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 37화. 적과의 동침? (5)
* * *
그 날 아침.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수상한데요.”
유검경이 새벽에 일어났던 사건의 자초지종을 설명했고, 조용히 경청하던 부단장 레오나가 입을 열었다.
“어떤 부분이? 정확히 짚어줬으면 좋겠군.”
“그 시간대에 속옷 차림으로 있었으며, 골돈에서 왔고, 움직이기 전까지 단장님이 기척을 잡아낼 수 없었다. 여기까지만 생각해도 뭔가 감이 오지 않나요?”
조곤조곤 따지는 레오나. 유검경은 별일 아니라는 듯이 어깨만 으쓱였다.
“하나씩 따져보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않나. 아무도 없는 새벽이니 속옷 차림으로 운동할 수도 있겠지. 골돈이야 의뢰를 받아서 간 거라고 본인이 설명했고, 그런 신묘한 은신술을 가진 사람이 있는 것도 불가능하진 않다.”
“아 진짜. 하나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으로 따져야죠.”
이제는 한숨까지 쉬는 레오나. 유검경이 17년지기 친구 겸 상관이라도 이럴 때는 오만 정이 다 떨어진다.
‘이걸 꿀밤을 먹일 수도 없고.’
그렇게 행동해도 유검경의 성격상 하극상으로 끌려가진 않을 것이다. 가벼운 경고만 좀 받고 말겠지. 실행하지 않는 이유는 딱 하나. 때려봤자 자기 손만 아프다는 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레오나. 가능성에 제한을 두지 말도록. 생각을 넓게. 알았나?”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레오나가 이마를 탁! 하고 친 다음 의자에 몸을 맡겼다. 이렇게 앉아서 모른 척하고 자고 싶다. 새벽 근무의 피로가 아직도 쌓여 있었으니까.
그렇지만 단장에게 딴지를 걸만한 위치에 있는 건 그녀뿐이었다.
“어제 순찰하던 애들 말로는 그 사람 모험가패가 동색이었다 하던데요. 그 수준의 모험가가 그런 은신술을 가지고 있다? 이건 어떻게 생각하세요?”
“모험가의 등급은 실적으로 나누어지지 않나. 비밀리에 사는 은둔고수에게 기술을 전수받느라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지 얼마 안 될 가능성도 있다.”
“아, 그렇군요.”
레오나가 피곤함에 찌든 눈으로 유검경을 바라봤다. 뻔뻔한 헛소리에 이제는 웃음조차 안 나오는 상황.
“이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하신 분인지. 벌써 소설책 하나 뚝딱 쓰셨네요. 가능성에 제한을 두지 않는 것도 정도가 있어야죠.”
“음.”
유검경이 레오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로 탁자에 놓인 컵을 집더니 차를 음미했다. 이 정도면 일부러 모르는 척하는 게 확실하다.
“그냥 솔직히 말하세요. 로빈이란 남자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믿고 싶으신 거죠?”
어린 시절부터 유검경과 함께 했던 레오나다. 유검경이 억지를 부리면서까지 강경하게 나올 때는 전부 다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음.”
“음. 은 무슨.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렇게 고집쟁이니 검성회에서 따돌림당한단 소문이 생기는 거죠. 소문이 아니라 진짜지만.”
“따돌림을 당하는 게 아니다. 내가 따돌리는 거지.”
“위풍당당하셔라.”
패배를 용납하지 않는 독불장군의 철벽 요새. 그 추한 모습에 레오나가 눈을 돌렸다.
사람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게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유검경처럼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은 사람은 드물 것이다.
“너무 걱정이 심한 것 아닌가. 내 직접 그를 데려가 관찰한다 했는데.”
“그것참 좋은 생각이네요. 마을주민을 챙기면서 적인지 아군인지도 모를 놈을 살펴본다? 눈먼 칼에 찔리기 딱 좋겠어요.”
“내가 기습을 허용할 거 같나? 만약 도망친다 해도 내 붉은 섬광보다 빠를 순 없다.”
칠검경이라는 칭호를 받은 이만이 가질 수 있는 절대적인 자신감. 이번만큼은 레오나도 반박하기 힘들었다.
“하나만 더 물어볼게요. 뭘 근거로 그 남자가 탈주닌자와 연관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시는 거죠?”
“감이다.”
“감? 내 감은 그가 수상한 사람이라 말하고 있는데요?”
