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 46화. 구원의 닌자 (9)
* * *
아니?
당황한 여왕벌이 손을 움직이기 위해 유검경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하지만 너무 늦었다. 난 이미 녀석의 코앞까지 와 있었으니까.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박히기 1초 전.
이익!
어떻게든 살기 위해 더듬이 한 쌍을 움직이는 여왕벌.
아까 전 비장의 수를 막아낸 그 공격이다.
난 똑같은 패턴에 두 번 당해주는 멍청이가 아니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박히기 0.5초 전.
타탓!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킨 후 발로 그것들을 차 냈다. 속도가 좀 줄었지만, 아직 괜찮다.
대륙간 탄도 미사일이 박히기 0.2초 전.
멋지게 빙글빙글 도는 중 여왕벌과 눈이 마주쳤고.
“외과의사 쉔노빈.”
내 닌자도가 불을 뿜었다. 진짜로 불을 뿜은 게 아니라 그런 느낌의 이펙트를 연상시킬 만큼 멋지게 내리쳤다는 뜻이다.
피각! 하고 여왕벌의 미간에 정확히 꽂힌 닌자도.
아아아아아!
날 뭉개기 위해 날아오던 요괴의 손이 힘 빠진 풍선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그 어떤 요괴라도 닌자도에 박히면 꼼짝 못 하는 법.
“선거 포스터 가르기.”
더욱더 세게 힘을 줘서 턱 밑까지 내려찍었다.
여왕벌의 얼굴이 잘 익은 수박처럼 반으로 갈라졌다.
우리 마을을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 내가 찢어왔던 무수한 정치인들의 얼굴처럼.
…
쿠웅!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허물어지는 여왕벌.
그녀가 지금까지 쳐먹은 수많은 로열젤리도 죽음을 막지는 못했다.
꼬우면 재생능력까지 얻었어야지.
“악은 사라졌다.”
숨이 끊어진 여왕벌의 뒷다리가 간헐적으로 떨리다 멈췄다.
이로써 길고 장렬한 전투가 막을 내렸다.
닌자도를 한 번 털어내고 칼집에 넣은 후 성물을 찾기 위해 발걸음을 돌린 순간.
“아일린의 원수!”
유검경이 왼쪽 어깨에 피를 질질 흘리면서 날 향해 영혼 포식자를 휘둘렀다.
이게 은혜를 원수를 갚는다는 건가? 살려줬는데 이런 취급이라니.
“다쳤으면 약 먹고 자야지. 붉은 섬광이나 불러.”
“그 입 닥쳐라!”
무시무시한 태세와는 다르게 한 템포 느린 움직임.
쉽게 피하고 그녀의 손에서 영혼 포식자를 빼앗았다.
지칠 대로 지친 상태에서 큰 상처까지 입은 유검경은 내 상대가 아니다.
“아앗!”
“진정할 때까지 이건 압수야.”
날름 가져가고 싶었지만, 탈주닌자는 정의로운 사람의 물건을 빼앗지 않는다.
대충 겁만 주고 돌려보낼 생각이다.
“돌려줘라!”
유검경이 콧김을 내뿜으며 달려들었다. 무기가 없어서 그런지 갑자기 속도가 빨라졌다.
붕붕붕붕
오른팔로만 공격하는데 동작이 끊임없이 이어져서 피하고만 있기 힘들었다.
잘못하단 한 대 맞을 수 있겠다 싶어 영혼 포식자를 저 멀리 던지고 복싱 자세를 취했다.
“아줌마. 이제 병원으로 가라니까. 다 끝났다고.”
“아, 아줌마?! 죽어!!!”
예민한 반응을 보이며 더 빠르게 주먹을 날리는 유검경.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주먹질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네 녀석!”
금나수(주먹을 손으로 잡는 기술)로 잡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된다.
다쳐서 그렇지 기술로는 나보다 아래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때려눕혀야 이 난장판이 끝나지 않을까.
“후,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왁!”
멋지게 대사 치려고 했는데 유검경의 잽을 피하느라 자꾸 말이 끊겼다.
시발 진짜 폼 안 살게.
“닌자 펀치!”
튼튼한 칠검경이니까 맘껏 때려도 되겠지.
한치의 타협과 양보 없이 유검경의 배를 향해 펀치를 날렸다.
임산부가 아니니까 정치적인 문제는 없다.
“헛수작!”
“끄악!”
왼쪽 팔꿈치로 펀치를 막아낸 유검경이 내 코를 때렸다.
