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 44화. 구원의 닌자 (7)
* * *
눈에 들어온 건 멋진 껍질 투구를 쓴 40마리의 꿀벌요괴들이었다.
이 방이 중요한 곳임을 증명하는 엘리트 경비요괴. 여기 성물이 있는 건 필연적이다.
“탈주닌자와 40마리의 요괴.”
대화가 안 통하는 요괴의 장점은, 죽일 때 기술명을 아무렇게나 말해도 된다는 점이다.
내가 저녁에 먹고 싶은 음식을 나열한다 해도 이놈들은 알아듣지 못한 채 겁에 질리겠지.
슉슉솩솩싹!
경쾌한 효과음과 함께 순식간에 다섯 마리의 목을 잘랐다. 투구가 있을 뿐 목을 가리는 수단이 없었으니, 정확하게 급소를 노릴 수 있는 나에겐 그냥 쉬운 일이다.
Biene!
당황한 꿀벌들이 목을 쑥 집어넣고 뒤뚱뒤뚱 걸어왔다. 엘리트쯤 되니까 다른 개체에 비해 동작 전환이 빠르다.
첫 기습으로 열 마리 정도는 베었어야 했는데. 좀 아쉽다.
은신하며 쉬긴 했지만 누적된 피로를 다 없애지는 못해서 속도가 좀 떨어졌다.
게임처럼 회복 포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벌집 속이니 ‘로열젤리 포션’ 같은 느낌으로.
닌자도를 집어넣고 주먹을 쥐었다. 껍질 하나하나 자르다 보면 날이 나갈 수도 있으니 난타전으로 가야 한다.
Qnpfr!
강화된 주먹을 요괴들의 인중에 한 방씩 먹였다. 얼굴이 피떡으로 붕괴된 놈들이 바로 나가떨어졌다. 아이클레이 같은 감촉. 이제 원 펀치 닌자의 시간이다.
열다섯. 상처 없이 모조리 한 방에 보내버렸다.
스물일곱. 놈들이 날 두려워하는 게 느껴진다. 나보다 긴 팔을 이용해 사거리에서 우위를 점하려 했지만, 신체 구조 때문에 유연하게 움직이지는 못했다.
서른셋. 한 녀석이 격렬하게 저항해 오른쪽 허벅지를 살짝 베였다. 세 발자국 물러선 뒤 마나로 빠르게 지혈하고 다시 뛰어들었다.
마흔. 비명을 지르며 덤벼드는 마지막 벌레의 머리통을 박살 냈다.
“하…!”
몰살 완료.
두 주먹에 피멍이 맺혔고, 온몸은 땀범벅이 되었다.
닌자호흡법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진정시키며 주저앉았다.
“졸라 힘드네.”
엘리트 요괴들 전부 실력이 뛰어나 힘든 싸움이었다. 0.7 아일린을 40명 정도 잡은 느낌.
상처 입은 허벅지를 붕대로 감고 5분 정도 휴식을 취한 다음 몸을 일으켜 방으로 들어갔다.
다른 전사들이 잘 싸워주고 있는지 이곳까지 찾아오는 요괴는 없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통로를 걸었을까.
“운수 조진 날이네.”
설렁탕을 사 왔는데 아내가 닌자에게 죽어있던 인력거꾼의 이야기를 담은 단편소설이 떠올랐다.
qeeee…..
밀랍 왕좌에 몸을 기대고 있는 거대한 인간형 꿀벌요괴가 날 반겼다.
키가 12m는 넘어가는 거대괴수 여왕벌.
시발, 보물상자 스테이지가 아니라 보스룸이었네.
정예병들을 전부 죽였나? 상관없지. 아이들은 다시 낳으면 된다.
머릿속에서 중년 여자의 목소리가 울렸다. 텔레파시인가? 스피릿요괴들이 사용하는 걸 본지라 당황하진 않았다.
넌 누구길래 날 방해하는 거지? 이름을 말해봐라.
“성물 어딨어.”
인간, 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라.
“성물 어딨어!!!”
닌자도를 들고 녀석에게 달려들었다. 먼저 자기소개하지 않고 상대방의 신상을 캐묻는 델바나스 같은 새끼한테 해줄 말은 없었다.
델바나스… 델바나스를 아는가?
그 말에 빨간불 앞의 차처럼 멈추어 설 수밖에 없었다.