“그의 눈을 봤다.”
탁!
유검경이 갑작스럽게 레오나의 손을 붙잡았다.
“무슨.”
깜짝 놀란 레오나가 성을 내려 고개를 든 순간, 두 여자의 눈이 마주쳤다.
유검경의 녹색 눈동자가 성난 바람에 들풀이 휘날리듯이 요동치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백성을 위해 싸운다는 그 말이 진짜냐고.”
무언가에 대한 맹목적인 열망, 믿음, 열정.
이제는 동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정의를 찾아 헤매는 자의 우둔함과 우직함이 담겨 있는 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그가 나를 봤다.”
이번엔 틀림없다고 말하는듯한 유검경이 모습이 간절해 보였다.
그렇게 번번이 속아 왔으면서 또 믿으려는 건가. 레오나는 아직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세요. 케이트랑 같이 가시고요. 그동안 지휘는 제가 하겠습니다.”
설득하기엔 너무 멀리 와버린 상태. 반쯤 체념한 레오나가 눈을 내리깔았다.
“레오나. 너뿐이다.”
유검경이 짧게 고개를 끄덕인 후 자리를 떠났다. 천막으로 만들어진 조그마한 지휘실에 홀로 남게 된 레오나.
“후...”
그녀가 천천히 일어서서 주위를 둘러봤다. 유검경의 개인 공간이라 볼 수 있는 지휘실의 끝자락, 고운 비단으로 감겨 있는 부러진 무기가 눈에 들어왔다.
‘영혼 포식자’와 겉모습이 똑같은 그것은 유검경이 아일린 피트먼에게 직접 하사한 레이피어였다.
유검경을 제외한 기사단 모두가 알고 있는 아일린의 본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었지만 기회가 나지 않았는데.
“아직도 보고 싶은 것만 보려 하시는군요...”
레오나가 낮게 탄식하며 눈을 감았다.
***
그리고 지금.
“돼지 두루치기.”
그렇게 말하며 달려드는 로빈을 유검경이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맞붙을 듯이 달려 나가더니, 날렵하게 몸을 틀어 보어루사에게 일격을 먹이는 로빈. 빠른 판단력과 깔끔한 솜씨, 변칙적인 움직임이 합쳐져 좋은 효과를 냈다.
스승이 누군지 궁금해질 정도의 실력.
‘훌륭하다.’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 유검경이 다시 집중해 눈앞의 흉물을 공격했다. 일격에 정확히 심장을 찔려 쓰러지는 보어루사.
히히힝!
속도를 올린 붉은 섬광이 시체를 뛰어넘으며 달려들자 보어루사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몰아치는 삭풍!”
끔찍한 검음과 함께 유검경의 애검인 영혼 포식자가 주변으로 붉은 기운을 흩뿌렸고, 그것에 적중당한 녀석들을 찢어발겼다. 순식간에 피범벅이 된 농지.
“헬리콥터 검법.”
투다다다다!
로빈도 지지 않고 기술 이름을 외치면서 보어루사를 썰었다. 그 과장된 움직임과 기합 소리에 당황한 마을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
“모, 모험가님? 진정하세요!”
“총각~! 거 너무 앞서 나가지 말어~! 큰일 나!”
“혼란하다 혼란해.”
한 마디씩 거드는 사람들을 오르페랑 기사 케이트가 막아서며 주위를 살폈다. 로빈이 시선을 끌고 있어서 달려드는 보어루사는 없었다.
“동료 실력이 대단하군. 정말로 동 등급 모험가인가?”
“길드에 들려서 검사를 받은 후 승급될 거에요. 골돈에서 큰일을 해냈거든요.”
“둘 다 장비가 아주 좋아. 저 남자가 든 아밍소드는 주문 제작한 특제품으로 보이는군. 어떻게 돈을 모아서 산 거지? 혹시, 훔치기라도 한 건가?”
케이트가 부단장인 레오나가 시킨 대로 꼬치꼬치 캐물으며 반응을 살폈지만.
“그럴 리가요. 굵직한 의뢰만 받으면서 재산을 모았습니다. 모아놓은 돈도 꽤 있었고요. 지금은 한 푼도 남지 않았지만요.”
오르페는 별다른 동요 없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너도 실력에 자신이 있나 보지?”
