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50화 (50/119)

〈 50화 〉 50화. 반가운 얼굴들 (3)

* * *

로빈, 오르페와 만나기로 한 장소.

토끼 인형을 끌어안은 채 나무에 기대어 자는 디아나를 지켜보던 트리보가 한 물건을 품에서 꺼냈다.

보랏빛이 감도는 투명한 검은색의 유리, 흑요석이었다.

[음...]

신음을 흘린 트리보가 디아나의 옆에 앉았다.

육중한 몸이 나무에 몸을 맡긴 순간,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트리보가 그 광경을 천천히 지켜보며 흑요석을 옆구리의 빈 공간에 꽂았다.

띠릭­

열쇠가 잠금장치 들어가듯 완벽히 맞춰지더니 트리보의 몸에 흡수된 흑요석.

[저장된 영상기록이 재생됩니다.]

녹음된 음성이 트리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트리보의 눈앞에 한 화면이 펼쳐졌다. 주변 사람들에겐 보이지 않는 화면이.

­ 고...마그…

현저히 떨어지는 해상도와 음질이었지만.

­ 고그마그족에게…

트리보가 카메라 렌즈 같은 두 눈을 껌벅이니 선명해졌다.

­ 고그마그족에게 부탁을 하려 한다.

화면을 차지한 자는 중성적인 외모를 가진 검은 장발의 남자였다.

날카로운 눈매와 굳게 닫힌 입이 묘하게 오르페를 연상시킨다.

­ 감시자들의 영역을 감시하겠단 약속을 지켜줬으면 한다. 유기체가 아닌 그대들이니 누구보다 잘할 거라 믿는다.

남자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 이게 내 마지막 기록일 것 같다. 지금까지 많은 정보를 공유했지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도, 말할 수 없던 것도 있다. 더 중요한 게 많다고 생각했으니, 그 부분은 이해해줬으면 좋겠다.

그렇게 말한 남자의 주변을 여러 종족이 감싸고 있었다.

­ 종족도, 문화도, 사는 세계조차 달랐지만, 우리는 자유를 위해 하나되어 싸웠다.

꿀벌처럼 생긴 종족, 새의 부리를 가진 포유류 종족, 하이에나와 치타를 닮은 종족, 멧돼지를 닮은 종족.

랜턴을 든 그들이 두 발로 걸으며 남자가 있는 어두운 동굴을 밝혔다.

­ 우리는 수많은 희생 끝에 감시자들의 육체를 파괴했고, 전쟁에 승리했다. 평화유지를 위해 에리카 이르갈과 합의해 결혼 동맹을 맺었고...

[아...]

트리보가 두 손을 들어 올려 머리를 감쌌다.

그의 얼굴을 보면 전부 기억날 줄 알았는데,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 ...본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은 없다. 감시자만이 시공간에 간섭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그들도 구심점과 매개체를 잃고 떠돌고 있으니...

[안돼… 안돼…]

높낮이 없는 트리보의 절규에도 남자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 ...델라미온은 얼마 남지 않은 동족들을 이끌고 피신했다. 평화는 착각이었다. 긴 전쟁 동안 일어난 학살행위와 배신에 모두 지쳐 있었던 거 같다.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비이성적인 판단...

쾅!

폭발음과 함께 화면이 흔들렸다.

우르르­

붕괴로 인해 무너진 동굴에 빛이 침투하면서 남자 뒤편의 수많은 시체가 모습을 드러냈다.생김새로 보아, 순수한 인간뿐이었다.

­ ...용량이 부족해지더라도 이 영상은 남겨놓아라. 중요한 내용만 담고 있으니.

남자가 은빛으로 빛나는 검을 뽑고 일어섰다.

­ 내 이름은 김성훈. 지구인 출신이고, 감시자들이 ‘잘못 부름 받은 자’라고 부르는 존재와 계약해 힘을 얻었다.

그의 몸이 검은 불꽃으로 타올랐다.

