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 49화. 반가운 얼굴들 (2)
* * *
정처 없이 걸으며 네오솔리트론에 사는 백성들의 모습을 살폈다.
대도시라 그런지 다양한 유형의 사람들이 많았다.
크게 분리하자면.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네.”
“이게 돈이야 쥐꼬리야?”
“철학이 아니라 기술을 배웠어야 했는데.”
“다 같이 닭요리 전문점이나 차려볼까?”
꾀죄죄한 누더기를 걸친 하류층.
“아빠 나 허니 버터 흑설탕 왕캔디 먹고 싶어”
“조금만 참아요~! 우리 공주님~!”
“양치는 꼭 하고 자야 해? 아니면 엄마가 혼낼 거야.”
말끔한 면옷을 입은 중산층.
“후. 큰일입니다. 큰일. 광산 노동자들의 불만이 날이 갈수록 커집니다. 이러다 반란이라도 일어나는 게 아닐지...”
“어차피 노동자들은 멍멍 꿀꿀이들입니다. 하루마다 가장 작업량이 우수한 노동자를 선정해 ‘오늘의 노동자’로 뽑고 몇 푼 쥐여주세요. 서로 경쟁하느라 바쁠 것입니다.”
“그거참 좋은 생각이구려!”
번쩍번쩍 빛나는 배지를 차고 고급스러운 비단옷을 입은 상류층.
근데 이 새끼들 대화가 좀 아니꼽다. 광산? 네오솔리트론에 광산도 있나?
일단 기억하기로 했다.
“닌닌.”
어쨌든, 이렇듯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뭉친 곳이 네오솔리트론이다.
지금까지 내가 겪었던 무대와는 완전히 다른 곳.
마르톨란, 골돈, 상록수 마을은 공통점이 있다.
바로 나 탈주닌자의 적대자가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존재했다는 것이다.
모험가로 데뷔한 영지인 마르톨란에서는 단풍잎 마을까지 가 공룡요괴들과 싸웠고, 골돈에서는 그곳을 노리는 야쿠자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 싸웠고, 상록수 마을에서는 먼 곳에 있는 꿀벌요괴들과 싸웠다.
마르톨란에서 사무라이인 아일린과 철가재 기사단을 때려죽이긴 했지만, 게네들은 적대자라고 부를 가치도 없는 삼류들이기 때문에 제외한다.
오줌 지리면서 죽은 년을 그렇게 멋지게 불러준 순 없는 법이다.
이렇게 외부의 세력들과 싸워왔으니 내 정체를 의심할만한 주변인이 적어 위장신분을 써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
이번은 다르다. 네오솔리트론을 위협하는 세력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으니.
도시를 장악한 내부의 적은 잔악무도한 살인광 사무라이 조직 검성회.
나와 같은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 새끼들에게 의심을 사지 않으며 싸우기 위해선 완벽한 위장신분이 필요했다.
배트닌자처럼.
배트닌자.
부모님을 야쿠자에게 잃은 재벌 2세가 타락한 닌자 마을 ‘리그 오브 닌자’에 들어가 모든 기술을 전수받고 탈주해 탄생한 존재.
나와 같은 탈주닌자 출신인 이 녀석은 아침에는 재벌 2세, 밤에는 배트닌자로 활동하며 야사요의 의심을 피해 싸운다.
그를 본받아 완벽한 위장신분으로 알리바이를 만들어야 했다.
모험가라는 직업을 좀 더 내세워 네오솔리트론의 시민들에게 ‘난 위험하지 않아요.’를 어필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날 신뢰하고 알리바이를 만들어 줄 모험가 동료들이었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보니타처럼 든든하고 세일린처럼 실력있는 녀석이.
탁!
“닌?”
“앗, 죄송합니다~!”
상념에 잠겨있을 때, 남자랑 팔짱을 낀 여자가 내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튕겨 나간 건 그녀였지만.
“네 어깨가 너무 넓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
“오빠 뒤질래?”
시시덕거리며 스킨십을 주고받는 커플.
“괜찮으니 가세요.”
“정말 죄송합니다. 살펴 가세요!”
특별한 악의가 있어 그런 건 아닌 거 같아 보내줬다.
커플. 커플도 좋은 위장신분이긴 하다.
당연하지만, 나도 커플이었던 적이 있었다.
오빠! ^w^ 저랑 사귀어주세요! ^w^
한 살 어린 여자애였지.
닌힘숨 겸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기 위해 가뿐하게 고백을 받아줬다.
