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 41화. 구원의 닌자 (4)
* * *
한편, 상록수 마을 바깥의 임시거점.
“무슨 일인가? 부단장, 설명해라.”
순찰을 돌다 방금 도착한 유검경이 가장 앞줄에서 지휘 중인 레오나에게 물었다.
한 곳만 뚫어지라 노려보는 기사단원들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단장님. 저쪽입니다.”
유검경이 옆에 도착하자 레오나가 손가락으로 한 방향을 가리켰다.
말을 탄 정체불명의 무장세력이 들판을 가로지르며 마을을 향해 오고 있었다.
그 숫자가 30명뿐인 홍염룡 기사단의 3배는 되어 보였다.
“멀어서 확실하진 않지만, 야인족 같지는 않습니다.”
“저쪽도 우리를 확인했을 텐데. 멈추지 않는군.”
“고함을 질러 볼까요?”
“내가 하겠다.”
유검경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우리는 홍염룡 기사단이다! 이 마을은 현재 우리의 보호 아래 있다! 그대들은 누구길래 이곳에 접근하는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지는 그 목소리에 무장세력이 멈춰 섰다.
서로 의논하듯이 속삭이던 그들 사이에서 한 남자가 나섰다.
“거리가 너무 멉니다아! 좀 더 가까이 다가가도 되겠습니까아아!”
남자가 두 손을 활짝 벌리며 크게 외쳤다. 레오나와 짧게 눈빛을 교환한 유검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허가한다!”
허락이 떨어지자 다시 다가오는 무장세력.
긴장을 놓지 않은 기사단원들이 가까워지는 그들을 천천히 살폈다.
고함을 지른 남자를 포함한 전원이 검은 가죽 갑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들의 가슴팍에 붉은 고래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그림 밑에는 ‘과거를 통해 배우고, 현재를 위해 봉사하고,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었는데, 이 표어를 사용하는 단체는 왕국에서 단 하나뿐이었다.
“붉은고래 마탑 소속이군요. 이런 시골까지 무슨 일로 왔는지...”
왕국을 좌지우지하는 검성회와 동등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 거대한 조직. 그들과 엮여서 좋은 꼴을 본 적이 없는 레오나가 미간을 구겼다.
“아이고, 이거 유검경 아니십니까! 이런 누추한 곳에 어째서 귀한 분이?”
고함을 질렀던 중년의 남자가 말에서 내리고 천천히 유검경에게 접근했다. 정성스레 다듬은 염소수염이 비열한 인상과 잘 맞아떨어지는 자였다.
“안녕하세요! 전사이자 탐험가이자 마법사인 ‘벨더가드 사무초’ 입니다! 붉은고래 마탑의 3급 직원이죠! 자! 악수!”
악수를 청하는 벨더가드를 유검경이 무심한 눈으로 바라봤다. 가볍고 경박한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뒤쪽의 병사들은 누군가? 마탑의 개인 사병?”
그녀의 손은 검집에 붙은 듯이 미동도 하지 않았다. 눈치를 살피던 벨더가드가 손을 거뒀다.
“아, 이 자들 말씀이군요! 깜빡하고 소개를 안 했네요! 이쪽은 ‘갱생대’ 입니다!
전원이 도적, 불온선동자, 왕족 비방자, 허위사실 유포자 등의 흉악한 범죄자였지만, 본 마탑의 정성 가득한 가르침을 받고 새로 태어났죠!
뭐 하고 있나? 기사분들이 경계하고 계시니 말에서 내려라! 무기도 내려놓고!”
갱생대라 불린 이들이 흐트러짐 없이 벨더가드의 명령에 따랐다.
“보셨죠? 완벽하게 ‘교육’ 되었습니다! 그들의 눈빛을 보세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고 싶다는 정의감에 가득 차 있지 않습니까?”
유검경이 그들과 하나하나 눈을 맞췄다. 먹물처럼 탁한 갱생대원들의 눈.