­ 내가 여왕을 죽이고, 전쟁을 멈춰, 이 모든 비극을 끝내겠다.

그 말을 끝으로 영상이 끝났다.

***

“오르페. 이 새끼들, 자고 있는데?”

“좋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거 아닐까?”

좋은 꿈이고 나발이고 길가에서 자는 건 엄연한 민폐 행위다.

“기상 시간이다.”

짝 짜라 짝짝~!

“우왓!”

[아...]

박수를 쳐주니 이제야 일어난 두 명.

“너 로봇이라 안 잔다며?”

[기록을 보고 있었다.]

“나무에 누워서 트리위키 보는 새끼가 어딨냐.”

미래형 안드로이드라면 인터넷 중독 증상을 겪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살짝 궁금해졌다.

[마음이 급했다. 집은 구한 건가?]

“구했는데, 집주인이 우리 얼굴 좀 보고 싶단다. 골돈 영주랑 아는 사이라고 하더라.”

[생각할 시간이 더 필요했는데...조금 귀찮군.]

중얼거리는 트리보를 무시하고 디아나를 살폈다.

“함~!”

교양 없이 하품하는 포켓요괴의 품에는 토끼 인형이 안겨 있었다.

“결국 샀네.”

상록수 마을에서 사주려고 했지만, 시간이 없었지.뭐, 트리보가 사줬으면 해결된 문제다.

[가기 전에 잠깐.]

“뭐?”

[디아나의 언니에게 받은 목걸이가 있다 들었다.]

내가 그런 걸 받았나? 기억도 안 나는데.주머니에 손을 넣어도 안 나와 결국 개인배낭을 뒤졌다.

“여깄다. 정말 오랜만에 보네.”

하얀 보석이 박혀 있는 목걸이. 이게 진짜 보석인지도 의문이다.그냥 반짝반짝 빛나는 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살짝 깨물어보려다 그냥 관뒀다. 라미나 부모님의 유품을 깨물기는 좀 그렇다.

난 동방예의지국의 닌자라 이런 것에 민감하다.

[내가 살펴볼 수 있겠나?]

“상관은 없는데, 왜?”

[사용방법을 찾아보겠다.]

“그걸 먼저 말했어야지.”

어차피 쓸데도 없는 물건이라 바로 넘겼다.

“충분히 살펴본 다음 돌려줘. 별 거 아니면 디아나한테 주고.”

[알았다.]

“이제 가볼까? 너무 늦게 가면 예의가 아니니까.”

트리보도 더 할 말 없어보여 바로 출발했다.

“언니, 나 인형 샀어요. 이거 봐요. 귀가 아주 긴 털복숭이에요. 귀여워요.”

별로 걷지도 않았는데 디아나가 내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트리보랑 같이 놔둬서 그런가? 얘도 수다쟁이가 된 거 같다.

“토끼라고 하는 동물이야. 사람들이 애완동물로 자주 키워.”

“먹을 수도 있나요?”

“그렇긴 한데…. 맛있는 건 많이 먹고 왔어?”

“네. 여기서 좀만 더 걸으면 광장이 있는데, 거기서 노란 크림 들어간 빵을 사 먹었어요. 촉촉하고 부드러워서 맛있었어요.”

“잘했네.”

그야말로 엄마와 딸의 대화.

“트리보 씨. 드린 돈은 얼마나 남았어요?”

[전부 사용했다.]

“전부요? 적어도 일주일 치 식량값은 드렸는데...”

이런 시발 새끼가 진짜. 주변을 지나다니는 무고한 백성들의 시각을 위해 6등분의 트리보는 참았다.

[중요한 것들을 사야 했다. 나중에 우리 일행 전체에 도움이 될 수도 있는 물건들이다. 여기선 좀 그러니, 나중에 시간이 나면 천천히 설명해 주겠다.]

“도움 안 되면 진짜 뒤진다. 고철상에 팔아버릴 줄 알아.”

“알았어요. 그래도 다음부턴 저에게 먼저 말해주세요. 집까지 사서 생활비가 빠듯하거든요.”