내 취향은 아니었다. 난 좀 더 성숙한 여자를 좋아한다.
아 걔 벌칙 게임에 져서 고백한 거라니까? 너 같은 병신에게 고백할 여자가 어딨다고 그래? 쪽팔려 뒤지기 전에 내 말 좀 들으라고~!
몰상식한 유인원, 여동생의 말은 당연히 듣지 않았다.
오빠…? 왜 메시지에다 닌닌밖에 안 치시는 거예요…?
우리 둘 다 과묵한 편이라 말을 많이 나누진 못했고, 둘 다 바쁜 편이라 자주 만나지도 못했지만, 서로 아끼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오빠… ㅠㅠ 죄송해요 ㅠㅠ 친구들이랑 한 벌칙게임 때문에 고백한 거였어요 ㅎㅎ 일주일간 커플 연기하기로 ㅋㅋ 그러니까 사귄 건 없었던 거에요~!
부끄러웠는지 문자 하나만 남기고 떠나간 그녀.
빠르게 받아들였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도 있는 거니.
그렇게 생각하니 이별의 아픔도 생각하던 것보다 견딜 만 했었지.
“우리 오늘 그거나 보러 갈까?”
“그거?”
“‘왕도마뱀 대 유인원’! 특수재질 천으로 분장해 더 실감난데!”
“난 그런 수준 떨어지는 연극은 못 보겠더라.”
“왜? 엄청 재밌을 거 같은데!”
“좋은 연극이라면 메시지가 있어야지.”
“즐겼으면 된 거 아냐?”
커플이 떠드는 소리가 아직도 들린다.
잠깐, 연극? 연극이라고? 연극이면 뮤지컬과 비슷한 거 아닌가?
푸스킨 마을에서 뮤지컬을 보려다 이야기 구연인가 뭔가 하는 노잼 컨텐츠만 보고 왔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쩌면 지금이 뮤지컬을 볼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잠시만요!”
바로 커플을 쫓아갔다. 오늘처럼 한가할 때 무조건 봐야 한다.
“네? 왜요?”
“공연은 어디서 볼 수 있는 거죠?”
“음… 여기서 저쪽으로 가서 저쪽으로...”
야이씨. 그렇게 말하면 누가 알아듣겠냐.
“가실 거면 같이 갑시다.”
“아...”
어깨를 친 값은 이걸로 때우렴.
“갑시다. 연극이 있는 곳으로.”
***
* 삼거리 유랑 연극단 *
상영표
1관: 왕도마뱀 대 유인원
2관: 고드름왕국
3관: 100번 방의 선물
4관: 텔라스 항전에서 지휘봉 휘날리며
5관: 다티만의 재앙
6관: 골돈의 수호신
7관: 붉은고래 마탑 자각몽의 진실과 전자를 통한 유리관 속 뇌의 상관관계
8관: 붉은고래 마탑 안전한 미래설계와 편안한 노후를 위한 자기 계발적 교육
9관: 붉은고래 마탑 전두엽 절제술이 가져다주는 이익과 죄악감 지우기 운동
“골돈의 수호신?”
연극장에 도착하자마자 비명을 지를 뻔했다.
이렇게 불릴 새끼는 나 하나뿐인데?
줄거리: 내전 때문에 피폐해진 골돈을 노리는 마적단의 두목 델바나스. 용기 있는 병사들과 모험가들이 맞서려 했지만, 승리를 장담하기 힘든 상황. 공성전을 앞둔 정체절명의 순간, 정체불명의 괴인이 등장하는데…!
“아니, 시발?”
소개글을 읽어봐도 이건 내가 맞았다.
내 명성이 퍼져나가는 건 좋다. 그런데 왜 탈주닌자로 불리지 않는 거지?
아직 쭈뼛대고 있는 커플을 붙잡고 물어봤다.
“골돈 일을 사람들이 어떻게 아는 겁니까? 거기 마차 지나다닌 지 별로 안 됐을 텐데.”
“그거 요즘 유명해요.”
“네?”
“거기서 같이 싸운 모험가가 길드에 상세한 기록을 가져왔거든요. 비밀스러운 내용은 아니니 길드에선 돈 많은 호사가에게 복제본을 팔아넘겼고, 호사가들은 음유시인들에게 각색해오라 넘겼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야기가 퍼져나가고… 뭐, 그런 거죠.”
거기서 같이 싸운 모험가라 해봤자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세일린 뿐이다.
꼼꼼한 성격대로 전부 기록하고 있었나?
