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화 〉 33화. 적과의 동침? (1)
* * *
“어떻게 마차가 한 대도 안 다니냐.”
그런 이유로 무려 3일째 뚜벅뚜벅 걷는 중이다.
지하국대적이랑 야쿠자를 잡은 지 2주일이나 지났는데.
마차 운전수들이 다 굶어 죽었나?
“변방에 가까운 영지라 소문이 늦게 퍼져서 그럴걸? 서로 눈치 보고 있을 수도 있고. 확실히 안전하다 검증되지 않으면 잘 안 오거든.”
하긴, 택시기사가 전쟁이 끝났다는 소문을 듣고 바로 영업 재개를 하는 것도 웃긴 일이지.
“씁.”
그거 말고도 짜증 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위잉철컥. 위잉철컥.
저 끔찍한 기계음.
이동속도가 느려 방관했지만, 녀석은 우리 일행이 취침할 때도 움직이면서 차근차근 거리를 좁히고 있었다.
슬슬 해결해야 할 때.
무카의 눈치를 보며 뒤로 살짝 빠진 후 오르페에게 밀착했다.
“왜, 왜?”
깜짝 놀라 뒷걸음치는 오르페. 반응이 풋내기 같다.
“오르페. 골돈을 떠나고 나서부터 계속 고철이 따라다니고 있어.”
“고철? 금속 인간이?”
“응. 내쫓을까 하는데 무카 좀 맡아줄 수 있어?”
“무카 씨가 내 말을 들을까?”
이건 진짜 모르겠다.
“두 분 뒤에서 뭐 하시는 거죠~! 애정 행위~?!”
귓속말이 길어지니 관심 가지는 무카. 참견력 하나는 SSS급.
“여기 디아나도 있는데 그러면 안 되죠~!”
디아나? 순간 기막힌 아이디어가 번뜩였다.
나 신노빈이 아니면 불가능할 발상이.
“어이쿠? 다리가 미끄러졌다앗!”
균형이 어긋난 척하면서 ‘살짝’ 디아나의 다리를 걸었다.
“으앗!”
“앗~! 괜찮니~?”
‘살짝’ 넘어져 무릎이 ‘살짝’ 까진 디아나를 부축하는 무카.
‘살짝’ 이니 절대 아동학대가 아니다.
“잉...”
울상짓는 디아나. 하지만 요괴가 눈물을 흘릴 수는 없는 법.
“이거 정말 큰일인걸? 걱정하지 마. 내가 약초를 찾아볼게. 무카 양은 디아나의 상처를 봐주세요! 그럼 이만!”
바로 빠져나갔다.
디아나! 미안해! 대신 나중에 맛난 거 많이 먹여줄게!
요괴니까 상처는 금방 나을 거야!
“우와...”
뒤에서 들려오는 오르페의 감탄. 보고 배우도록.
이게 ‘전문가’다.
“닌닌.”
천천히 뛰는 척만 하다가 무카의 시야를 벗어나자마자 전속력을 냈다.
폴짝폴짝!
닌자축지법으로 몇 번 날아오르니 바로 보이는 녀석.
“너 진짜 뒤질래? 왜 자꾸 쫄랑쫄랑 따라다녀?”
원래 요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죽여야 하는 게 탈주닌자다.
하지만 난 라미나의 케이스를 통해 노예화되거나 인간화된 녀석들은 굳이 죽일 필요가 없다고 정했다.
이 녀석을 살려준 이유?
말귀가 빠른 게 인간수업을 배웠다 싶어서 그런 거다.
근데 이딴 식으로 호의를 배신하면 안 되지.
“이번이 마지막 경고다. 살려줬으면 얌전히 꺼져.”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는 거 같다. 난 적이 아니다. 좋은 관계를 맺고 싶다.]
“됐고. 거기 손에 들고 있는 건 뭐냐.”
빵빵하게 채워진 자루를 들고 있는 고철. 사제폭탄은 아니겠지?
[오면서 영양에 좋은 식물들을 채집했다. 같이 먹어라. 용족 아이가 먹으면 특히 좋다. 영양소가 풍부하니.]
녀석이 내민 자루에는 갖자기 야채로 수북했다.
“...”
방금 디아나에게 ‘살짝’을 주고 오는 길이라 좀 뜨끔하다.
“이건 고마워. 사이버요괴. 뭐 때문에 이렇게까지 하는 거지?”
