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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47화 (47/119)

〈 47화 〉 47화. 구원의 닌자 (10)

* * *

상록수 마을에 도착하고 나서는 뭐, 일사천리였다.

“어제저녁부터 지금까지 샅샅이 살펴본 결과, 야인족의 거주지를 발견했습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녀석들은 이미 자리를 뜬 상태더군요. 안심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야인족들은 내 명령에 따라 신단으로 가기 전 살림살이를 전부 챙기고 떠났다.

원하던 성물도 얻었으니 다시 그곳에 갈 일은 없을 거다.

“그렇군요… 다행이네요. 장소는 그거에 표시하신 건가요?”

마을 대표 에이미가 내가 오른손에 쥐고 있던 종이를 가리켰다.

산세리프가 간단히 그려준 지도다. 내가 한 것처럼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건넸다.

“맞습니다. 여기 받으시죠. 시간 나실 때 홍염룡 기사단이나 검은 옷 전사들이랑 가서 확인해 보세요.”

“검은 옷 전사들? 아, 갱생대를 말씀하시는 거군요.”

걔네 이름이 갱생대였구나.

뜬그림자로 벌집을 벗어날 때 이동하는 걸 잠깐 봤는데, 눈이 전부 죽어 있는 게 인상 깊었다.

용맹한 전사들이 꿀벌요괴와 싸우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라 좀 실망했었지.

“이제 의뢰는 끝난 거죠? 집에 가서 좀 쉬고 싶군요.”

“피곤하실 텐데 너무 붙잡고 있었네요. 알겠습니다. 내일쯤에 마차가 들어온다고 해요. 가실 때까지 편안하게 계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올 것이 왔구나. 벌써 네오­솔리트론에 도착한 기분이다.

집 살 돈은 충분하려나? 오르페가 재산관리를 잘했으니 문제없겠지?

자택 없는 떠돌이 생활은 이제 지쳤다.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장비들을 보관할 공간이 필요하다.

“내 집 마련의 꿈.”

정착 생활의 기대감에 부푼 채로 여관에 도착했다.

어느 방부터 들어갈지 고민하다 여자방으로 들어갔다. 고철로봇인 트리보보다 오르페와 디아나의 리액션이 좋지 않을까?

문을 두드리고 여관주인에게 받은 열쇠를 이용해 안에 들어갔다.

“아빠 왔다.”

디아나는 오르페 선생님께 글자를 배우고 있었고, 트리보는 방구석에서 웅크려 있었다.

트리보는 왜 여기 있지? 로봇이라 안심할 수 있다는 건가?

남자 사람 친구에 최적화된 형태긴 하다.

“로빈.”

오르페가 살짝 웃으며 반갑게 맞아줬다. 얼음마녀 오르페가 살짝이라도 웃는다는 건 어마어마하게 반갑다는 뜻이다.

볼때기에 살이 토실토실하게 오른 디아나는 딱밤이 그리웠는지 소위 말하는 띠꺼운 표정을 한 채 날 째려봤다.

“...우리 아빠 아니에요.”

“나도 알아 새꺄.”

그걸 꼭 말로 해야 했을까? 이건 공감 능력이 부족하다는 증거다.

사람이 기분 좋게 들어왔으면 장단을 맞춰 주면서 반갑게 맞아줘야지.

몰상식한 요괴 꼬맹이라 봐주기로 했다. 참을 인.

[야인족은 어떻게 했나? ...다 죽인 건가?]

트리보 이 새끼는 날 무슨 살인병기로 생각하는 거 같다.

솔직히 그게 맞다.

“그럴 생각으로 갔는데, 막상 만나보니 내 생각과는 다르더라고.”

“어떻게 된 거야? 자세히 듣고 싶어.”

“궁금하지? 궁금해 죽겠지?”

“...그래. 아주 많이 궁금해.”

조금이라도 장단을 맞춰주는 건 베스트 프렌드인 오르페밖에 없다.

날 제외한 일행 중 유일한 ‘사람’이라 그런가? 역시 사람만이 희망이다.

“그 이야기를 하려면 우선 내가 닌자슈트로 갈아입었을 때부터 설명해야 하는데...”

위치 더 베이비­슬레이어. 불쌍한 야인족. 바쁜 꿀벌들. 성물을 품은 여왕벌. 유검경 난입. 영혼을 건 사투 끝에 승리한 탈주닌자.

신나게 말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이었다. 디아나는 또 잠자고 있네.

코까지 골았으면 바로 꿀밤이었다.