아니 근데 기록할 거면 탈주닌자로 해주지 웬 골돈의 수호신? 와전된 건가?
“설명 감사합니다. 근데 왜 골돈의 수호신인가요? 그 사람은 탈주닌자라고 불리지 않았나요?”
“그렇긴 한데, 발음이 촌스럽잖아요.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고. 수호신 들어간 게 더 멋지지 않아요?”
“절대 아닌데요.”
수호신은 사상최강이 아니다. 오직 탈주닌자만이 그 타이틀을 가질 수 있는 법.
‘멋짐’이 중요한 게 아니라 그 단어가 담고 있는 뜻이 중요하다.
“게다가 그 사람, 별명이 하나 더 있잖아요. ‘마르톨란의 심판자’였나?”
“어이가 없네 진짜.”
존나 큰 종이에다 대짜만 하게 탈주닌자라 써줘도 왜 안 들어 처먹는 걸까.
골돈에서도 오르페가 탈주닌자라고 고래고래 외쳤을 텐데.
이게 야만적인 이세계의 현실인가?
“일단, 알겠습니다. 두 분 다 연극 재밌게 보세요. 전 가볼게요. 갑자기 바빠졌네요.”
“아, 네...”
연극이고 지랄이고 볼 마음이 싹 사라졌다.
내 영혼이 강간당한 거 같은 기분이다.
“기념품 사세요. 기념품~! 연극단에서 직접 만든 기념품이에요~!”
우스꽝스러운 광대 옷을 입은 여자가 야쿠르트 아줌마처럼 수레를 끌고 돌아다니고 있었다.
기념품? 오르페의 선물로 적당하지 않을까?
잠깐 둘러보니 탈주닌자 피규어도 있었다.
인종차별적으로 깜깜하게 생긴 남자 모양의 작은 장난감.
“‘탈주닌자’ 하나 주세요.”
“네?”
“탈주닌자요.”
“네?!”
“...저걸로 하나 주시라고요.”
“아~! 상품명은 다르게 표시되어 있어서요~! ‘골돈의 수호신’ 여깄습니다!”
오르페. 보고 있니? 내가 널 위해 이렇게 괴로운 과정을 겪고 있단다.
“쒸익쒸익…!”
피규어를 든 채로 분노를 삭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존나게 걸었다.
아니, 내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는 동료를 찾기 위해 걸었다. 진짜로.
“로빈?”
날 부른건 어느새 뒤에 있던 오르페였다.
길 찾기 본능이 발휘된 탓인지 그녀와 헤어졌던 자리로 온 모양.
하늘을 보니 어느새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시간 참 빠르게 간다.
“끝났어?”
피규어를 숨기고 다가갔다. 이건 깜짝 선물이니까.
“응. 집값이 많이 비싸더라. 그래도 어떻게 조건을 다 맞춰서 싸게 구했어.”
오르페의 왼손이 서류로 가득했다. 역시, 그녀 혼자 보낸 게 정답이었다.
“어떻게?”
“우리 이름을 대고 골돈에서 받은 보증서를 보여주니까, 집주인이 아주 기뻐했어. 골돈 영주님이랑 아는 사이 같아.”
“잘됐네.”
“그런데 손은 왜 숨겨?”
눈치 빠른 아이는 이래서 싫다. 더 뭐라고 하기 전에 바로 내밀었다.
오른손으로 피규어를 받아든 오르페가 한 바퀴 돌려 삭 흩어봤다.
“너 주려고 샀지. 암시장에서 비싸게 구한 거야. 장인이 숨결을 불어 넣어 만들었다 전해지는...”
“삼거리 유랑 연극단에 갔다 왔어?”
독심술?!
“너 여왕벌 요괴가 된 거야?”
“응? 여기 봐봐. 상품명 옆에 작게 쓰여 있잖아.”
시발, 진짜네?
“아무래도 내가 사기를 당한 거 같군. 이건...”
“그렇게 말할 필요 없어.”
오르페가 고개를 저으며 내 피규어를 품속에 넣었다.
“마음에 들어. 고마워.”
“감사, 곤란.”
뭐, 잘 된 거겠지?
“이제 집에 가야 하는 거?”
“집주인이 우리 얼굴을 한번 보고 싶다고 했어. 디아나랑 트리보 씨랑 합류해 주인집으로 가야 할 거 같아. 그분은 귀족이니까, 태도만 주의하면 돼.”
나쁠 거 없지.
“가자고.”
나에게 호의를 가진 귀족. 이건 귀하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