일단 마음이 기특해 뇌물을 받았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니 절반 정도는 내가 먹어야겠다.
567도 성장기다. 아마도.
[요괴...역시 지구인이 맞군. 지구인의 영혼을 가진 자여. 난 요괴가 아니라 고그마그족의 일원이다. 내 종족은 구원자와 같이 감시자에게 맞섰다. 그러니 우리는 적이 아니다. 동료라고 볼 수 있지.]
요괴가 아니라는 주장. 디아나를 위해 야채를 가져온 걸 보면 그럴 수도 있겠다.
요괴라는 존재는 ‘배려심’과 ‘이타심’이 없어 이런 행동을 할 수가 없다.
죽이겠다는 협박을 했기 때문에 내가 선입견을 품고 있었나?
뇌가 망가져서 그런 거라고 설명을 하긴 했지.
너무 오래 살아 잠깐 치매가 온 거로 생각하자.
우리 할아버지도 300년 전에 죽은 예술가의 기억이 뇌 속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하며 집안 곳곳에 낙서한 적이 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내 방 전체가 빨간색 페인트로 칠해져 있을 때는 좀 놀랐지.
뭐라 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다시 잤지만.
비명은 주로 여동생이 질렀다.
“그래. 일단 요괴가 아니라고 치자.”
구원자랑 감시자는 뭔 소리인지도 모르겠고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넘어갔다.
“그래도 동료는 아니지. 지구는 어떻게 아는데?”
[구원자가 입력한 지식으로 저장되어 있다. 내 기억이 손상됐어도 지식은 멀쩡하다. 현재 대륙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지식? 정보?
“너 트리위키 알아?”
[지구의 집단지성백과사전. 비슷한 기능이 내 안에 내재 되어 있다. 우리 종족은 지식을 공유한다.]
“그럼 동료잖아?”
갑자기 호감이네?
요즘 들어 오르페의 설명충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오르페의 문제는 아니다. 그냥 이곳 기준으로도 이상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어 그런 것.
이 고철이 이세계 트리위키가 될 수 있지 않을까?
[동료로 생각해주는 건가? 다행이군. 난 너와 파란 머리 소녀에게 볼일이 있다. 일행에 합류하고 싶다.]
6등분이 되어도 죽지 않으니 백성들이 대피할 때 시간도 잘 끌겠지?
동료. 좀 지켜봐야겠지만 일단은 해주자. 몇 가지만 물어보고.
“일단 내 질문에 대답해. 어떻게 여기까지 따라왔지?”
[난 저장된 태양열로 움직인다. 일반적인 생명체와 다르게 휴식을 취할 필요도, 잠을 잘 필요도 없다. 계속 걸으면서 너희들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추적 기능을 갖춘 친환경 로봇.
“지하에서 어떻게 깨어난 거냐? 태양도 없는데.”
[너희 일행 중 한 명이 내 외장형 임시 동력원을 건드렸다. 원래는 내 것이 아니었지만, 오랜 세월이 지나]
“그만. 대충 알았어.”
디아나가 밟은 게 그건가.
오래된 녀석이라 하니, 혹시?
“델라미온은 아냐?”
[델라미온. 용족의 대전사 중 하나. 저장된 지식에 따르면 그도 감시자와 맞선 동료다. 그자도 살아 있나?]
“이젠 아냐. 내가 죽였거든.”
[뭐라? 어째서인가?]
“요괴마을 주민과 같이 식인행위를 일삼는 요괴였으니까.”
[식인행위라고? 용족들이? 혼란스럽다. 내가 정지해 있을 때 어떤 일이 있었길래 그런 건가?]
이 새끼가 자꾸 질문을 질문으로 받아치네.
“몰라. 오르페한테 물어보던가 책 찾아서 봐.”
잠시 고민하는 녀석.
[내가 일행에 합류해도 되겠나?]
“그럼.”
잠을 안 자고 쉬지 않는 트리위키. 이건 귀중한 노동력이다.
[질문을 싫어하는 건 알고 있다. 딱 하나만 물어봐도 되겠나?]
“해봐.”
[고그마그족은 제2의 시야를 통해 영혼을 감지할 수 있다. 감시자의 영혼이 두 개체나 너에게 묶여 있더군. 어떤 방법을 사용한 거지?]
두 개체? 설마 스피릿고문 요괴를 감시자라 부르는 건가?