전쟁터에서 수도 없이 봐온, 인격을 거세당한 살인 도구의 눈빛이었다.
정의감은 개뿔. 한숨을 쉰 유검경이 벨더가드에게 다시 물었다.
“무슨 용건으로 온 건가? 이곳은 야인족의 위협을 받고 있다. 도와줄 게 아니면 다른 길로 가는 게 좋을 거 같군.”
“야인족? 여기까지 오면서 그런 놈들은 보지 못했습니다만…. 이미 도망친 게 아닐까요? 아무리 미개한 야인놈들이라도 홍염룡 기사단의 명성은 들어본 적 있을 테니 말이죠!”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진 끝난 게 아니다. 용건을 말해라.”
계속되는 추궁에 벨더가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검경의 차가운 태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모습이 상당히 노련해 보였다.
“마을에 피난 명령을 내리러 왔습니다! 비릭스들이 여기서 좀 떨어진 지역에 자리 잡았거든요!”
비릭스. 인간처럼 이족보행을 하는 곤충형 몬스터.
여왕을 중심으로 수백 마리의 개체가 뭉쳐 한 지역에 정착하는데, 뛰어난 번식력과 장악력을 가지고 있어 왕국에서 최우선으로 경계하는 놈들이다.
“대피가 끝나면 지역을 봉쇄한 후 불을 질러 잡으려고 했습니다! 피해가 상당히 크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요... 유검경께서 비릭스 토벌에 참여하신다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근처 주민들이 삶의 터전을 잃지 않아도 되는 거죠! 어떠십니까? 사례는 왕국과 마탑에서 톡톡히 할 겁니다!”
유검경이 생각에 잠겼다.
지금 자신이 마을을 떠난다면 꽁꽁 숨어있는 야인족이 공격을 개시할지도 모르는 일.
야인족을 추적하러 간 로빈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안심할 수가 없었다.
“마을이 걱정되시는 겁니까? 그럼 갱생대원들을 놓고 가죠! 한…. 30명 정도? 실력은 제가 보증하죠! 강력한 홍염룡 기사단과 함께라면 큰 힘을 낼 겁니다!”
“단장님. 괜찮은 조건입니다. 받아들이시죠. 숫자만 갖춰진다면 야인족은 별문제가 못됩니다. 비릭스가 더 위험한 놈들이죠.”
벨더가드의 설득과 레오나의 동의에 유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참가하겠다. 위치는 어디지?”
“좋습니다! 이 지도에 표시해뒀습니다. 언제쯤 출발할까요? 적어도 이틀 안엔...”
“지금 출발하겠다. 와라! 붉은 섬광!”
뾰룡뾰룡.
벨더가드의 손에서 지도를 빼앗은 유검경이 소환된 정령마를 타고 내달렸다. 당황한 벨더가드가 헛웃음을 쳤다.
“듣던 대로 성미가 급하시군. 애들아! 출발하자! 유검경을 따라라!”
***
용기를 내 도착한 곳에 낙원은 없었다. 그곳에 있는 건, 오직 전장뿐.
“신단은 죽었어, 이제 더는 없어.”
그것만이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었다.
“말도 안 돼…!”
“오수다…!”
“바쿠나...”
산세리프를 비롯한 야인족들이 나라 잃은 애국열사처럼 닭똥 같은 눈물을 흘렸다. 정찰병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입을 두 손으로 틀어막는 모습이 명화의 한 장면 같다.
“한 달이면 강산도 변한다더라.”
그들의 신단이 있어야 할 곳에는 아파트만 한 벌집이 자라 있었다.
신단을 뼈대 삼아 밀랍을 쌓아 올려 완성된 요괴의 성.
산세리프가 신단을 떠난 지 두 달이 안 됐다고 해서 조금은 방심하고 있었다. 요괴들이 벌써 리모델링을 끝마친 상태일 줄 누가 예상했겠는가.
두 쌍의 날개를 퍼덕이며 순찰을 돌던 꿀벌요괴들을 피해 이곳까지 왔건만.