액체가 밑으로 뚝뚝 떨어졌는데, 이런 씨. 코피잖아?
“보자 보자 하니까 이 노처녀가!”
“살인마 녀석! 복면과 두건을 벗고 정체를 드러내라!”
뭐가 그렇게 잘났다고 우렁차게 소리치는 걸까.
아일린같은 쓰레기를 옹호하면서 착하고 정의로운 날 때리다니, 아무래도 참교육을 해주고 가야 할 거 같다.
“그렇게 맞고 싶다면 엉망진창으로 때려주마!”
“오냐! 어디 한번 해봐라!”
투닥투닥!
“백보신권!”
경계를 사기 위해 적당히 강해 보이는 기술을 외치며 주먹을 휘둘렀다.
“뭐라? 그게 무슨…!”
예상대로 깜짝 놀라는 유검경. 아쉽게도 공격이 살짝 빗나갔다.
“나한십팔장!”
“...고속질풍 때리기!”
“태을섬수공!”
“몰아치는 권풍!”
“운룡대팔식!”
“홍염의 절규!”
“무구정광대다라니경!”
“그 기술 이름은 이상하다!”
이제 책에서 읽은 기술 이름도 다 떨어졌다.
적당히 몇 대 쥐어박고 끝내려고 했는데, 쉽지 않다.
하지만 난 노련한 탈주닌자. 천천히 방어하면서 기회를 노렸다.
“탈주닌자! 뒷걸음치지 말고 덤벼봐라!”
밑에서. 옆에서. 위에서. 아래서 들어오는 공격. 전부 막아낸 순간 찾아오는 짧은 기회.
의기양양해진 유검경이 결정타를 넣기 위해 동작을 크게 벌릴 때.
“제비 다리 부러뜨리기.”
이름하여 놀부신권. 살짝 몸을 비틀어 피한 뒤 발을 걸어 넘어뜨렸다.
한 손이 잘린 델라미온처럼 균형을 못 잡고 쉽게 넘어지는 유검경.
“크헉…!”
뒤통수를 강하게 찧은 유검경이 대자로 뻗었다.
투구도 쓰고 있고, 기본 신체능력도 뛰어나서 뇌진탕까지는 안 갈 거다.
“이게 너와 나의 눈높이다.”
이제 진짜 시간이 없다. 다른 곳에서 싸우고 있었던 전사들이 언제 이곳까지 올지 모른다.
출구로 나가기 위해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브웩.
빳빳하게 굳은 여왕벌의 입에서 금색 구슬이 흘러나왔다.
이 새끼가 성물을 배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고?
처음부터 눈앞에 성물이 있던 거야? 시발 진짜 어이가 없네.
“운이 좋군.”
침 묻은 물건을 만지기는 싫었기에 소매로 몇 번 닦아내고 주워들었다.
아무튼 미션 클리어다. 이제 이걸 야인족들에게 넘기고 아무것도 모르는 척 상록수 마을로 돌아가 쉬면 된다.
“멈…. 춰…!”
바닥에 뻗어 가쁜 숨을 몰아쉬는 유검경의 입술이 파랗다.
전투에 집중하느라 지혈을 늦게 했나?
솔직히 자기 탓이다. 죽진 않을 거 같아 건드리지 않기로 했다.
“사람들…. 사람들은 왜 구한 거지?”
“사람들?”
상황상 밥이랑 친구들 같다. 이유는 뻔하다.
“난 무고한 백성을 위해 싸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넌 아일린을 죽였다!”
“걔는 쌍년이었다. 사이좋은 부녀에게 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려고 했지. 재미를 위해서.”
“거짓말! 아일린은 그런 아이가 아니다!”
“유인원처럼 굴지 마라. 진실을 받아들여.”
“말이 안통하는군...그냥 죽여라.”
“싫다.”
“아일린을 죽였듯이 나도 죽여라!”
유검경이 결연한 표정으로 외쳤다. 다 뒤져 가면서 저렇게 소리치다니.
얼마나 친한 사이였길래 이렇게 분노하는 걸까. 애정은 진실마저 가리는 법이다.
“너는 사무라이가 아니다.”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뒤돌아보지 않고 폼나게 보스룸을 벗어났다.
가기 전 로열젤리가 남아있지 않을까 해서 방을 좀 뒤지긴 했지만, 정말 짧게 했다.
먹으면 파워 업 이벤트가 발생했을 수도 있는데. 아깝다.
