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 45화. 구원의 닌자 (8)
* * *
상록수 마을 근처의 들판.
문자 그대로 허허벌판인 그곳에서 파란 머리의 여자, 오르페가 열심히 창을 휘두르고 있었다.
“핫! 합!”
상대 없이 허공을 찌르는 창끝이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 빛났다.
아니, 상대는 있었다. 오르페의 머릿속에만 존재했을 뿐이지.
교관, 용족, 하이너, 도적, 마지막으로 로빈.
크기도, 능력도, 방식도 제각각인 상대들을 가상으로 그려내며 계속해서 창을 휘둘렀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훈련을 멈춘 오르페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바윗돌에 걸터앉았다.
“후.”
간만에 온몸의 근육을 혹사했더니 노곤했다.
오르페가 수통의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살짝 젖혔다.
땀으로 흠뻑 젖은 옷이 살짝 말려 올라가 하얗고 탄탄한 복근이 드러났다.
“이제 쉬는 건가?”
깜짝 놀란 오르페가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붉은 갑옷을 입은 장신의 여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로빈과 그녀의 정체를 꼬치꼬치 캐묻던, 홍염룡 기사단의 케이트였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죠?”
“오래는 안됐어. 로빈이었나? 그 모험가가 없으니 아주 심심해 보이는군. 연인 사이인가?”
“사적인 부분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럼 연인 사이로 생각할게. 젊은 나이에 벌써 코가 꿰이다니, 안됐어. 더 좋은 남자를 골라잡을 수도 있었을 텐데.”
딱딱한 말투를 버린 케이트가 입꼬리를 올리고 살짝 웃었다. 상당히 비열해 보이는 미소.
일말의 동요 없이 그녀를 바라보던 오르페가 몸을 일으키더니, 수통에 남아있는 물을 자신의 머리에 전부 부었다.
“깜짝이야.”
그 갑작스러운 행동에 케이트가 살짝 주춤했다. 몸을 그녀 쪽으로 완전히 돌린 오르페가 입을 열었다.
“지금 근무시간 아닌가요?”
“아닌데? 지금은 개인 휴식 시간이야. 온종일 일하는 사람이 세상에 어딨니?”
“그 홍염룡 기사단이니 다를까 했죠. 제가 괜한 기대를 한 거 같네요.”
“하, 너무 당돌한 거 아냐? 힘센 친구가 많은가 봐?”
“글쎄요. 의존적인 성격은 아니라서요.”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그녀들이 서로를 노려봤다. 잠깐 기묘한 정적이 흘렀다.
“대련 상대가 필요해? 내가 좀 도와줄 수 있을 거 같은데.”
먼저 입을 연 건 케이트였다.
“괜찮습니다. 케이트 경. 마음만 받을게요.”
“너무 튕기진 말자고. 방금 건 그냥 인사였어.”
“인사를 매섭게 하시는군요.”
“내가 좀 그런 편이야. 아무튼, 어때? 바보같이 허공에 창질하는 것보다 재밌을 거야. 장담할게.”
“원하시는 게 있나요? 전 드릴 게 별로 없어요. 예전에 말했다시피, 장비 사는 데 돈을 다 썼거든요.”
“엄청 까칠하네. 그렇게 경계 안 해도 돼. 널 싫어하는 건 아니야. 그냥…. 상황이 그랬던 거지. 조건은 없어. 네가 열심히 하길래 나도 마음이 끌린 거니까. 그냥 대련하고 그걸로 끝. 괜찮지 않아?”
케이트가 의외의 일면을 보였다. 시니컬하긴 하지만 그녀 또한 홍염룡 기사단의 일원.
정의감과 신념 없이는 버틸 수 없는 자리에 앉은, 존중받아 마땅한 사람이다.
오르페가 그녀를 대하던 태도를 바꿨다.
“그렇다면, 케이트 경. 한 수 부탁드립니다.”
어렸을 때부터 살인적인 훈련을 받고 자란 기사와의 대련. 얻을 게 한둘이 아닐 것이다.
오르페가 다시 창을 들어 올렸다.
“갑옷도 입고 방패도 들어. 제대로 해봐야지. 난 인정사정없거든.”
케이트가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멋진 미소였다.
***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갈 문제가…!”
“텔라파시와 독심술 능력을 갖추고 있는 요괴니, 생각을 짧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다니, 이해할 수가 없다.
유검경의 뇌는 근육으로 가득 찬 게 아닐까?
“녀석의 껍질이 두껍다! 쉽게 벨 수 없으니 주의해!”
유검경의 헛소리를 간단하게 씹어주며 여왕벌의 손톱을 피했다.
녀석이 나보다 유검경을 더 주의 깊게 살피고 있어서인지 아까보다 속도가 느렸다.
헛소리는 짜증 나지만, 유검경 덕분에 여왕벌의 집중공세를 받는 건 피했으니 용서하기로 했다. 그녀도 친절하게 꿀팁을 주는 나에게 감사해야 한다.
아직도 여유를 부리다니! 후회하게 해주마!
공격을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나와 영혼 포식자로 막아내는 유검경에게 겁먹은 여왕벌이 몇 발자국 뒤로 빠지더니 젤리 브레스를 뿜어냈다.
까뒤집었던 눈깔이 원래대로 돌아온 걸 보니 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는 거 같았다.
좀 더 미쳐 날뛰기를 바랬는데. 역시 세상일은 마음대로 안 되는 법이다.
촤르르르!
“접촉한 순간 바로 굳어버리는 벽돌 젤리다! 맞으면 조각상이 되는 거야!”
“하나하나 시끄럽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을 빛내며 피하는 유검경.