“서, 성물. 성물만 있으면 된다. 신단 안에 있다.”
산세리프가 내 어깨를 잡으며 허둥지둥 말했다.
“부탁한다. 염치없다. 그래도 확인을, 해줬으면 한다.”
그녀의 손이 불안감으로 인해 떨리고 있었다. 산세리프의 말을 알아듣지도 못하는 야인족들이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을 도울 수 있는 건, 나뿐이다.
“어디 있는데?”
애초부터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동요하던 산세리프의 얼굴이 환해졌다.
뭐 했다고 벌써 감동을 먹었는지.
“중앙의 방에. 구슬처럼 동그랗고, 금색으로 빛난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우리가 시선을 끌겠...”
“그럴 필요는 없다. 나 혼자 잠입하는 게 더 깔끔해. 감사 인사는 끝나고 나서 받지.”
지금의 나는 프로페셔널한 탈주닌자. 비장한 눈빛을 그녀에게 쏘아 보냈다.
“알아서 숨어있어. 난 가볼게.”
“알겠다. 고맙다.”
자동인형처럼 ‘고맙다’를 반복하는 산세리프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준 뒤 뜬그림자를 쓰고 땅바닥을 기면서 벌집에 접근했다.
오랜만에 사용하는 닌자 카멜레온 모드.
사방이 수풀로 뒤덮인 산이라 위장하기가 편했다.
위이이잉
공중부양 중인 꿀벌요괴들은 먼 산만 보고 있다. 바쁜 벌꿀은 눈치챌 시간도 없나 보다.
코모도 도마뱀에 빙의한 듯이 빨빨 기어가 벌집에 몸을 붙였다.
높이는 대충 30m 정도, 밀랍으로 만들어져서 그런가 벽돌처럼 단단한 느낌은 아니었다.
그나마 비슷한 감촉이라면 플라스틱 정도?
여차하면 깨부술 수 있는 내구성. 탈출은 문제없다.
들어갈 창문을 선택하기 위해 하늘을 올려다봤다.
시발, 창문이 너무나도 많다. 육각형으로 만들어진 출입구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게 지구의 벌집과 큰 차이가 없었다.
어딜 들어가도 중앙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냥 가장 가까운 창문으로 들어갔다.
창문 구석구석에 발린 젤리의 미묘하게 끈적끈적한 감촉이 상당히 거슬렸지만 어떻게든 참아냈다.
이 젤리는 대체 뭘까? 벌레들의 소울푸드? 대소변? 그것도 아니라면 정액?
그 전부인 게 아닐지?
너무 혐오스러워서 생각하는 것을 그만뒀다.
beeeee….
Waspppp….
침입에 성공한 작은 방에는 꿀벌요괴 세 마리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불쾌한 골짜기가 더욱더 생생하게 느껴졌다.
대머리(모태 탈모 확정) 남녀의 얼굴에 겹눈과 좌우로 갈라진 입이 박힌 기괴한 모습.
욕계에 사는 제육천마왕의 수하만이 저렇게 좆같이 생길 수 있는 법이다.
세 마리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이때가 기회였다.
“야, 꿀벌.”
녀석들이 뒤를 돌아보기 전.
“죽일게.”
닌자도로 한꺼번에 모가지를 날렸다.
촤륵!
피부가 껍질로 덮여 있었지만 내구성은 별거 아니었다. 보어루사의 가죽이 더 단단하다.
녀석들의 목에서 흘러나온 투명한 피가 바닥을 적셨다. 뭘 잘못 주워 먹었는지 끈적끈적한 초록색 피도 섞여 나왔는데, 별일은 아닌 거 같아서 그냥 지나쳐
“닌?”
가려다 다시 멈춰서서 확인했다. 요괴, 초록색, 곤약.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골돈에서 쓰인 독 곤약이다.
이 새끼들, 하이너와 가까운 친척관계였나?
재만 남기고 사라진 델바나스가 무언가를 꾸미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지만, 가능성이 적어서 제외했다.
세상일은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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