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48화 (48/119)

〈 48화 〉 48화. 반가운 얼굴들 (1)

* * *

로빈과 오르페가 떠난 홍염룡 기사단의 지휘실.

“끙...”

침대에 누워 앓는 소리를 내는 유검경, 아가사를 지켜보던 레오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신나게 얻어터지고 오셨군요.”

“얻어터지다니!”

발끈한 아가사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시뻘게진 얼굴이 홍당무 같다.

“얻어터진 게 아니다! 비릭스 병사 수백 마리를 처리한 후 녀석들이랑 돌아가며 싸워서 그런 거다!”

“아까랑 또 말이 다르네요. 비릭스 여왕이 이상할 정도로 강해 잠시 협력했다고 하시지 않았나요?”

“녀석이 갑자기 사라지더니 다 나한테 떠맡겼다!”

“최후의 일격을 위해서죠. 아주 전략적인 판단이네요. 탈주닌자가 단장님보다 똑똑한 거 같아요.”

“못된 소리!”

“알았으니 진정하세요. 너무 열 내시면 상처 덧나요.”

“흥. 일대일이었으면 둘 다 내 상대가 아니었다.”

입을 굳게 다문 채로 고개를 휙 돌리는 아가사.

똥고집이 사람의 형태를 갖추게 되면 이런 모습일까.

“어린애도 아니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는 추악함에 레오나가 한숨을 쉬었다.

탈주닌자와의 전투. 공동의 적인 여왕을 무찌른 후 아일린의 원수를 갚겠다며 아가사가 일방적으로 덤벼들었을 게 뻔했다.

탈주닌자가 그녀를 적대하고 있었으면 부상으로 끝나지 않았겠지.

그가 살짝 고마워지는 레오나였다.

“맨날 혼자 신나서 돌격하시더니. 큰코다친 거로 생각하세요.”

“난 코가 크지 않다.”

“어련하시겠어요. 반성은 하시고 있는 거죠?”

“...그래.”

“혼자가 아니잖아요. 단장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기사단원들 마음이 어떻겠어요?”

“...많이 슬퍼하겠지.”

“누가 슬퍼해요? 이번 달 급여를 못 받을 수도 있겠다 걱정하겠지.”

“...”

아가사가 레오나를 조용히 노려봤다. 콧방귀를 끼며 그 시선을 받아들이는 레오나.

“갱생대랑 같이 다녔으면 이렇게 누워계실 일도 없었을 텐데.”

“붙잡힌 사람이 있을 수도 있으니 구조하기 위해...”

“자기 몸부터 챙겨야죠. 칠검경이 불사신이에요? 머리에 칼 들어가면 죽는 건 똑같잖아요.”

“...피하면 된다.”

“어깨에 난 구멍은 심심해서 직접 뚫으신 건가요? 피하면 되는데 왜 맞고 왔지? 자기과시?”

“그러니까 여왕이 이상할 정도로 강해서...”

구차한 변명을 이어가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아니다. 미안하다.”

말하면서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결국 사실을 인정하고만 아가사.

정신이 확 들만한 따끔한 한마디를 벼르고 있던 레오나가 측은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늦게라도 성장했으니 다행이네요. 전 이만 가볼게요. 필요한 거 있으면 종을 울려 호출하세요.”

“레오나.”

레오나의 발을 아가사의 말이 붙잡았다.

“탈주닌자는 왜 사람들을 구한 걸까? 아일린이 부녀를 죽이려고 했다는 건 진짜일까? 이 생각이 계속해서 머릿속에 맴돈다.”

그렇게 말하는 아가사는 많이 혼란스러워 보였다.

“무고한 백성들을 수호한다. 종이에 남긴 그 말이 진심이었던 걸까. 사무라이가 아니라는 알 수 없는 말만 남기고 사라져서 이제는 물어볼 수 없다.”

고개를 푹 숙인 아가사의 눈이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믿음과 열정 빼면 시체인 그 유검경이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다니. 레오나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내가 아일린을 홍염룡 기사단에 편입시키겠다 했을 때, 너를 비롯한 기사단 모두가 반대했었지.”

