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38화 (38/119)

〈 38화 〉 38화. 구원의 닌자 (1)

* * *

닌힘숨, 의뢰, 유검경 염탐, 무카 처리, 전부 성공적.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발 담그고 물 구경하고 할 건 다 했다.

“정말로 괜찮겠어요? 혼자서 정찰하러 가신다니.”

“제 실력 보셨잖아요. 검 쓰는 솜씨만큼 은신에도 능합니다.”

유검경과의 문제는 대충 처리했으니 이제 야인족이라는 놈들을 찾아봐야 할 시간. 홍염룡 기사단은 마을을 지키는 중이라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 백성들의 평화를 위해서는 내가 직접 나서야 한다.

조용히 잠적해 있는 야인족들의 행방을 확인하고 오겠다고 말해 의뢰를 받아냈다.

“드릴 수 있는 게 금화 몇 푼뿐이네요. 홍염룡 기사단 분들을 고용하는데 돈을 많이 사용해서...”

시름시름 앓는 촌장을 대신해 마을대표로 뽑힌 에이미가 말끝을 흐렸다. 유검경이 마음먹고 폭탄세일을 해줬다 해도 일개 마을 수준으로는 기사단의 보호비를 내기가 힘들었을 거다. 어떻게든 성의 표시를 하기 위해 있는 있는 돈 없는 돈 탈탈 털어서 준 게 아닌가 싶다.

“상관없습니다. 슬슬 밤이니 나갈 준비를 하겠습니다.”

“동료분들을 극진히 대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둘러 인사를 마치고 여관으로 들어왔다.

“나 없을 땐 오르페가 리더다. 의심받지 않게 이상한 짓 하지 말고 있어.”

“잘 갔다 와.”

“네.”

[알겠다.]

그러고 보니 트리보는 무기가 없네.

“이거 빌려줄게. 무기로 써라.”

녀석에게 골돈에서 얻은 도끼를 넘겼다. 양철 나무꾼에겐 도끼가 어울린다.

[...고맙다.]

받아들더니 구경하는 트리보.

“너 마나는 쓸 수 있냐?”

[영혼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그럼 그냥 평범한 도끼인데. 알아서 하겠지 싶어 그냥 나왔다. 일일이 엄마처럼 챙겨주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다.

터벅터벅터벅.

마을 바깥에는 언제나처럼 기사단이 근무를 서고 있었는데, 어제보다 더 피곤해 보였다.

그녀가 결국 저질러 버렸군.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우하하 팡파레~!’를 참고 가볍게 인사를 건넸다.

“노래는 잘들 들으셨습니까?”

“아주 잘 들었지. 모험가는 좋겠군. 항상 그런 노래를 들으니 말이야.”

대답한 사람은 오늘 농지로 나가서 보어루사 시체만 치우고 온 케이트였다. 비꼬는 태도를 보아하니 이 구역의 미친년 확정이다.

“슬슬 나가볼까 합니다. 에이미 씨가 설명해 드렸나요?”

“들었다. 가보도록.”

케이트와 다른 기사들이 배낭조차 검사하지 않고 길을 비켜줬다.

혹시나 해서 다른 히어로들처럼 닌자슈트를 안에다 입었는데 그냥 헛수고였다.

“네가 단장님의 생각만큼 괜찮은 녀석이었으면 좋겠군. 수고해라.”

“그거 이상이죠. 수고하시길.”

난 괜찮은 녀석이 아니라 개쩌는 녀석이다.

적당히 마을이 멀어졌을 때 완벽하게 닌자슈트로 갈아입고 배낭을 땅바닥에 묻은 후 내달렸다. 두더지 요괴는 없다는 오르페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슝슝슝­!

바람을 가르면서 달리는 것도 오랜만. 이 서늘한 감각이 이제 탈주닌자로 돌아갈 때가 됐다고 말한다.

달리면서 레이더를 쏘면 딱 맞겠지만, 아쉽게도 아직 쿨타임이 안 찼다.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순간마다 꼭 삑사리가 난다.

­ 끼르르르...

­ 꾸게게게...