“뇌 속으로 들어왔길래 죽였는데.”
무슨 어쩌고 궁전 한 거 같은데 워낙에 정신 사나운 상황이어서 잘 기억은 안 났다.
솔직히 싸우면서 입 터는 놈이 이상한 거다.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다. 감시자들이 다시 간섭하기 시작한 것도, 그들의 영혼을 수확한 자가 있는 것도. 하지만…. 어쩌면…. 네가 해결책일지도.]
존나 중얼거리네 진짜.
“이제 질문은 끝. 따라와.”
고철은 어디서 났는지 모를 철가면을 착용한 상태에서 큰 로브를 입고 있었다.
목소리는 인간 같으니 문제 없고. 얼굴과 몸은 다쳐서 가리고 있는 거라고 소개하면 되겠지?
일행에게 돌아갔다.
“인사해. 내 오랜 친구야. 약초를 찾다 우연히 다시 만났어. 우연히도 이 친구가 약초랑 야채를 많이 가지고 있더라고. 디아나에게 먹이면 될 거 같아.
이제부터 같이 다닐 건데, 어렸을 때 마을 사람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해 몸과 얼굴이 뭉개진 친구니 어떻게 생겼는지는 궁금해하지 말자.”
완벽한 설명.
따돌림과 왕따, 집단폭행으로 생겨난 상처를 궁금해하거나 언급하는 건 피해자의 인격을 모독하는 행위이므로, 정상적인 사람이면 구태여 캐묻지 않는다.
‘폭행’ 하니까 어린 시절 날 ‘정신병자’로 음해하던 녀석이 떠오른다.
그때의 난 파괴적이고 폭력적이었기에 그런 모욕을 참지 못했다.
지민아, 잘 지내니?
이빨 다섯 개로 목숨을 구한 걸 지금도 부처께 감사드리고 있니?
넌 그때 죽을 수도 있었단다.
어쨌든 학교폭력은 안 된다.
[반갑다.]
일행에게 살짝 한 손을 흔드는 고철.
동작이 평범한 성인 남성보다 굼떴지만 이질적이진 않았다.
오르페랑 디아나에게 대충 눈짓했다. 살짝 끄덕이는 거로 보아 알아들은 모양.
“반가워요~! 전 무카에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사교성만 이상하게 좋은 무카도 문제없음.
[이름...]
아, 뇌를 다쳐서 이름을 까먹었다고 했었나?
이건 내가 만들어줘야 한다. 트리위키랑 로봇이니...
“이 친구 이름은 ‘트리보’야.”
[그렇다. 잘 부탁한다.]
“네~! 트리보 씨~! 친구가 된 기념으로 노래 한 곡 들려드릴까요~!”
“나 미치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그건 나중에 합시다.”
“로빈 씨는 은근 새침데기라니까~! 알았어용~!”
살인 충동을 일으키는 저 악마의 혀.
무카는 부처의 깨달음을 방해한 제육천마왕의 딸 중 하나가 아닐까?
뚜벅뚜벅.
그렇게 다 같이 인사를 마치고 열심히 걸었다.
무카가 가지고 있는 어린애 낙서 같은 지도에 따르면 곧 마을이 하나 나온다.
우선 거기서 좀 쉬면서 마차를 알아보려고 한다.
네오솔리트론까지 두 다리로 걸어가는 건 미친 짓이니.
위잉철컥. 위잉철컥.
존나 신경 쓰이네.
“오르페. 이상한 소리 안 나? 윙철컥 같은 소리.”
“안 나는데?”
나만 들린다고? 내 청각이 너무 뛰어난 탓인가?
슬프게도, 눈먼 자들의 세계에서는 두눈박이만 고통스러운 법이다.
어서 오세요! 정다운 상록수 마을이 곧입니다!
드디어.
“푯말이네요~! 곧 도착이에요~!”
“마을 안에서는 따로 다닙시다. 아는 척도 안했으면 좋겠군요.”
“네~! 천천히 쉬세요~!”
그렇게 고문적인 여행을 끝마치려 할 때.
“멈춰라!”
붉은 갑옷을 입은 여자 세 명이 우릴 가로막았다.
한참 전부터 이 골목에서 대기하고 있었나? 특별한 소리는 들리지 않았는데.
“로빈. 유검경 직속 기사단이야.”
그렇게 말하는 오르페의 눈이 날카로웠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