아가사의 힘없는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너무 늦었지만, 그 이유를 자세히 듣고 싶다.”

“아일린은...”

진실을 얘기한다면, 아가사가 마주할 수 있을까? 레오나는 고민에 빠졌다.

“아일린이 어떤 애였냐면...”

아니, 마주하게 만들어줘야 한다.

가장 소중한 친구가 괴로워하며 고통받는 한이 있더라도.

“...단장님. 실리번에서 꽃집 가게를 하던 마이클을 기억하시나요?”

“내가 직접 구한 사람이다. 알고말고. 실리번에 들릴 때마다 내 품에 꽃다발을 안겨줬지. 그의 아내와 딸도 기억나는군. 정말 화목한 집안이었는데...”

“아일린과 마이클이 말다툼을 했던 것도 기억나시겠군요.”

“서로 사소한 오해가 있었지. 좋게좋게 해결되지 않았나.”

사소한 오해. 그 말에 레오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일이 있고 두 달 후, 마이클과 가족 모두가 세상을 떠났죠.”

“불의의 사고였지. 가슴 아픈 일이다.”

“불의의 사고, 는 개뿔. 마이클의 가족은 아일린에게 살해당한 겁니다.”

“뭐, 뭐라?”

“조금도 의심하지 않으셨군요. 정말로.”

레오나가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단장님. 아일린은 인간쓰레기입니다.”

진실을 강제로 쑤셔 박을 시간.

아일린의 만행을 전부 털어놓을 때가 왔다.

***

[이곳이 네오­솔리트론인가? 기록에 저장된 솔리트론이랑 너무도 다르군.]

“그걸 말이라고 하냐. 앞에 ‘네오’가 붙으면 존나 다르단 뜻이야.”

도착하자마자 헛소리를 하는 트리보의 엉덩이를 살짝 차 줬다.

수백 년 동안 업데이트가 안 된 트리위키­지도. 이건 그냥 쓰레기다.

“정말 신나요~! 이렇게 크고 아름답고 활기찬 곳이 네오­솔리트론~! 악상이 또 떠올라요~!”

“정말 기쁘겠군요. 이제 동행은 끝입니다. 함께해서 힘들었으니 다시 만나지 말죠.”

“이별의 아픔~! 외면하는 게 아니라 기쁘게 맞이하세용~! 새침데기 로빈 씨~!”

“...”

진정한 의미의 구타 유발자. 더 상대하다간 야쿠자가 될 거 같다.

디아나와 같이 도시를 둘러보던 오르페의 손을 잡고 끌고 와 무카 앞에 세웠다.

“네가 상대해.”

“무카 씨. 고생 많았어요. 슬슬 헤어져야 할 거 같은데, 의뢰금을 받을 수 있을까요?”

능숙하게 대처하는 오르페. 돈 많은 사장님이 괜히 비서를 두는 게 아니다.

“여기 받으세요~! 오르페 씨도 고생 많았어요~ 트리보 씨랑 디아나도 안녕~! 다음에 봬요~!”

“언니도 잘 가요~!”

무카가 디아나에게 한 번 웃어준 후 떠났다.

괴물들끼리 통하는 게 분명하다.

“자, 집이나 구해보자고.”

골돈의 음파병기를 네오­솔리트론에 풀어놓은 건 옳은 선택이었을까.

알 수 없다.

그저 나아갈 뿐.

“그래. 같이 가서 찾아보자. 트리보 씨, 디아나와 짐을 부탁할게요. 짐은 가까운 여관에 맡기시면 돼요. 돈은…. 이 정도면 될 거예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시겠다면, 간단히 설명해 드릴까요?”

메고 있던 보따리를 전부 트리보에게 넘기는 오르페.

짬 때리는 거 같아 보기 흐뭇하다.

[그럴 필요 없다. 수백 년이 지났는데도 문명이 크게 변하지 않았으니. 기이한 일이다.]