부드러운 검이란 칭호는 딱지치기로 딴 게 아니라는 듯 동작 하나하나가 자연스럽고 우아했다. 지구의 발레리나가 연상되는 움직임.
조금 비틀거리는 느낌도 들었는데, 아무래도 지쳐서 그런 거 같았다. 여기까지 오면서 꿀벌요괴를 얼마나 잡은 걸까?
“성가시긴. 우선 너부터 처리해주마!”
누구 맘대로!
이제야 할 마음이 들었는지 크게 외친 유검경이 여왕벌의 심장을 향해 도약했다.
그 폭발적인 점프력에 놀란 여왕벌이 한 쌍의 손으로 가슴을 가리고 나머지 손을 휘둘러 견제했다. 유검경이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견제공격을 피하고 회수되는 여왕벌의 손목을 베었다.
큭!
녀석의 단단한 껍질에 흠집이 생겼다. 내 공격은 저렇게 안 통하던데, 솔직히 템빨이다.
어쨌든 승산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때를 기회 삼아 멀리 떨어진 닌자도를 주워들었다.
인간의 전사여, 꽤 하는구나.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위풍당당한 말과는 다르게 잔뜩 웅크린 여왕벌이 몸에서 빛을 내뿜었다.
강렬한 무지개색 빛에 유검경이 눈을 가렸다.
“저건 뭐지?”
“내가 트리위키도 아닌데 어떻게 알겠냐.”
처음 보는 패턴에 나도 당황스럽다. 몸이 단단해지기라도 하는 건가?
자폭? 진화? 미소녀화? 변수가 너무 많아 특정하기가 너무 힘들다.
일단 구석으로 피했다. 조심해서 나쁜 건 없으니까.
잠시 후, 빛나던 몸에서 이상한 가루가 쏟아져 나왔다. 소독차가 살충약을 대량살포하는 모습이 연상된다. 숨을 크게 들이쉰 후 격렬한 전투 때문에 살짝 내려가 있던 복면을 위로 올렸다. 요괴가 뿌리는 가루면 인체에 해로울 게 분명하다.
“큭. 마비독인가...”
“아니, 뒤로 안 빠지고 뭐 하는데.”
유검경이 피할 생각도 못 한 채 가루를 들이킨 거 같다. 돌겠네 진짜.
“대단한 수준은 아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견뎌낼 수 있다.”
“완전히 정신이 나가버렸네.”
누군가는 이 여자에게 등짝 스매시를 먹여야 한다.
마나를 사용해 마비독을 정화한 거 같은데, 이게 말로는 쉬워 보여도 마나 소모가 큰 기술이다. 괜한 힘 낭비라고 볼 수 있다.
“비릭스의 여왕이여! 고작 이 정도의 기술로 자신만만하게 외치다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건방진!
분노한 여왕벌이 두 쌍의 팔을 내리치자 유검경이 한 마리 치타처럼 날렵하게 움직이며 피했다. 지친 상태였음에도 동작에 막힘이 없었다.
그 움직임을 천천히 눈에 새겼다. 나도 저렇게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
“울부짖어라, 영혼 포식자!”
유검경이 외치자 그녀의 레이피어가 붉은빛으로 휩싸이면서 요동쳤다.
와아아아아앙쇼오오이이이이!
끼야아악!
그 소음에 여왕벌이 몸서리쳤다. 이상하게도 같은 장소에 있던 나에겐 별 데미지가 없었다.
요괴에게만 유효타가 들어가는 기술인가?
어쨌든 이때가 기회였다. 벽에 달라붙은 뒤 뜬그림자로 은신했다.
얼굴, 녀석의 얼굴을 노려야 한다.
“하앗!”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유검경이 네 팔을 벌리고 비명을 지르는 여왕벌의 품속에 파고들어 가 심장을 찔렀다. 예리하고 정확한 일격.
역시, 이것만 노리고 있었구나.
이었지만, 이번에도 흠집만 남기고 말았다. 자세히 보니 강화라도 된 듯 가슴 부분의 껍질만 색깔이 진했다. 몸을 웅크렸을 때 강화한 거 같다.
“이런…!”
강조되고 반복되는 단단함은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법이다.
유검경이 혀를 차며 얼굴을 찡그렸다. 이번 공격에 모든 걸 걸고 찔렀는지 가쁘게 숨을 내쉬는 그녀.
지원하고 싶었지만, 나도 마지막 한 방을 노리고 있었으므로 함부로 나설 수 없었다.
멍청한 년! 네 생각을 읽고 있거늘!
여왕벌이 기세가 꺾인 유검경의 어깨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이번엔 피하지 못한 유검경.
강력하기로 소문난 칠검경이라도 누적된 피로를 이길 순 없었다.
날카로운 돌기가 손톱처럼 자라난 손이 유검경의 어깨를 꿰뚫었다.
“끄으윽…”
피를 쏟으며 주저앉는 유검경. 당장 달려 나가 도와주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아직이다. 조금만 더. 조심스럽게 천장까지 올라갔다.
이 몸이 직접 아이들에게 지원요청을 몇 번이나 보냈거늘. 아무도 오지 않는구나. 네년이 전부 죽인 건가? 이제 대가를 치를 시간이다.
유검경을 붙잡은 여왕벌이 그녀의 왼발을 붙잡고 거꾸로 들어 올렸다.
“엿이나 먹어라…. 몬스터!”
피를 토하면서도 저주를 퍼붓는 유검경.
죽음의 위기에 직면한 상태에서도 떳떳한 모습이 전사의 귀감다웠다.
하나부터 열까지 센 다음.
“와자뵷~!!”
여왕벌의 얼굴을 목표로 내 몸을 조준한 후 발사했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 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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