부가 지하기지라 해도 믿을 지경.
“골돈 지하에 이렇게 넓은 공간이 있었네.”
“제가 여기 위에서 친구들과 뛰어놀았단 건가요...”
“닌닌.”
그렇게 몇 분 동안 걸었다.
[도착했다.]
“이건?”
“아앗!”
“닌?!”
셋 다 입이 쩍 벌어졌다.
삐까번쩍.
지하 주차장(기지)에 얼추 40m 즈음 되는 동그란 우주선이 주차되어 있었다.
“요괴나치 연합군이 설계한 우주선?”
델바나스와 스피릿요괴가 나치였다니.
이곳에서도 ‘인류 육질 개선 정책’이 시행된 적이 있었나?
달기지와 지저세계 왕국을 보유했던 나치니 이세계까지 진출한 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다.
[감시자들의 전쟁 병기인 ‘톤그란텐’이다. 감시자와 그들의 하수인만 조종할 수 있지. 이 기지는 이걸 감추기 위해 만들어졌다.]
“감시자…. 그들이 정확히 어떤 존재였죠? 그 시절에 대한 정보는 대부분 유실됐어요.”
많이 궁금했는지 존댓말까지 하는 오르페.
[다른 세계에서 온 영적 존재들이다. 온갖 세계를 떠돌며 유랑하다, 이 세계에 정착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문명을 전수했다. 지배를 대가로.]
“그럼 고대용사의 이야기도 진짜.”
“오르페. 나중에 따로 물어보면 안 될까? 시간 아깝거든?”
“...알았어.”
딱 봐도 나치 잔존세력인데.
정신 나간 고철 로봇의 씹덕망상따윈 듣고 싶지 않다.
[너희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도 질문을.]
“안돼.”
[하나 정도만.]
“좆까.”
[...]
“넌 왜 여기 있었지?”
[...]
“이 씨발 새끼가 말을 안하네.”
오코노미야끼 살법 전개 1초 전.
[내내장된 인공뇌가 손상되어 기억이 불확실하다. 아마 이 지역을 수호하는 임무를 맡지 않았을까 한다.]
“그렇군. 이제 꺼져. 3분 준다.”
딱 봐도 쓸데없는 질문만 하다 시간을 잡아먹는 새끼다.
‘가라테Z’나 ‘주짓수V’ 라면 모를까 이딴 고철 새끼한테 내 시간을 낭비하긴 싫다.
[...]
“안 가면 진짜 개박살낸다. 난 농담 안해.”
위잉철컥. 위잉철컥.
얌전히 꺼지는 걸 보니 생각보단 괜찮은 놈 같다.
그래도 귀찮다.
이제 해야 할 일은 하나뿐.
“내 도끼 챙겼지?”
“배틀액스? 응.”
디아나도 들어갈 만큼 큰 배낭에서 도끼를 꺼내주는 오르페.
최근 구매한 신상품 중 가장 만족스러운 게 이 배낭이다.
“그 금속 인간. 많은 걸 알고 있는 거 같았어. 좀 더 물어봤어도 되지 않았을까?”
“뇌가 불안정하다잖아. 넌 그런 미친놈과 대화하고 싶어?”
갑자기 오르페가 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
디아나도 따라 하네.
“왜? 둘 다 무슨 문제 있어?”
“...아냐.”
“아니에요.”
“닌닌.”
도끼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바로 길어지는 손잡이.
“설마 다 부수려고 하는 건 아니지?”
“다 부술 건데?”
“아직 정확히 뭔지도 모르잖아. 우리가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모르고, 아니라도 골돈 사람들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는걸.”
“후. 오르페.”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이렇게 무른 걸까.
“요괴의 기술은 인간에게 도움이 될 수가 없어. 결과적으로 인간을 망치게 설계되어 있거든.”
역사책에도 자주 나오는 ‘저주받은 요도(??)’나 ‘요괴 방망이’를 보면 안다.
순간적으로는 도움이 되지만, 결국 인간을 파멸시키는 게 요괴테크놀로지다.
대충 설명해주니 오르페도 수긍했다.
깡!
우주선은 단단했지만, 내 근력을 버틸 정도는 아니었다.
“철거 파티다.”
이후 엉망진창으로 박살 냈다.
***
“닌자기상법.”
3시간 정도 잤나?
몇 시간 동안 장작 패듯이 우주선을 박살 내서 그런지 몸이 좀 뻐근하다.
바로 거실로 향했다.
“일어났어?”
“닌닌.”
“어떻게 할래? 바로 떠날 거야?”
짐 정리를 마치고 배낭까지 싹 챙긴 오르페. 알아서 척척 다 잘하니 정말 든든하다.
“그러자. 더 있어 봤자 뭐 하겠어.”
야쿠자 슬레이어가 아니면 어떤가.
오르페는 내 전우이자 설명충이자 외장형 두뇌이자 식사, 설거지, 빨래 등을 해주는 가사도우미다.
이렇게 나열하니 다중역할 따까리 같네. ‘전우’에 초점을 맞추자.
“아함.”
방금 일어난 디아나가 하품하며 눈곱을 뗐다.
오르페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 이제 슬슬 빨래 정도는 맡겨도 되지 않을까?
“가자.”