고개를 저은 트리보가 짐을 들어 올렸다. 가뿐하게 드는 게 꽤 힘이 좋아 보인다.

한 대 치니 박살 나서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근력은 확실히 일반인 이상이었다.

“저 돌아다니고 싶어요! 맛있는 것도 먹고 싶고, 장난감 구경도 하고 싶어요!”

오늘따라 활기차 보이는 디아나가 방방 뛰었다.

깡촌만 보다가 넓은 도시로 와 신난 건가? 하루 정도는 신나게 노는 것도 나쁘지 않다.

내 명령을 기다리는 트리보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짐을 맡긴 다음 구경하지. 오르페, 돈을 더 줄 수 있겠나?]

‘내’ 재산을 관리하는 오르페가 트리보의 손에 금화를 몇 개 쥐여줬다.

내 재산인데 왜 오르페에게 묻는 걸까? 따지려 하다가 귀찮아서 말았다.

돈 가지고 생색내는 건 보기 안 좋다.

“넉넉하게 드렸어요. 디아나 하고 싶은대로 다 하게 해줘요. 장소는…. 지금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 거로 하죠.”

[알겠다. 그럼 이만.]

디아나와 트리보가 자리를 벗어났다. 로봇과 아이. 어쩐지 정겨운 조합이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가족영화 한 편 뚝딱인데.

“우리도 가볼까?”

“좋지.”

오르페와 같이 지나치게 큰 네오­솔리트론의 길가를 걸었다.

“닌?!”

갑자기 중요한 게 떠올랐다.

이 세계에서 집을 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지구에서도 집을 구해본 적이 없는데.

“집은 어떻게 구하는 거야?”

바로 오르페에게 물어봤다.

전부 그녀에게 맡긴다는 방법도 있지만, 처음으로 구할 내 집이었으니 과정을 알고 싶었다.

마트에서 과자 사듯이 살 수도 있지 않을까?

“어? 알고 있는 거 아니었어?”

“몰랐는데.”

“원하는 집 찾느라 걷는 줄 알았는데...”

“그냥 너 걷고 있길래 따라 걸었는데.”

“...”

턱.

오르페가 당황스러운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멈춰 섰다. 완벽한 일시 정지 상태.

“갑자기 조용해지니 무섭잖아. ‘리액션’을 좀 해줘.”

“리액션?”

“화자의 기분을 위해 청자가 취해야 할 태도. 라는 뜻이야.”

“...그래. 리액션. 기억할게.”

일시 정지에서 풀려난 오르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설명의 시간이다.

“집은 어떻게 구하는 거야?”

“우선 내놓은 집을 알아봐야 하고, 땅 소유주를 찾...”

“거기까지.”

벌써 머리가 아프네. 다른 질문을 했다.

“집 구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최대한 빨리 살펴봐도…. 지금이 점심이니 저녁때까지는 걸리지 않을까? 계약하는 시간까지 합하면 더...”

그녀의 말이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렇게나 시간 소요가 크다고?

“그냥 내 절친한 친구인 너에게 전부 맡길게. 좋은 집으로 구해줘. 난 산책 좀 하고 올게.”

복잡한 건 정말 싫다.

“나 혼자 하라고?”

“당연하지.”

원망이 살짝 깃든 파란색 눈이 날 향했다.

그렇지만 상남자는 쉽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 법.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알겠어. 원하는 조건은 있어?”

“크고, 무기 보관용 방이 있고, 멋지고, 크고? 잘 모르겠네.”

“무기 보관용 방? 그냥 다락방을 쓰면 되지 않을까?”

“그러네. 아무튼, 저 조건으로 알아서 잘 구해봐.”

“힘내볼게.”

그 말을 끝으로 오르페가 쌩하니 가버렸다.

태도가 좀 차가워진 거 같다.

어쩔 수 없다. 소중한 시간을 잘 모르는 복잡한 일에 사용하고 싶진 않았으니.

“쩝.”

많이 삐졌을까? 왠지 모르게 자꾸 생각나네.

시간 날 때 오르페의 기분을 풀어줘야겠다.

선물이나 사갈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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