짝짓기 시간이었는지 사방에서 요괴들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상록수 마을에 오는 도중에도 많이 봤었는데 그전보다 더 숫자가 늘어난 거 같다. 축제라도 열린 건가?

하나하나 다 토막 내고 다니기엔 너무 오래 걸릴 거 같아 참았다. 제1 목표는 야인족, 그 녀석들로 정했으니까.

그렇게 1시간 정도를 달렸을 때, 안개로 둘러싸인 곳을 발견했다. 신기하게도 이 주변엔 요괴들이 없었다.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천천히 걸어 들어간 후 공기를 살짝 들이켰다.

“킁.”

마나로 체내를 보호하면 독안개를 삼킨다 해도 버틸 수 있다. 10초 언저리만 완벽한 보호가 가능하지만, 사갈의 꼬리 캠프장에서 별별 독 종류를 구경해본 나에게는 분석하기 충분한 시간.

“흐.”

일단 독안개는 아니다. 그것보단...홈키퐈나 에푸킬롸에 가까운 느낌? 조금 피곤하고 나른해지는 게 분노조절이 잘되는 성분도 섞여 있는 거 같다.

스슥­

뜬그림자를 쓰고 안개의 중심지를 향해 걸었다. 안개가 옅은 편이라 주변이 잘 보인다.

사갈의 꼬리 하니 오랜만에 후보생들 생각이 났다. 40명이나 살아남았으니 살다 보면 한두 명 정도는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이왕 좋은 기술을 익힌 거 백성을 위해 사용해줬으면 좋겠다. 좆같은 짓을 하고 있다면 죽음뿐이니.

­ 드르렁...

사람의 코 고는 소리. 이쯤 되면 백 프로다. 모기향을 켜놓고 잘 정도로 영리한 놈들인지는 몰랐는데.

­ 쿠우울...

짐승의 가죽 같은 걸 입은 구릿빛 피부의 문신 남녀들이 몸통만한 나뭇잎 위에서 자고 있었다. 꽤 무리가 큰 게 최소 100명은 되어 보인다.

안개를 내뿜는 건 불이 붙어 타오르는 노란색 나뭇가지였는데, 이건 야인족들이 사용하는 모기향 같다. 녀석들의 중앙에 이 나뭇가지들이 가득했다.

야인족. 남녀 모두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한 게 그냥 깍두기 형님 클론들을 보는 느낌이다. 야쿠자는 아니겠지?

솔직히 의심 갔지만, 지금은 야인족에 의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은 상황. 몰살은 참아야 한다.

보스룸처럼 세워진 천막은 딱 하나였는데, 주변에 아기인형을 닮은 이상한 토템들이 가득했다. 닌자마을을 찾아 떠돌 당시 잠깐 들렸던 ‘인형의 섬’에 있던 것들과 비슷한 느낌.

마법적인 조치가 있는지 육감으로 확인한 후 천막 안으로 들어갔다.

슥­

“...?”

천막 안에 자는 사람은 딱 한 명, 그것도 목에 이상한 장신구들을 착용한 젊은 여자였다. 보통 이런 야만족들은 근육질의 남자나 지혜로운 노인을 족장으로 삼지 않나?

야사요라는 증거자료를 찾기 위해 천막 안을 살피다가 네모난 가마솥을 발견했다. 뚜껑을 열어보니 모습을 드러내는 비릿한 냄새를 풍기는 붉은 액체.

설마...

“...!”

비극적인 진실을 기록하기 위한 수단인 어린아이 토템. 숲에서 혼자 천막을 독식하는 젊은 족장. 괴상망측한 장신구들. 아궁이에 담긴 핏덩이. 모든 그림이 짜 맞춰졌다.

야인족 족장의 정체는 아이들의 피로 젊음을 유지하는, 위치 더 베이비­슬레이어였다.

분노가 치솟는다.

딱!

바로 딱밤을 갈겨줬다.

“야따에!”

이상한 소리와 함께 벌떡 일어난 마녀의 목덜미를 붙잡고 천막 바깥으로 나갔다.

“단다 무싸! 불카!”

마녀의 비명에 마녀 숭배자들이 벌떡 일어났다.

