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 42화. 구원의 닌자 (5)
* * *
가지고 있던 천 쪼가리에다 독 곤약을 살짝 묻히고 품속에 넣었다. 트리보라면 이것의 정체를 알지도 모른다.
이렇게 양이 적어도 파악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없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음부터 작은 유리병이라도 하나 가지고 다녀야 하나?
beeee…
밀랍으로 만들어진 벽 너머에서 다른 놈들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다 죽일까 하다가 조용히 숨을 죽였다. 방과 비교해 입구 크기가 작아 바깥에서는 시체가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눈치채지 못하고 걸어가는 요괴들.
위치 파악이랑 개체수파악을 하기 위해 레이더를 발사했다.
우우우웅
지나간 놈들의 숫자는 다섯. 양옆의 방에 총 일곱 마리의 벌레가 앉아 있었고, 벌집 전체에는 셀 수도 없이 많은 꿀벌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야쿠자 200명을 몇 시간 만에 죽인 나라도 인간보다 튼튼한 요괴를 상대로 무쌍을 찍긴 힘들다.
세 마리를 단숨에 처리한 건 기습으로 껍질이 옅은 목을 단번에 베었기에 가능했던 거고.
전투상황에 방심은 금물이니 요괴들의 지적 수준을 최대한 높게 잡아야 한다.
‘껍질’이라는 강력한 방어수단이 있는 녀석들이 내 존재를 의식하고 수비적으로 간다면 먼저 지치게 되어 있는 쪽은 나다.
불이라도 질러서 전부 죽이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재료가 없다.
“...”
우선 야인족들의 성물부터 찾기로 정했다.
요괴 수천 마리를 죽이는 것보다 중요한 건 무고한 백성들의 희망을 지켜주는 것이니.
뜬그림자를 유지한 채로 천장에 매달렸다. 천장은 바닥과는 다르게 끈적끈적한 황색 젤리가 붙어 있지 않아서 그나마 나은 상태.
동굴 같은 방을 빠져나오니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복도가 나타났다.
영주의 저택을 지키듯이 복도 좌우로 꿀벌요괴들이 서 있었는데, 미동도 하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모습이 웬만한 인간 병사보다 나아 보였다.
지나가던 요괴들을 건드렸다면 시작부터 대판 싸웠겠지.
천장의 밀랍 부스러기가 떨어지지 않게 주의하면서 놈들의 머리 위로 움직였다.
‘참을 인. 참을 인.’
머리 위에 달린 더듬이만 이리저리 휘두르는 경비들의 대갈통을 한 대씩 갈겨주고 싶은 욕구를 가까스로 참아냈다.
언젠간 때리고 말 거야.
중앙의 방이라는 단서 하나만으로 성물을 찾는다는 건 솔직히 불가능하다.
정직한 방법은 종일 쉬지 않고 움직여 위치를 알아낸다는 것인데, 말로만 들어도 감이 오겠지만 존나 미친 짓이다.
너무 시간이 오래 걸리면 상록수 마을 쪽에서 날 의심할 수도 있으니 가급적이면 빨리 처리하고 가는 게 좋다.
중앙의 방을 빨리 찾을 방법. 뭐가 있을까? 오랜만에 두뇌를 풀가동시켰다. 거꾸로 매달려 있으니 두뇌회전이 더 빨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꿀벌요괴들이 신단을 차지했을까? 우선은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야인족이 미워서? 심심해서? 신단이 벌집을 만들기에 편리한 구조라?
특별한 힘이 신단에 흐르고 있기 때문에?
좀 더 깊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
산세리프는 성물만 있으면 된다고 말했다.
신단 자체보다 신단 안에 있는 성물이 중요했기 때문에 차지한 건 아니었을까?
야인족이 중요시하는 물건인 성물에 꿀벌요괴들도 탐낼만한 특별한 힘이 담겨 있다면?
아무리 봐도 이게 정답 같다.
소중한 물건이 모셔진 방이 있다면 많은 병력을 그곳으로 배치하려고 할 것이다.
생명체만 초록빛으로 감지하는 닌자레이더를 다시 한번 더 발사해 주변을 탐색했다.
우우우웅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원 요괴처럼 미동도 하지 않는 초록빛들이 모여든 장소를 발견했다.
다른 곳과 비교해도 그 밀도가 높은 게 성물이 아니더라도 중요한 공간인 게 분명했다.
목표를 향해 공포 영화의 귀신처럼 천장을 네발로 우다다다다다다 기어갔다.
“...!”
도착한 날 맞이한 건 뜻밖의 광경이었다.
방 바깥을 지키는 경비원은 두 명뿐.
방 안은 젤리로 뒤덮인 원형물체만 가득했다. 꿈틀꿈틀 움직이는 게 생명체가 들어있을 것만 같다.
이게 꿀벌요괴의 알인가? 요괴곤충이 알을 낳는다고?
포유류처럼 생긴 오큘이 알을 낳는 제정신 아닌 세계였기에 빠르게 납득했다.
요괴의 미래를 없애는 것.
성물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나름 큰 수확이다.
쩌억!
놈들의 새끼가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장 앞에 있는 것을 양옆으로 잡아 반으로 갈랐다. 윤활제 같은 젤리가 마구 흘러나왔다.
그 안에 담겨 있던 머리에 털 달린 하얀 피부의 생명체는…. 사람이었다!
닌자도로 두 동강 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정신 차려!”
젤리 범벅인 중년 남자의 어깨를 잡고 마구 흔들었다.
고개가 위아래로 꺾일 정도로 과격하게 흔들고 있음에도 일어나지 않는 남자.
“눈을 뜨지 않겠다면…. 죽여버리겠어!”
협박에도 눈을 뜨지 않아서 그냥 뺨을 몇 대 쳐줬다.
