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39화 (39/119)

〈 39화 〉 39화. 구원의 닌자 (2)

* * *

“사, 사형 멈춰~!”

두 팔과 다리를 정신없이 휘휘 저으면서 명령하는 마녀.

마녀 숭배자들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다리만 동동 굴렀다. 녀석들에게 마녀가 중요한 존재인 건 확실하다.

“너 이 새끼. 한국어를 할 줄 알면서 모른 척한 거야?”

한국어가 아니라 이르갈 왕국어였나? 크게 중요한 건 아니다.

“반으로 갈라져 죽어!”

이상한 외국어를 사용해 날 당황하게 하려 한 죗값이 추가된 것뿐이지.

“야따에~! 아이들! 안 앗아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마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이게 악어의 눈물인가?

“아이들! 아니다! 아냐!”

너무 간절하게 부정하는 게 뭔가 있어 보이긴 한다. 일단 이야기를 들어 볼까 싶어서 힘을 살짝 뺐다.

“어린애처럼 생긴 토템과 가마솥의 피는 뭐지? 설명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듯이 눈만 껌뻑이길래 바닥으로 내려준 다음, 다리를 붙잡고 있던 손으로 토템을 가리켰다.

거짓말은 어떤 방식이든 티가 나게 되어있다. 목을 붙잡고 있으니 쓸데없는 짓을 하면 바로 꺾어버리면 된다.

“카리토! 카리토!”

이제야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마구 끄덕이는 마녀.

“대접하는 의식! 망자를!”

“너 국어 몇 등급이냐?”

우리말을 하긴 하는데 뭔가 시원찮다. 대충대충 날림으로 공부한 새끼들이 꼭 이러더라.

다시 물었다.

“아이들을 죽인 후 대접하는 거냐? 우릴 위해 죽어서 영양분이 되었으니 축복해준다. 뭐 그런 거야?”

“안 죽였다! 먹지 않는다! 부족의 아이들, 죽었다… 데트라 포 타카나 습격으로.”

그렇게 말하는 마녀의 표정이 아주 서글퍼 보였다.

“데트라 포 타카나는 뭔데.”

이름만 들어서는 존나 센 중간보스 캐릭터 같다.

“데트라 포 타카나. 퇴화한 자. 너희들 말로, 몬스터다.”

요괴에게 부족의 아이들이 죽어서 그 혼을 위로하기 위해 토템을 세웠다. 이렇게 생각하면 말이 된다. 이 녀석은 마녀가 아닌 걸까.

홍염룡 기사단 때도 그랬지만 요즘 들어 죽여야 할 녀석인지 아닌지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을 때가 많다. 어떠한 경우에서라도 착각해서 무고한 백성을 해치는 일만은 없어야 하는 법.

“쟤네들에게 통역해.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네 목을 꺾어버리겠다고. 난 귀가 아주 좋다는 것도 알리고.”

“아, 알았다.”

마녀(임시명칭)가 숭배자(가칭)들에게 뭐라고 소리 질렀다. 땀을 삐질삐질 흘리면서도 고개를 연신 끄덕이는 놈들.

녀석들을 한 번 노려본 다음, 천막 안으로 들어가 핏덩이로 가득한 가마솥을 가리켰다.

“이건 뭔데. 아이들을 죽인 뒤 피를 뽑아낸 거 아냐?”

“끔찍한 생각!”

마녀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동물 굳은 피. 건강에 좋다. 야채와 함께 끓인다. 우리들 자주 먹는다. ”

“선지해장국이었어?”

김이 확 빠지네. 다시 살펴보니 가마솥 옆에 있는 항아리 안에 야채가 가득했다.

“야이씨. 왜 저렇게 수상한 가마솥을 쓰는 건데? 마녀인 줄 알았잖아.”

이거는 이 새끼 잘못도 있다. 누가 봐도 오해할 만한 상황을 만들었으니까. 냉정 침착 신중한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봤다면 아즈텍 식인종들을 본 콩키스타도르처럼 눈이 확 돌아가서 야인족들을 몰살시켰을 것이다.

“나, 제사장. 마녀 아니다. 제사장!”

억울하다는 듯이 강력히 항변하는 마녀, 아니 제사장.

“제사장은 또 뭔데.”

“부족을 이끌고, 제사를 지낸다. 그게 내 역할.”

부족장과 주술사를 섞어놓은 하이브리드 직종인가. 문명인의 ‘분업’이라는 걸 모르는 야만인들이기에 할 수 있는 발상이다.

