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40화 (40/119)

〈 40화 〉 40화. 구원의 닌자 (3)

* * *

“음.”

저절로 눈이 뜨여 닌자기상법으로 일어났다. 체감상 8시간은 잔 것 같다.

닌자슈트를 그대로 입고 자서 찝찝하긴 하지만 컨디션은 좋은 편.

국민체조로 간단히 몸을 풀어줬다. 레이더는 이제 작동하려나?

우우우웅­

되네. 횟수제한이 있는 걸 알았으니 중요한 순간에만 사용해야겠다.

“...쿨.”

아직도 꿀잠중인 제사장은 몸을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엄마 뱃속으로 다시 들어가고 싶어 하는 히키코모리 딸 같았다.

“아침형 인간이 되렴.”

짝 짜라 짝짝~! 짝짝!

“히엣!?”

간단하게 손뼉을 쳐 제사장을 깨웠다. 오늘은 밥 처먹고 바로 신단으로 갈 예정이라 바쁘다.

“잘 잤어?”

“샤나타. 아니, 그렇다.”

고개를 빠르게 끄덕이는 걸 보니 내 따뜻한 품 안에서 잘 잔 것 같다. 스윗닌자의 온기는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배고프니까 밥 줘.”

그녀에게 정중하게 내 권리를 요청했다. 원하는 게 없다고는 했지만, 밥 정도는 알아서 내와야 한다. 그게 백성들을 위해 살신성인 정신으로 자원봉사 하는 탈주닌자를 대하는 기본예의니까.

“...기다려라.”

“넌 인질이라니까. 나랑 같이 다녀야지.”

혼자 바깥으로 나가려고 하는 그녀의 어깨를 붙잡았다.

“걱정, 안 해도 된다. 나 안 도망가.”

“누가 너 도망가는 거 걱정한다고 했어?”

제사장보다 10배 이상은 빠른 까까시도 금방 따라잡아 누렁이(잠재적 보신탕) 잡듯이 주먹찜질로 족친 게 나다.

물론 정치적으로 올바른 닌자인 나는 보신탕을 먹지 않는다. 맛도 똑같은데 가격도 더 싸고 위생 상태도 좋은 흑염소탕이 있기 때문이다.

“네가 인질로 잡혀 있지 않으면, 네 부하가 나에게 덤벼들 거 아냐.”

괜히 제사장을 인질로 잡고 있는 게 아니다. 야인족은 지금까지 지켜왔던 백성들과는 여러 가지 의미로 다른 녀석들. 제일 중요한 언어가 달라 의사소통이 힘드니 어느 정도 강압적인 태도를 보여야 할 필요성이 있다.

때리지만 않으면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마라. 어제 나 말했다. 너, 우리 도우러 왔다고. 따라야 한다고.”

“그렇게 말한다고 바로 따르는 놈이 어딨어.”

“제사장 명령, 절대적이다. 어기면 천벌 받는다.”

그렇다면 상관없겠지. 제사장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어차피 그녀에게 선택지는 나 하나뿐이다.

“알겠지만 우린 이제 협력관계야. 서로 믿음과 신뢰를 주자고.”

정확히는 내가 일방적으로 도와주는 거지만, 굳이 거기까지 말하진 않았다.

일방적으로 캐리 받는다 느끼면 게을러지는 게 사람이다. 이는 조별과제가 증명하는 사실.

천막 바깥으로 나가려던 제사장이 갑자기 멈춰 섰다.

“너, 강하다.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몬스터 수 많다. 우리 전사들, 힘냈지만 많이 죽었다. 어머니도…. 그러니 힘들 거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급하게 제사장을 물려받은 건가.

나름 노블레스 오블리주 휴먼인 거 같으니 기운을 북돋아 주기로 했다.

“난 몰살 전문이야. 몰살이 뭔지 알아?”

“뭔가?”

“혼자서 다수를 상대해 죽인다는 뜻이야. 요괴는 혼자서 50마리도 썰어 봤어.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

말하고 나니 몰살보다는 양민학살이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해 보인다. 양학은 너무 끔찍한 말이니 그냥 몰살로 하자. 불편한 진실보다는 달콤한 구라가 나을 때도 있다.

“몰살…. 기억하겠다. 내 이름은 산세리프. 샌즈라고 불러도 된다.”

“그거 정말 ‘골’때리는 줄임말이네. 그냥 산세리프라고 부를게.”

느닷없이 자기소개하는 제사장. 이름이 너무 어려워 별로 기억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호의를 드러내기 위해 그런 거 같아서 일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너의 이름은?”

“탈주닌자.”

로빈이란 이름을 알려주면 나중에 골치 아파질 수도 있다. 힘들게 만든 이중 신분이니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깨면 안 된다.

“탈주닌자. 믿겠다.”

“닌닌.”

그 말을 끝으로 제사장이 나갔다. 이제 적어도 10분 정도는 내 자유시간이다.

스릉.

오랜만에 닌자도를 검집에서 빼냈다. 까까시가 제 맘대로 칼자루에 새겨놓은 붉은 뱀은 이제 지워져서 보이지 않았다.

까까시. 내 스승임과 동시에 가보인 닌자도를 강탈한 타락닌자.

­ 일주일 만에 이런 자세라니. 번호가…. 567? 기억할게요. 소질이 보여요.

오랜만에 그녀가 떠올랐다.

­ 슬슬 적응하고 있나요? 그렇죠. 그게 뜬그림자에요. 제 목소리에 집중해보세요. 주변과 자연스럽게…. 동화된다. 옳지…. 옳지…! 이제 제가 있는 방향으로 천천히 오세요. 그렇지. 이제 제 손을 잡으면 끝나요……. 대단해요!