[성물...산 정령과 계약해 얻은 권능을 그렇게 부르는 건가. 흥미롭군.]

산 정령이라. 예전에 트리보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었지.

“비릭스 여왕이랑 유검경 둘 다 위협적인 상대였을 텐데. 운이 정말 좋았어.”

“운이 아니라 실력이라고 해줄래?”

운도 실력의 일부지만, 실력이라는 말이 더 듣기 좋다.

[야인족과 소통해, 성물을 되찾아 주고, 저주받은 이계인들에게 납치당한 사람들까지 구해내다니.]

“내가 언제나 하는 일이지. 유검경과의 전면전에서 승리한 것도 포함시켜.”

신입생 트리보도 이제 내가 정의로운 탈주닌자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 거 같다.

“제가 말했었죠? 바뀔 필요가 없다고.”

자기 일처럼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오르페.

바꾼다고? 뭘?

물어보려 했는데 트리보가 먼저 선수를 쳤다.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믿고 싶다.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나 없을 때 무슨 말이 오간 걸까.

꼬르르륵.

중요한 내용은 아니겠지. 일단 밥부터 먹어야겠다.

점심도 거르고 싸웠더니 너무 배고프다.

“고기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고기요?!”

에이미에게 받은 금화를 흔든 순간, 번쩍 일어난 디아나가 두 눈을 빛냈다.

이런 얌체 같은 행동은 누가 가르친 걸까. 라미나, 혹시 너니?

결정했다. 내일 네오­솔리트론으로 출발하기 전까지 ‘인간수업’ 풀 강의다.

도덕과 예절, 도리를 뇌 속에 강제로 쑤셔 박아줘야겠다.

***

내 계획은 다음 날 아침 찾아온 케이트의 방해로 무산됐다.

계획이 있으면 뭐 하나. 혼돈으로 가득 찬 세계는 받아들여 주지 않는데.

“로빈과 오르페. 유검경께서 너희 둘을 보고 싶어 하신다.”

꿀벌요괴를 무찌른 유검경이 마을로 돌아왔다는 소식은 저녁 식사 도중 들었다.

왜 하필 가려는 날에 붙잡은 걸까? 내 정체를 알아챈 건 아니겠지?

“가자. 별일 아닐 거야.”

그 걱정을 읽었는지, 오르페가 살며시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스킨십 같은 건 안 하는 성격이었던 거 같은데. 하루 사이에 사람이 바뀐 거 같다.

파워업 이벤트를 받은 게 아닐까?

“뭐, 그러죠. 갑시다.”

케이트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가 마을 바깥 임시거점의 천막에 도착했다.

“왔는가.”

왼쪽 어깨에 붕대를 한 유검경이 침대에 누워 있었다.

다크서클이 연하게 생긴 게 잠을 설친 것 같다. 패배의 고통은 쓰라린 법.

“단장님, 부단장님. 전 이제 가보겠습니다.”

“케이트, 수고했다.”

“들어가 봐.”

침대 옆의 의자에는 부단장이라 불린 여자가 앉아 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다.

냉정 침착해 보이는 게 오르페랑 같은 과 같다.

“로빈. 마을을 위해 힘써줬군. 아직 확인은 안 됐지만, 난 사실이라 믿고 있다. 고맙다. 마을 사람들이 어제 편하게 잘 수 있었던 건 전부 네 덕분이다.”

부단장의 부축을 받아 허리를 꼿꼿이 세운 유검경이 입을 열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래도 감사 인사를 받으니 기쁘군요.”

“솔직하군. 마음에 들어. 남자라서 우리 기사단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게 정말 아쉬워. 어쩔 수 없지. ...오르페.”

초췌해진 유검경의 시선이 오르페를 향했다.

“케이트와 대련을 했다고 들었다.”

“그렇습니다.”

파워 업 이벤트. 진짜네.

“기사훈련을 받지 않았음에도 노련한 움직임과 판단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말하며 그 깐깐한 케이트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네 칭찬을 했다고 하더군.”

“그날 몸 상태가 좋았을 뿐, 과찬입니다.”

“우리 기사단원은 과찬하지 않는다. 모험가 오르페.”

오르페를 천천히 살펴보던 유검경이 갑자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기사가 되어, 홍염룡 기사단에서 활약하지 않겠나?”

갑작스러운 스카우트 제의에 오르페의 눈이 약간 커졌다. 하긴, 오르페 정도면 받을 만 하다.