“제사장. 왜 상록수 마을을 공격하려 했지? 똑바로 대답해.”

이게 제일 중요하다. 몰살당할 것인가, 살아남을 것인가. 대답에 따라서 야인족의 미래가 결정된다.

“...”

치욕적이라는 듯이 얼굴을 구기는 제사장.

“대답해!”

다시 한번 목을 쥔 손에 힘을 줬다.

“흑, 헉!”

끈덕지게 버티는 제사장. 녀석이 손을 휘저으며 반항하길래 남은 손으로 그녀의 두 손도 붙잡았다.

“10초 안에 대답하지 않으면 야쿠자로 간주하고 목을 부러뜨리겠다.”

미묘한 자세가 됐지만, 여기서 악당은 제사장이다.

“으흑…. 몬스터가 공격했다. 부족 삶의 터전. 우리 도망쳤다. 마을 도움 요청했다.”

결국 힘 앞에 굴복한 제사장이 입을 열었다.

문장 구성력은 좆같지만 말 짧게 하는 거 하나는 맘에 든다.

“너희 나뭇가지 있잖아. 그걸로 모기향 피우고 사는데 공격을 왜 당해.”

“시마토? 그건 가라앉힐 수 없다. 흥분하거나, 영리한 몬스터.”

아무래도 모기향은 한계가 있는 모양이다. 저걸로 델라미온 같은 새끼를 쫓아내는 건 말이 안 되긴 한다.

“잠깐 멈춰봐.”

상황을 정리하기 위해 메모장을 꺼냈다. 오르페가 여관주인이 사용하던 수첩을 사 와서 나에게 넘겼는데 이게 참 유용하다.

왼손으로는 제사장의 목, 오른손으로는 펜을 잡고 준비를 마쳤다.

“이제 계속해.”

“대화하려 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그런데 녀석들이 먼저 화살을 쐈다. 다쳤다. 우리 부족원 세 명.”

“어떻게 가까이 다가갔는데?”

“거리 멀었다. 마음도 급했다. 그래서 달렸다.”

“아니 병신아. 너네 같은 놈들이 달려들면 당연히 화살을 쏘지.”

문신 태닝 양아치 덩치들이 한꺼번에 달려든다면 부처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다. 전투 인원이 부족한 작은 마을의 병사들은 얼마나 놀랐을까.

“...오해 풀고 싶었다. 못 했다. 갑옷 입은 자들이 와서.”

“왜 여기서 자리 잡고 있는 거야?”

“우리 삶의 터전. 신단 있다. 버리고 떠날 수 없다.”

“존나 골치 아픈 상황이네.”

메모는 끝났다.

1. 요괴들이 야인족들이 살고 있던 곳을 습격해 점령했다.

2. 그곳에는 신단이 있어서 되찾아야 한다.

2. 쫓겨난 야인족들이 몬스터를 몰아내기 위해 상록수 마을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3. 급발진해서 달려 나가다 화살 맞고 튀었다.

4. 홍염룡 기사단까지 와서 이도 저도 못 하고 여기서 찡찡대고 있는 중.

“좋아.”

정리해서 보니 한결 낫네. 대신 저장해줄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없는 세상이다. 트리보나 오르페가 항상 곁에 있다는 보장은 없으니 필기 연습을 생활화할 필요가 있다.

“따라와.”

제사장을 데리고 다시 바깥으로 나왔다.

“델라모타…!”

“두둥타...”

“도노폴라도..”

야인족들이 아까와 똑같은 자세로 우두커니 서 있었다. 리더가 인질로 잡혀 있어도 그렇지 분노 조절 못하는 한두 명 정도는 화내면서 덤벼 들만 한데 모두 거세당한 수탉처럼 얌전히 있다.

난폭하다고 들은 거 같은데, 그냥 소문일 뿐이었나. 덩치는 커 보이는데.

“전투 가능한 사람이 몇 명이나 되냐?”

일단 제사장에게 물었다.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눈알을 굴리는 녀석.

“거짓말할 생각 하지 마. 바로 알아챈다. 관심법이라고 아냐? 내가 그걸 익히고 있거든? 걸리는 순간 너뿐만 아니라 여기 있는 전부 죽일 거야. 잘 생각해.”

물론 뻥이다.

“전사…. 많이 죽었다. 스무 명 안된다.”

“후.”