내 인생에서 스승이라 할만한 유일한 인물.

­ 정말 대단해요. 볼 때마다 실력이 좋아지네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주 대단한 사람이 되겠죠. 제가 눈여겨보고 있는 거 알고 있죠?

까까시는 다른 후보생 중에서도 날 특별히 좋아했다.

­ 132 교관님이 때리는 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 사람, 사실은 별것도 아닌 사람이거든요. 그 사람이 무기를 사용하지 않는 이유가 뭔지 아세요? 고작 어린애… 네? 별로 궁금하지 않다고요? 재밌어라. 역시 567은 저와 잘 맞을 거 같아요.

같이 뒷담도 자주 깔 정도로.

­ 파트너인 568이랑은 손발이 잘 맞나요? 그 아이도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잖아요. 좀 부족하다고요? 후후후. 언젠가 그 아이보다 더 뛰어난 파트너를 구할 수 있을 거예요.

실은…. 저도 제 수준에 걸맞은 파트너를 아직도 찾지 못했답니다. 우린 참 비슷한 거 같지 않아요? 567?

단둘이 있는 시간마다 나에게 말을 참 많이 걸었었지.

­ 내일이 마지막 실습이라고 말했죠?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돼요. 567 정도면 가볍게 통과할 작은 시험이니까. 그 이후가 중요하죠. 잘 들으세요.

단장님에게 제가 직접 567을 추천할게요. 단장님이 물어보면, 385 교관의 밑에서 배우고 싶다고 말하세요. 그럼 다 된 거예요. 우리 둘만 남게 되는 거죠.

사갈의 꼬리가 아니라 다른 곳에서 만났다면, 악당이 아니었다면, 좋은 사제관계를 맺지 않았을까?

이미 죽은 사람이니 다 쓸데없는 가정이긴 하다.

추억은 접어두고 다시 닌자도에 집중했다.

번쩍번쩍.

요괴 50마리와 야쿠자 200명의 목숨을 앗아간 칼날은 아직도 날카로웠다.

특수한 금속으로 만들어진, 일반적인 상식을 벗어난 무기.

영혼 포식자.

갑자기 유검경의 전용장비가 떠올랐다.

닌자도를 들고 그녀와 맞붙는다면, 이길 수 있을까?

“...”

불확실하다.

힘, 속도, 기술, 장비. 전투력을 구성하는 4대 요소.

보어루사를 사냥하던 그녀를 나름대로 관찰해봤지만, 내가 우세하다 싶은 측면이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유검경은 몰아치는 뭐시기라는 원거리 공격수단마저 가지고 있었고.

그녀와 비슷한 수준의 전사가 공식적으로 왕국 내에서 6명이나 더 존재한다.

그 중에선 내가 쓰러뜨려야 할 사무라이도 있겠지.

더 강해져야 했다.

이세계에서 재건된 요괴­나치 연합군을 막기 위해서라도.

***

“야이 시발.”

차려진 밥상을 보자마자 살인충동이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새끼들이 제정신으로 대접한 게 아니다.

“맛있다. 귀한 거. 3개월에 한 번 구할 수 있다.”

그렇게 당당한 얼굴로 산세리프가 내민 요리는.

고등어 대가리 카레, 고라니 생간, 짱돌 찌개.

는 아니었지만, 그것들만큼 끔찍한.

“이거 애벌레 요리잖아!”

그랬다.

이 십새끼들이 에이션트 거대 애벌레를 동글동글 잘라 어딘가에서 주워온 잡초와 함께 버무려 나에게 대접했다!

파란색 진액으로 가득한 왕꿈틀이 샐러드 정식.

“이건 죄악이야!”

난 아침식사로 이딴 걸 처먹으면서 끔찍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다.

바로 밥상을 뒤집어엎었다.

“아앗! 아깝다!”

“조마티으!”

“데사가!”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는 산세리프와 야인족들. 갑자기 이 새끼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건 우리 집 뽀삐도 안 먹어! 더 나은 걸 가져와!”

옆구리에 손을 올리고 사자후를 질렀다.

좆같은 애벌레 스테이크는 사갈의 꼬리에서 이미 풀코스로 질리도록 먹었다. 변 색깔이 오르페의 머리색과 같은 파란색이 되도록 말이다. 너무 당황해서 비유가 좆같이 튀어나왔네.

미안, 오르페.

“이, 이거 먹어라.”

산세리프가 다시 음식을 가져왔다. 뭔가 하고 자세히 다가가 확인하니 박쥐를 닮은 동물 바베큐였다.

“에볼라 바이러스!”

“꺄악!”

바로 이단옆차기로 그것을 박살 냈다.

“이 마귀새끼들아! 왜 전염병을 퍼뜨리려고 하는 거야! ”

“이거 문제없다. 맛있다. 왕국 사람도 즐겨 먹는다. 이해 못 하겠다.”

이세계 박쥐는 병균이 없나? 그래도 저렇게 좆같은 비주얼을 한 동물을 먹고 싶지는 않았다.

“이러면 싸워줄 수가 없어! 싸워줄 수가 없다고!”

닌자 풀세트 상태라 머리카락을 쥐어뜯을 순 없어서 두건을 존나게 잡아당겼다. 미래의 목표와 이상, 신념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한 후 시궁창 같은 현실과 마주하면 사람이 미쳐버리는 법이다.

“탈주닌자, 진정해라!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나?”

“선지해장국!”

그래, 그게 있었다.

“끓여와. 지금 당장.”

부처와 핫토리 한조에게 맹세코 정상적인 아침을 먹기 전까지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