몇 달 동안 신세 진 집을 떠났다.
전날에 송별회를 마쳐서 그런지 마중 나오는 백성이 없다.
“저번에도 물어봤는데, 다음 계획은 있어?”
“당연하지.”
솔직히 없다.
일단은 주변 영지를 돌아다니면서 아사요를 찾아볼까 한다.
그때였다.
쫑긋쫑긋.
더듬이 같은 분홍 머리카락이 나무 옆으로 삐져나왔다.
두리번두리번.
미치겠네 진짜. 눈앞이 캄캄해진다.
“무카 씨?”
그나마 정신줄을 잡고 있던 오르페가 그 악마의 이름을 불렀다.
“안녕하세요~! 무카에요~!”
괴상한 악기와 보따리를 든 악마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이제 떠나시는 거죠~? 어디로 가시는 가세요~?”
“무카 씨가 생각하는 곳보다 무조건 먼 곳입니다.”
“그럼~! 딱히 정해 놓은 곳이 없다고 생각할게요~! 모험가님~! 의뢰에요~! 의뢰~!”
무카가 나무로 만들어진 돼지 저금통을 나에게 넘겼다.
“제가 지금까지 모은 전 재산이에요~! 골돈이 이제 안전해졌으니~! 고향을 떠나 큰 무대인 네오솔리트론에 가고 싶어요~! 가는 길까지 보호를 신청할게요~!”
“세일린 씨에게 말해서 먼저 가시지.”
“그분은~! 뭐랄까~? 분위기가 무섭잖아요~!”
나는 좆밥으로 보이고?
야사요가 아닌 걸 다행으로 알아라.
“네오솔리트론이요? 솔리트론이 아니라?”
뭘 또 그렇게 궁금한지 캐묻는 오르페.
잠깐만, 솔리트론?
내 이름은 델라미온. 300년 전에는 왕국에서 ‘솔리트론의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그곳이 맞나?
“아~! 모르시는구나~! 이번에 검성회 주도 하에 대도시로 재건된다고 해요~! 붉은고래 마탑에서도 크게 투자했다고~!”
검성회.
SSS급 사무라이 집단이다.
아일린같은 새끼들이 가득할 게 분명.
“갑시다.”
“로빈?”
“괜찮아. 가자.”
왜 이 생각을 못 했지?
주변의 떨거지들을 한가득 잡아봤자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
낙원을 위해서는 녀석들의 아가리로 들어가서 끝장을 봐야 한다.
이제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다.
좆같은 닌자레이더는 빼고.
“오홍홍~! 좋아요~! 가죠~! 네오솔리트론의 사람들에게 제 노래를 들려줄 생각을 하니~! 너무 기분이 좋아요~!”
네오솔리트론으로 목표가 정해졌다. 그렇다면 앞으로 나아갈 뿐.
그것이 탈주닌자의 길이다.
***
모두가 안심하며 잠든 골돈의 밤.
순찰 중인 두 경비병이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언니 표정 진짜 볼만하겠다.”
“답장으로 뭐라고 올지가 궁금하네. 으, 끔찍해.”
낄낄대는 두 경비병은 유니스와 존.
“사장, 아니 로빈 씨는 오늘 아침에 떠나신 거지?”
“아직도 그렇게 불러? 얼마나 시달렸길래 그래?”
“그냥. 익숙해서.”
“익숙하기는. 무카랑 같이 떠났다고 하더라.”
“무카…. 착한 사람이긴 한데...”
골돈이 좋아하는 음유시인은 아니었지.
존이 일부러 말을 흐렸다.
“어? 저기 누가 있는데?”
주변을 살펴보던 유니스가 미간을 좁혔다.
“응?”
“저쪽.”
존이 시선이유니스의 가리킨 방향을 향했다.
골돈의 광장. 고목이 있던 자리에 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었다.
“...보고해야 하나?”
“한 명이잖아. 일단 다가가 보자.”
존과 유니스가 랜턴을 앞세워 천천히 그에게 접근했다.
윤곽은 바로 드러났다.
“누구지?”
“걔잖아. 나무 자를 때 울던 꼬마.”
“아. 꼬맹아. 뭐 하는 거야? 부모님이 걱정 안 하셔?”
사람 형상의 나무 조각상 앞에서 소년이 기도하고 있었다.
물감으로 칠했는지 새까만 조각상.
“골돈의 수호신께 기도드리고 있었어요.”
소년의 얼굴이 평온하다.
존과 유니스가 다시 조각상을 살펴봤다. 공성전 때 나타났던 그와 미묘하게 닮았다.
“우리도 기도 한 번 드릴까?”
유니스가 장난스럽게 물었고.
“좋지.”
“어?”
언제나 진지한 존이 무릎꿇더니 기도를 올렸다.
“말한 내 잘못이지.”
머뭇거리다 그를 따라하는 유니스.
‘골돈을 평화롭게 해주세요.’
평범한 사람의 평범한 기도. 그 기도는 한동안 지켜졌다.
이게 뭐야!
이 옷차림은...도, 도른이잖아!
골돈 지하에 시체가 묻혀 있다~!
여길 봐! 이상한 책들이 놓여 있어!
무엇을 암시하는 거지?
며칠 후 발견된 지하수로에서 대량의 시체가 나오기 전까지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