“로빈보다는 못하지만, 한 사람 몫은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거 기대되는군. 요즘 모험가들은 다들 한가락 하는 모양이야.”
잡담을 나누면서도 보어루사와 서로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는 두 사람. 그러나 그들이 무기를 사용할 일은 없었다.
“사방회전 베기.”
붕붕붕
이제는 광기마저 엿보이는 움직임으로 상대를 도륙하는 로빈의 활약 때문이었다. 인술을 사용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감출 수 없는 뛰어난 전투 감각은 아무것도 모르는 범인이 보기에도 초인적이었다.
“장정 10명이 달려들어도 힘든 그 보어루사를...”
“대단해! 유검경보다는 아니지만.”
“바보같이 소리만 지르고 이상하게 움직이는 거 같은데 놈들이 쓰러지네.”
“뭐시냐. 혼자 뛰쳐나갈 때 그랬잖어. ‘기합’이라고.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전부 이유가 있는 거지.”
“이렇게 보니 신빙성이 가네. 우리도 일하기 전 기합이나 질러볼까?”
서로 웃고 떠들 정도로 여유를 되찾은 사람들. 얼마 지나지 않아 소동이 진압됐다.
작물들이 다 파헤쳐지고 몬스터의 시체가 널려 있어서 빈말로라도 좋은 상황은 아니었지만, 유검경을 비롯한 전투인원이 시체를 들어 올리고 주민들이 다시 씨앗을 심자 농지가 어느 정도 구색이 갖춰졌다.
“실력이 대단해. 그 검술도 스승에게 배운 건가?”
보어루사를 전부 치운 후 온몸에 묻는 피를 가볍게 털어낸 유검경이 오르페와 대화 중이던 로빈을 향해 다가왔다.
“여러 검술을 익혀본 뒤 고안한 기술입니다. ‘이 세계’에서는 저만 사용할 수 있죠.”
“세계에서? 대단한 자신감이야. 그래도 자랑할만하더군.”
유검경이 악수를 청했다. 앞으로 내민 그 손을 조금의 고민도 없이 바로 붙잡는 로빈.
“혼자 열심히 싸울 필요는 없었는데, 무리하는 거 아닌가?”
“이러라고 있는 모험가인데요. 아직도 거뜬합니다. 제가 앞 열에 서야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적게 보죠.”
“하하! 훌륭한 마음가짐이야.”
만족스럽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음을 터뜨리는 유검경의 모습에 로빈도 살짝 웃었다.
“소문에 의하면 유검경의 검은 영혼을 거둔다고 하던데, 진짜입니까?”
“글쎄, 어떨까. 내가 퍼뜨린 소문은 아니다.”
유검경이 장난스럽게 영혼 포식자를 들어 올렸다. 검 주위를 감싼 넘실거리는 붉은빛이 요사스럽다.
“영혼을 흡수해서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특별한 힘은 있다. 적을 죽일 때마다 강해지는 느낌이 드니까.”
“대장장이가 만든 물건은 아닌 거 같네요. 어디서 얻으신 겁니까?”
“감시자의 협곡이라고 들어본 적 있나? 온갖 기괴한 일들이 일어나는 장소지. 훈련 삼아 그곳을 떠돈 적이 있는데, 그때 얻은 보물이다.”
로빈이 갑자기 주머니에서 종이와 펜을 꺼내더니 뭔가를 열심히 적었다.
“감시자의…. 협곡…. 메모…. 알겠습니다. 혹시 자매품을 본 적이 있나요? 저도 하나 장만하고 싶군요.”
“또 이상한 말을 하는군. 이제 가야겠다. 하앗~!”
붉은 섬광을 재촉해 앞으로 이동한 유검경이 다시 일행을 이끌어 상록수 마을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자네들과 같이 온 음유시인이 오늘 저녁 우리 기사단을 위해 노래를 불러 주겠다 말했었군. 기사단원들이 아주 기뻐했지.”
“...기사단 모두가 마을 광장에서 울려 퍼지던 노랫소리를 듣지 못한 건가요?”
“임시거점이 그곳과는 좀 떨어져 있는 편이라서.”
“다시는 잊지 못할 경험이 될 겁니다.”
“그 정도였나?”
“제가 기대될 정도입니다. 나만 당할, 아니. 듣기는 아까웠으니까요.”
낄낄거리는 로빈의 눈빛이 어딘가 섬뜩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