짜짜짜짝!
“콜록! 콜록!”
남자가 벌떡 일어나더니 입에서 젤리를 뿜어냈다.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고 있길래 억지로 눈꺼풀을 벌려줬다.
“내가 보여?”
“여기는…. 에엑다...”
그 한마디 하더니 눈을 까뒤집으며 뒤로 벌러덩 넘어가는 남자.
어쩔 수 없이 최후의 수단인 핵꿀밤을 사용하기로 했다.
딱!
“부오오오옷!”
효과는 아주 뛰어났다.
남자가 두개골을 잡고 개구리처럼 펄쩍펄쩍 뛰었다.
“이제 정신이 들어?”
“흐, 흐어어어엉~!”
삼도천에서 빠져나온 게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즐거웠는지 어린애처럼 울부짖는 남자.
기뻐할 시간은 없다. 진정시키기 위해 남자의 어깨를 살짝 주물러줬다.
“흐으으으…! 저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무슨 죄를 지었다고...”
드디어 의사소통할 준비를 마친 남자.
“어떤 상황인지 떠올려라. 내가 널 구했다.”
“앗, 그러고 보니 여기는! 아...”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좌우를 살피던 남자가 시무룩해졌다. 아직도 벌집이라 그런가? 침울해질 시간도 없기에 말을 이었다.
“내가 너와 사람들이 빠져나갈 수 있게 돕겠다. 그런데...”
남자의 배가 지나치게 볼록했다. 콧수염과 잔주름이 없었다면 남성적인 임산부로 착각할 뻔.
“아무래도 녀석들이 네 배에 새끼를 심은 거 같군.”
어떤 요괴들은 인간의 몸속에 새끼를 까기도 한다.
“날 믿지?”
닌자도를 꺼내 남자의 배에 겨눴다. 살짝 갈라서 꺼내야 한다. 출혈사할 가능성도 있지만, 새끼 요괴에게 몸을 잠식당하는 것보단 나을 거다.
“이제부터 배를 쨀 거야. 힘낼게. 너도 힘내줘.”
“이건 그냥 제가 고도비만이라 그런 겁니다! 매일 아침 사과 파이 다섯 개를 먹다 보니 그만! 진정해 주세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많이 먹을 수 있지? 지금 변명하는 것은…. 요괴군. 벌써 인간의 몸을 장악했나?”
“요괴는 대체 뭡니까?”
“미안하다. 이것뿐이다.”
이러면 선택지가 하나뿐이다. 최대한 고통 없이 보내주기 위해 두 팔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씨, 씨발! 아버지와 어머니의 목숨을 걸고 맹세합니다! 제 이름은 밥, 인간입니다! 그냥 뚱뚱한 거라고요!”
요괴는 부모님의 따뜻한 정을 받으며 자라지 못해 가족이란 개념에 익숙하지 않다.
부모를 팔아먹을 수 있는 건 인간뿐.
“믿겠다. 너는 인간이 맞군.”
이름이 아시아인의 소울푸드인 ‘밥’이라 그런지 갑자기 친숙하게 느껴졌다.
닌자도를 내리고 밥에게 비수를 하나 넘겨줬다. 당황하면서도 받아드는 밥.
“이걸로 알을 잘라서 사람들을 구출해라. 일어나지 않으면 주먹으로 머리통을 세게 내려치면 된다.
위험에 처했다 싶으면 크게 소리 질러. 내가 구하러 올 테니. 너와 사람들을 여기 가둔 걸 보니 쉽게 죽이진 않을 거야.”
“어, 어디로 가시려고요? 사방이 비릭스 천지일 겁니다!”
“너희가 탈출할 시간을 벌겠다. 전부 구출하고 나면 꿀벌요괴들이 없는 방향으로 가라.”
적의 수가 너무 많아 직접 이 사람들을 직접 끌고 가긴 힘들다.
나 혼자 날뛰면서 어그로를 끌어 시선을 분산시키는 방법이 더 효과적이다.
“...누구길래 이런 일을 하는 겁니까. 왕국 소속은 아닌 거 같은데.”
“난 탈주닌자다.”
그 말을 끝으로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탈주 닌자…. 탈주닌자라면…. 마, 마르톨란의 심판자?!”
밥이 뭐라고 중얼거렸지만 집중한 상태라 잘 들리지 않았다.
내 적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빠각!
더듬이를 음란하게 움직이는 경비요괴의 대가리를 맨주먹으로 박살 냈다.
Sawflyyyy!
옆 녀석이 다른 동료를 부르려는 듯이 목소리를 높였다. 어그로가 끌리는 건 바라는 바이기에 잠자코 지켜보다 다가가서 턱을 잡아 뜯었다.
yeeeee...
투명한 피를 질질 흘리면서도 가시가 촘촘히 박힌 두 쌍의 팔을 휘둘러 저항하는 녀석.
고통을 견디는 것에 능숙해 보였다. 아예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건가?
이게 종족특성이면 좀 까다로운데.
밥 달라고 떼쓰는듯한 풍차돌리기를 피하고 로우킥을 날렸다.
몸통보다 빈약한 다리가 박살이 나 주저앉는 녀석. 다리근육이 빈약한 비행타입의 약점이다.
닌자도로 목을 날리고 앞뒤로 몰려드는 꿀벌요괴들을 살폈다.
위이이이잉
달려오고 날아다니며 통로를 꽉 채우는 게 일사불란해 보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그 광경만 보고 전의를 상실할 수준.
하지만 난 이런 인해전술에 당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와자뵷!”
이건 물러서는 놈이 지는 치킨 게임이다.
거센 파도와 같이 몰아치는 녀석들에게 달려들었다.
이게 시발 진짜 햄릿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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