“너 그걸 어떻게...?!”
이 새끼가 내 생각을 읽었다. 이런 사기 능력을 거대한 요괴가 가져도 되는 건가?
아주 조금은 가능하지. 델바나스의 계획을 듣고, 날 죽이러 온 건가?
“이 뭔 개소리야.”
델바나스는 일대일 싸움에서 줘 털리고 지하국대적으로 변해 싸우다 산성 브레스를 토해낸 뒤 황금볏과일박쥐로 변신해서 축구공이 된 다음 스피릿요괴를 토해내고 죽었다. 거창한 계획 같은 걸 떠들 시간 없이 바쁘게 움직이다 죽었단 뜻이다.
사실 나도 지금 내가 뭔 소리를 하는지 잘 모르겠다. 델바나스는 대체 뭐 하던 새끼였던거지?
델바나스=지하국대적=산성 브레스녀=황금볏과일박쥐=축구공?
이 세상 조합이 아니지 않나?
잠깐만 엿봤는데도 어지러워. 네 머릿속은 지나치게 혼란스럽군.
“그건 네가 멍청해서 그래.”
헛소리. 그녀가 나에게 약속했다. 동족들을 모으게 해 주겠다고. 인간들이 차지한 영역을 넘기겠다고.
“그 새끼는 내가 죽였다!”
더 장단 맞춰줄 생각은 없었다.
왕좌에서 일어나 기다란 팔을 쭉 펼치는 대요괴의 다리를 공격했다.
큰 육체에 텔레파시, 독심술까지. 창작물 속 좆같은 악당 능력 top 3를 전부 뭉쳐놓은 듯한 존재. 반드시 죽여야 한다.
소식이 없어 먼저 신단을 차지했는데, 헛된 일이 됐구나.
끼이이이익!
갈리는 소리만 나고 닌자도가 박히지 않았다! 로열젤리를 1톤 정도 처먹으며 자랐는지 몸을 뒤덮은 껍질이 너무 단단했다.
그런 건 통하지 않는다. 난 날이 갈수록 강해지고 있으니...
“이런 뚱보벌레년. 가족들 젤리를 전부 뺏어 먹은 거냐?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을 네 형제자매는 어딨지? 뱃속?”
보아하니, 네가 우리 계획을 망친 거 같군.
여왕벌이 내 도발을 무시하고 두 쌍의 팔을 동시에 휘둘러 내리찍었다. 네 방향으로 찔러오는 게 상당히 매섭다.
샥!
빠른 속도와 정확도를 갖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닌자도로 흘렸다.
두 번 맞부딪혔을 뿐인데 뼈가 울린다. 엄마 말처럼 칼슘을 많이 먹었어야 했다.
제법이구나. 반응속도가 좋아.
팔을 내려치면서 끊임없이 머릿속으로 말을 거는 게 존나 성가시다. 정신을 혼란스럽게 하는 전술 같은데,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집중력이 떨어져서 일격을 허용했을 거다.
저 껍질을 뚫는다는 건 현재로선 힘들다. 유효타를 먹이려면 얼굴 부위를 노려야 하는데, 체급 차이가 너무 컸다.
“닌자포위진.”
20개 정도의 잔상을 만들어 움직였다. 시간을 끈 뒤 벽을 타고 올라가 고지를 선점해야 한다.
그래야 싸움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 이것마저 실패하면, 낙숫물이 바위 뚫듯이 껍질 부수기 노가다를 해야 했다.
특이한 재주를 부리는구나.
촤르르르!
여왕벌이 입으로 노란색 젤리를 뿜어내 잔상들을 공격했다.
끈적끈적한 젤리가 빠르게 굳더니 벽돌처럼 단단해졌다. 젤리에 적중당한 잔상들은 사라진 지 오래.
저 광역기를 정면으로 맞으면 호박 보석 속 벌레가 될 수도 있겠다 싶어 요리조리 움직였다.
실체가 없으면 위험하지 않지. 그냥 잔재주에 불과해.
확인을 마친 여왕벌이 다시 6m가 넘는 길이의 팔을 휘둘렀다.
붕!
대요괴의 손끝이 공기를 가르고 내 귀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남은 잔상은 다섯 개. 여왕벌이 다른 잔상에 눈이 팔렸을 때 닌자도를 칼집에 넣은 후 개구리처럼 뛰어올라 벽에 붙었다.