“이단다 무싸! 불카노!”

“만다리아! 만다리아!”

“친자 하노! 하노아!”

씨발, 언어가 다른 건 예상 못 했는데. 이세계로 넘어온 사람에게는 적어도 번역기능을 옵션으로 줘야 한다. 일단 소란스러워진 녀석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무고한 아이들의 목숨을 앗아간 죄~!!!”

그녀의 목덜미와 다리를 각각 붙잡고 들어 올렸다.

“야따에~! 야따에~!”

꿈틀꿈틀.

그녀의 미약한 몸부림으로는 내 힘을 막을 수 없다.

“사형이다.”

그대로 내려찍으려는 순간, 마녀가 말했다.

“사, 사형 멈춰~!”

***

로빈 일행이 묵고 있는 여관.

[오르페.]

마을에서 빌린 책을 읽고 있던 오르페한테 트리보가 말을 걸었다.

“네?”

[디아나에게 단풍잎 마을에서 있었던 학살극을 들었다.]

잠든 디아나를 향해 시선을 옮기던 오르페가 ‘학살극’이란 단어에 멈칫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거죠?”

[가장 오랫동안 로빈의 곁에 있었다고 들었다. 그가 지나치게 과격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말에 높낮이가 없으니 어떤 생각으로 말하는지 알 수 없었다. 천천히 생각하던 오르페가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그 마을 사람들은 전부 식인괴물이었어요. 당해도 싼 놈들이죠.”

[그들이 사람을 먹는 걸 직접 본 건가?]

“라미나 씨에게 들었어요. 거짓말이 아니었고요. 용족들은 피만 봐도 눈이 돌아갔으니까요.”

[일을 저지르고 나서 확인했다. 난 그렇게 들린다.]

“사람이 먹힐 때까지 구경하고 있으라는 건가요?”

[그런 뜻은 아니다.]

“저에게 이걸 물어보는 의도를 모르겠군요. 로빈에게 불만이 있으신 건가요? 그렇다면 직접 얘기하시는 게 나을 거에요.”

퉁명스러운 오르페의 태도에 트리보가 말문이 막혔는지 잠잠해졌다.

[오랜만에 깨어난 거라 아직 말하는 게 미숙하다. 양해를 구한다.]

“...상관없어요.”

[난 그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

너무나도 뜬금없는 말.

“무슨 뜻이죠?”

[그는 이 세계에 속한 사람이 아니다. 짚이는 게 있겠지.]

“...”

이번만큼은 오르페도 쉽사리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로빈의 말투, 상식, 사고방식, 전부 다 이질적이었으니까.

[이계에서 사람을 데려올 수 있는 건, 감시자뿐이다. 구원자도 그들이 불러냈지.]

이건 오르페도 알고 있는 사실.

[로빈의 경우는 다른 이계인과 좀 다르다. 육체가 아니라, 영혼이 넘어온 것이니.]

“영혼이, 넘어왔다.”

눈치빠른 오르페가 갑자기 변한 567의 행동을 떠올렸다.

[우리 시대에서 추방했다 생각했던 감시자들이 뭔가를 꾸미고 있다. 그것도 아주 교묘한 방법으로.]

“...그게 로빈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고 싶다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는 거죠?”

[그는 이미 두 감시자를 흡수했다.]

“...신체 강탈자.”

로빈이 퇴치했다 말한 그것들이 동화책에서만 나오던 감시자였다니. 충격적인 사실에 오르페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난, 그가 이 사태를 해결할 힘이 있다고 생각한다.]

“로빈을 이용해, 감시자와 맞서게 하겠다는 건가요.”

그렇게 말한 오르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녀 또한 본인이 진실을 밝힐 때 로빈이 도와줄 것이라는 기대를 품고 있었으니까.

대가 없이 헌신적으로 도와준다면, 언젠가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서로 이용하는 관계가 아니기에 괜찮다며 만들어낸 그녀만의 핑계였다.

[오르페. 너도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이것 또한 짚이는 게 있을 거다.]

트리보가 오르페를 끝부분이 갈라진 검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넌 두 세계의 혼혈아다. 그것도 피가 가장 진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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