***
“이, 이거 맞다! 정말 고맙다! 탈주닌자! 고맙다!”
“우호~!”
“마코 이스타코!”
산세리프가 성물을 끌어안고 부족원들과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벌집에서 꽤 떨어진 거리라 듣는 사람은 없었다.
“어, 어떻게 보상하면? 모르겠다.”
“웃으면 된다고 생각해.”
보상은 필요 없다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못 알아듣는 거 같다.
야만인이라 그런 거니 가볍게 넘어가기로 했다.
“난 이제 가볼게. 행복하게 잘 살으렴.”
손을 살짝 휘저어준 다음에 몸을 돌렸다. 닌자는 등짝이 멋있어야 한다.
“잠깐!”
산세리프가 내 어깨를 잡아 멈춰 세웠다.
필요 없다고 계속 말했는데도 이렇게 나오면 귀찮은데.
따끔하게 말해주려고 고개를 돌렸다.
“야.”
“내 이름, 산세리프. 갈색바위 부족의 제사장. 기억해라.”
“기억은 무슨. 간다고.”
“필요할 때. 언제든지 돕겠다.”
“별 도움이 안 될 거 같은데.”
“성물 얻었다. 이제 강해진다. 어머니처럼.”
그렇다고 한다.
“알았어. 믿을 테니까 이만 가봐. 난 바쁜 사람이야.”
“부족의 아이, 그 아이의 아이. 네 이름 계속해서 전해질 거다. 대가 없이 싸워준 영웅으로.”
“그것참 고맙네.”
“그들이 널 추앙할 거다. 기도할 거다. 진심이 담긴 기도, 강력한 힘 가지고 있다.”
“계속 말할 생각이야?”
“지금 내가 한 말들. 가볍지 않다. 제사장의 말, 초자연적인 힘 가지고 있다.”
“힘세서 좋겠다. 진짜 가볼게.”
옷 갈아입을 시간도 아까울 때다. 부족원들의 인사를 대충대충 받고 달려 나갔다.
“잊지 마라! 내 이름, 산세리프! 갈색바위 부족의 제사장! 다른 부족을 만나면 전해라! 우리가 널 돕겠다!”
뭐라고 말한 거 같은데 잘 안 들렸다. 달리느라 배경이 휙휙 지나가는 소리만 들린다.
다행히 땅바닥에 묻는 배낭은 그대로였다. 흙냄새가 좀 심하게 나긴 했지만, 두더지 요괴가 가져가는 것보단 낫다.
“떠돌이 검객 로빈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슬슬 배고프다. 돌아가서 고기를 잔뜩 먹을 생각에 침이 질질 흘렀다.
오르페, 디아나. 오늘은 오빠가 쏜다.
트리보는 입이 없으니까 꺼져 있어.
***
“이 굼벵이 같은 새끼들. 아직도 못 찾은 건가?”
벨더가드가 팔짱을 낀 채 벌집을 응시했다. 몇십 분째 아무 소식도 없이 고요하다.
그의 말 상대를 하고 있던 갱생대원이 살며시 물었다.
“시간이 오래 걸리긴 하는군요. 제가 한 번 가볼까요?”
“그래. 5분 내로 돌아와 보고하도록. 난 혼자 남겨지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알겠습니다. 그럼.”
벨더가드가 멀어지는 갱생대원의 등을 바라보면서 손가락을 벌벌 떨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몸종이라도 끌고 왔어야 했다.
지이이잉
“어어?”
갱생대원이 벌집 안으로 들어간 순간, 벨더가드의 두 눈이 붉은빛으로 가득 찼다.
“아, 3급 직원인 벨더가드 사무초입니다. 과거를 통해 배우고, 현재를 위해 봉사하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겠습니다. 마탑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벨더가드의 두 눈이 하늘을 향했다.
“반응이 끊겼다니요? 제가 지금 그쪽에 와 있는데… 상호작용이 멈춘 겁니까?”
그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해할 수 없군요. 감시자들 짓일까요?”
지이이잉
“알겠습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다시 왕족을 찾는 것에 집중하겠습니다. 저보단 절검경이 낫겠지만요. 언제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십시오.”
잠시 후, 벨더가드의 눈이 다시 제 색깔을 찾았다.
다시 벌집을 확인하니 점액으로 뒤덮인 갱생대원들이 나오고 있었다.
“벨더가드님! 유검경께서 중상을 입었습니다!”
“뭐라고?”
정말 환장할 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