익숙한 이 상황. 골돈, 또 너야? 이쯤 되면 그냥 운명이다.

천천히 야인족들의 얼굴을 살펴봤다. 처음 봤을 땐 덩치 큰 바바리안이라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대부분이 순박한 농촌 남녀의 유순한 눈을 하고 있었다.

“다들 보증 잘 서주고 벼 잘 심고 가축 잘 돌보게 생겼네.”

“후…. 나와 마을, 어떻게 할 건가.”

한숨 쉬는 걸 보니 반쯤 체념한 것 같다.

제사장의 말대로라면, 이 얼간이들도 지켜야 할 백성.

그럼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신단 가는 데 얼마나 걸려?”

“왜?”

“얼마나 걸려?”

“...하루 안 된다.”

“이 새끼들에게 내일 아침 신단으로 간다고 전해. 내가 도와주겠다고.”

띠용~

제사장의 눈이 곧 빠질 것처럼 커졌다.

“눈알 집어넣고 빨리 전달해.”

내 눈치를 살살 보면서 말을 전달하는 제사장.

“밀라? 밀라 다에?”

“도미누 퍼저.”

이제는 지들끼리 떠들기 시작하는 야인족들.

“난 오늘 천막에서 자겠다. 넌 인질이니 따라와야 해. 헛짓하지 말라고 다른 애들에게 전달해.”

천이랑 가죽으로 잘 막아놔서 그런지 천막 안이 존나 따뜻하다. 있다 보면 선지 특유의 비린내는 적응되기 마련이다.

전달을 마친 제사장이 다시 나랑 눈을 맞췄다.

“왜, 도와주는, 거지?”

“난 탈주닌자니까.”

“원하는 거, 뭔가? 읍!”

더 말 상대해주기 귀찮아서 입을 막아놨다. 원하는 거, 그런 건 없다.

물론 먹을 거랑 옷감이랑 무기 등등 괜찮은 걸 주겠다면 받을 의향은 있다.

나야 제사장 침대에서 자면 되는데, 얜 어디서 재우지?

“읍?!”

그냥 안고 자기로 했다. 이러면 탈출하려는 시도를 보일 때 바로 닌자 본디지 플레이를 꽂아 넣을 수 있다.

“난 아주 예민해. 네가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깨어나겠지. 처신 잘하라고.”

제사장이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등을 안고 있어서 표정은 안 보였다.

“잘 자.”

몇 분 후.

코코넨네.

바로 잠들었다.

***

출생의 비밀을 듣기 시작한 지 몇 분이 지났을까.

어떤 책에서도 나와 있지 않은 충격적인 진실들이 오르페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그러니 너도 날 도와줄 의무가 있다.]

이 모든 것을 전달한 트리보는 언제나처럼 담담했다.

오르페가 그의 얼굴을 떠올렸다. 진한 눈썹, 날카로운 눈매, 흥미가 동하지 않으면 좀처럼 열리지 않는 입.

[로빈은 널 가장 신뢰하고 있다. 네가 말하면 어느 정도는 듣겠지. 감시자에 대항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를 더 완벽하게 만들어야 한다.]

사갈의 꼬리에서 첫 번째 희생자를 정할 때, 로빈이 앞뒤 재지 않고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라미나의 말처럼 단풍잎 마을을 벗어나고 길드에 도착해 그 마을 사람들이 몬스터라는 걸 알렸다면 어떻게 됐을까.

델바나스가 투사체를 발사해 성벽과 성문을 무너뜨렸을 때, 로빈이 곧장 등장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로빈은 바뀔 필요가 없습니다.”

생각을 마친 오르페가 결정을 내렸다.

[이해가 안 된다.]

“완벽한 사람은 없어요. 때와 장소에 맞는 사람이 있을 뿐이지. 그가 가끔씩 엇나간다 싶으면 제가 말해볼게요. 그렇지만 마지막에 결정하는 건 로빈이에요.”

[그걸로는 부족하다.]

“사람을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쉽게 답하기 힘든 질문에 트리보가 조용해졌다.

이 질문에 잘못 대답하는 순간, 구원자와 그 동료들이 작성했던 저항의 기록들을 부정하는 셈이 되니까.

“전 로빈을 믿어요. 그러니 이 이야기는 여기서 끝낼게요. 이만 가주시죠.”

단호한 거절.

[...다시 한번 천천히 생각해 봤으면 한다.]

트리보가 거대한 몸을 일으켜 방을 떠났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