성장 중인 지금도 어중이떠중이 기사는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는 수준이니.

오르페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췄다.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 거 같다.

할 말이 없어서 그냥 어깨를 으쓱여줬다.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해주고 싶다.

난 원래 가는 사람 붙잡는 스타일이 아니다.

“정식으로 기사가 되려면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훈련으로 드는 비용은 우리가 다 해결할 수 있다. 의지만 있으면 된다. 어떻게 생각하나?”

생각에 빠진 오르페가 눈을 감았다. 두뇌 풀 가동인가.

“...”

몇 초가 지났을까. 그녀의 눈과 입이 동시에 열렸다.

“저에게 맞지 않는 자리니, 거절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유검경 따까리보단 내 따까리가 맘에 드는 모양.

더 강한 사람에게 배우고 싶은 건가? 그렇다면 옳은 판단이다.

시간 날 때 유검경을 한 방에 보내버린 놀부신권을 전수해 줘야겠다.

“...어쩔 수 없지. 강요가 아니었으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마라.”

유검경이 쓴웃음을 지으며 부단장이 갖다준 컵을 한 손으로 들어 올렸다.

한입에 물을 전부 들이켠 후 다시 입을 여는 유검경.

“아가사 검블턴. 내 이름이다. 둘 다 기억하도록.”

“읍.”

내 이름은 신노빈이다. 라는 말이 혀끝까지 올라와서 입을 틀어막았다.

어머니께 가정교육을 너무 잘 받은 부작용이다.

어머니는 잘 계실까?

­ 그래…. 우리 아들 힘내…. 엄마는 믿어…. 오늘은 꼭 일자리 찾아보자…. 항상 응원한단다…

잘 지내시겠지? 그럴 거라 믿는다.

“서로 소신 있게 살다 보면 다시 만날 날이 오겠지. 그때를 기다리마. 슬슬 피곤하군. 가봐도 좋다.”

적당히 멋진 말을 뱉은 유검경이 천천히 몸을 뉘었다.

좀 측은하네. 빨리 지혈하고 쓰러졌어야지 왜깝쳐서는.

하여튼 내 잘못은 아니다.

오르페랑 같이 천막을 벗어나 여관으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어요~!”

보따리를 들쳐멘 무카가 우리를 맞이했다. 무카의 존재감이 너무 커서 옆의 트리보와 디아나가 상대적으로 작아 보였다.

“마차는 제가 잡아놨어요~! 짐은 트리보 씨가 다 챙겼으니~! 바로 출발하죠~!”

“참 잘했어요.”

그렇게 4인용 마차에 몸을 맡겼다.

깡통인 트리보가 무거워 마차가 못 가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움직였다.

[궁금한가? 무게는 어느 정도 조절이 가능하다. 내 몸은 특수한 재...]

“누가 물어봤어? 안 궁금하니까 닥쳐.”

[알았다.]

소음을 견디지 못한 다른 로봇들이 트리보를 지하에 버리고 간 게 아니었을까.

이러면 트리보가 기억상실증에 걸린 이유도 설명이 된다. 너무나 충격적인 기억이라 강제로 잊게 한 거지.

“친구 사이에 너무하는 거 아닌가요~?”

“욕먹는 거 좋아하는 앱니다. 그렇고 그런 성향인 거죠.”

“와~!”

뭐가 그렇게 재밌는지 낄낄대는 무카. 저러다 자연스럽게 노래를 부를 거 같아 두렵다.

무카의 눈을 피해 다른 일행들을 살폈다.

“...코.”

디아나는 오르페의 무릎 위에 앉아 자고 있었다. 이렇게 많이 자는 건 건강에 좋지 않은데.

잠꾸러기는 돌연변이 닌자 공룡이 될 수 없는 법.

‘살짝’ 꼬집기 위해 손을 뻗었는데, 디아나의 몸에 닿기도 전에 오르페가 마주 잡았다.

“다 잘 될 거야.”

그렇게 말하며 맞잡은 손을 살살 흔드는 오르페.

“당연하지.”

악수하려고 손을 뻗은 건 아니었지만, 그녀가 부끄러워 할까 봐 같이 흔들어줬다.

배려심 넘치는 스윗닌자.

“드디어 네오­솔리트론에 가는군요~! 신나게 한 곡조 뽑아볼까요~?”

“디아나가 자고 있습니다. 진정하세요.”

어쨌든 이제 간다. 네오­솔리트론으로.

무고한 백성들을 섬기며 수호하는 탈주닌자의 모험은 계속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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