빨빨빨빨!
도마뱀처럼 벽을 타고 빠르게 기어올랐다. 이제 슬슬 녀석이 뒤돌아볼 때.
거기 있구나.
젤리를 내뿜으려 입을 벌리는 여왕벌의 등에 올라탔다.
“닌자 어부바.”
응애.
벌떡 일어나 닌자도를 뽑고 대요괴의 혐오스러운 머리통을 향해 나아갔다.
당황했는지 몸을 이리저리 뒤틀며 움직이는 여왕벌.
하지만 내 완벽한 균형감각을 뒤흔들 순 없었다.
“성형수 술.”
그녀의 반들반들한 얼굴이 내 닌자도를 맞이했다. 살짝 빗나가 깊게는 아니지만, 확실하게 베었다.
끼야아아악!
울부짖는 여왕벌의 비명을 음미하며 닌자도를 더 깊숙이 찔러넣으려고 할 때.
텅!
쏜살같이 움직인 거대한 더듬이에 맞아 튕겨 나갔다. 아 진짜. 왜 그런지 모르지만, 결정적인 순간마다 이 꼴이 난다.
부처여, 보고 계십니까?
전 언제나 최선을 다해 제육천마왕의 하수인들과 싸우는데 운이 따라주지 않는군요.
지금 어디서 뭘 하고 계시는 겁니까? 낮잠을 즐기고 계신 건 아니겠죠?
“켁!”
상념에 차 날아가다 바닥에 머리를 박았다.
밀랍이라 머리통이 박살 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너…. 감히…!
qeeeeeeee~!
극대노한 여왕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린다.
서, 성물을 흡수할 시간이 좀 더 있었다면…! 널 절대 곱게 죽이지 않겠다!
여왕벌의 손이날 들어 올렸다.
저항하고 싶지만, 그로기 상태에 빠져 있어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황.
델바나스를 죽이고, 계획을 망치고, 내 옥체(??)에 흠집을 내?
큰 흉터가 생긴 여왕벌의 얼굴이 날 향해 있었다.
이 몸이 직접 행차해 왕궁의 침입자들을 모조리 죽일 것이다. 전부 죽여 영양분으로 삼아주지. 넌 그 모든 광경을 팔다리가 잘린 채로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런 후에…!
그 좆같은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직도 눈을 까뒤집으며 저주를 퍼붓고 있는 여왕벌.
실전경험이 부족한가? 나였다면 바로 죽였을 텐데.
내 생각을 읽고 있지 않은 걸 보니 증오에 정신이 나간 게 확실하다.
부모한테도 맞아본 적이 없는 온실 속 잡초들이 꼭 이러더라.
“안돼…! 멈…. 춰…!”
정신이 나간 바보처럼 말하면서 두 팔을 마구잡이로 휘둘렀다.
벌써 정신이 나가면 안 되지.
내 소매 안에 비수가 하나 들어있다.
전력을 다한 내 진심 던지기를 미간에 맞으면 무사할 순 없을 거다.
재생능력이 있으려나? 있으면 어쩔 수 없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볼 뿐이다.
우선 그 팔을 잘라보도록 할까?
단 한 번의 기회.
모든 정신을 집중한 순간.
쾅!
벽이 부서지고, 붉은 갑옷의 여기사가 나타났다.
유검경?
“몰아치는 삭풍!”
붉은 기운이 여왕벌을 향해 쇄도했다.
넌…!
여왕벌의 고개가 돌아갔다.
아니 시발. 이러면 나가린데.
내 모든 비장함이 갑자기 쓰레기통에 처박혔다.
“닌자 낙법!”
일단 여왕벌의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너, 너는! 탈주닌자! 사람들 말이 맞았구나!”
유검경의 두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언뜻 보면 대요괴와 싸우고 있는 날 유검경이 도와주러 온 거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다.
둘 다 날 죽이려고 하는 상황.
“어쩔 수 없군. 이번만 임시동맹이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묻어가야 한다.
닌자는 살고 싶다.
다행히 여왕벌은 우리가 동맹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지 공격을 나눠서 퍼부었다.
“난 아직 네 녀석과…!”
“그런 시시콜콜한 건 나중에 얘기하고…. 온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