그렇게 왁자지껄 떠들며 걷다 보니 금세 도착했다.

“여긴데, 잠시 기다려야겠네.”

깔끔하게 손질된 정원이 있는 저택엔 우리보다 먼저 온 손님들이 있었다.

“기사단인가?”

저택 대문에 일렬로 서 있는 갈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

남녀가 섞여 있었는데, 얼굴에 긴 상처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저 모습으로 봤을 때, 깍두기 기사단이 확실하다.

“기사는 아니고, 변검경 휘하의 질서유지군이야.”

“변검경? 이번엔 좀 짧게 설명해줘.”

또 모르는 게 나오네. 까도 까도 계속 나오는 게 양파같다.

“칠검경 중 하나고, 이번 네오­솔리트론 재건을 맡은 사람이야. 다양한 무기들을 다룬다고 하는데, 소문이 적어서 자세히는 모르겠어.

질서유지군은 변검경이 이끄는 군사집단인데, 네오­솔리트론의 치안을 맡고 있어. 중소규모의 용병단들을 직접 모아 창설했다고 해. ”

이것만 들으면 사무라이인지 아닌지 모르겠네.일단 지켜보기로 했다.

­ 그럼, 아멜리아 아가씨. 저희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

­ 살펴 가세요.

질서유지군과 똑같은 갑옷을 입은 남자가 문을 열고 나왔다.

바람의 검심을 찍다 왔는지 볼때기에 x자 모양의 상처가 있었다.

“볼일은 끝났다. 가자.”

히무라 켄신, 이 아니라 상처남자의 명령에 우리를 힐긋힐긋 야려 보던 질서유지군이 저택을 빠져나갔다.

“실례합니다. 아까 찾아왔던 오르페입니다. 일행들을 이끌고 다시 왔습니다.”

“잠시 기다리시지요.”

집사처럼 보이는 양반이 안경을 몇 번 만지작거리더니 집 안으로 들어갔다.

수염을 멋들어지게 기른 실눈캐라 왠지 강해 보인다.

“네. 들어오십시오.”

금방 돌아와 문을 열어주고 길을 안내하는 집사. 도착한 곳은 여관의 방보다 큰 주방이었다.

“어서 오세요. 홀 가문의 삼녀인 아멜리아 홀 입니다. 조안나 언니를 도우셨다면, 절 도우신 거나 마찬가지죠.”

2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금발 아가씨가 갖가지 음식들도 가득한 식탁 중앙에 앉아 있었다.

“오늘 도착하셨다고 들었어요. 많이 힘드셨을 텐데, 이리 와서 드세요.”

보기 좋은 비즈니스 미소를 지으며 포크를 들어 올리는 아멜리아.

설마 하며 애벌레요리를 찾았는데, 다행히 그딴 건 없었다. 트라우마가 됐나.

그나마 예절교육을 잘 받은 오르페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녁 식사를 아직 하지 못했는데, 잘됐네요.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뭘요. 다들 앉으세요. 저도 듣고 싶은 얘기가 많답니다.”

우리들의 이름과 트리보가 식사를 하면 안 되는 이유­종교적인 이유로 인한 금식­를 대충 설명한 후 다들 자리에 앉았다.

호의를 무시했다고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는데, 그냥 털털하게 넘어갔다. 성격이 좋은 귀족 같다.

“조안나 언니가 직접 보증서를 썼다니, 아직도 잘 믿기지 않네요.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이었거든요.”

“위기의 순간에 결단을 내릴 줄 아는 훌륭한 분이셨습니다.”

“나긋나긋한 사람이 의외로 굳센 법이죠.”

적당히 잘 주고받는 오르페를 믿고 입에다 음식을 한 움큼 쑤셔 넣었다.갑자기 나한테 말 걸지는 않겠지?

쿰척쿰척.

연극단 그 새끼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니 존나게 먹어줘야 한다.

파호파호.

옆을 보니 디아나도 비슷한 속도로 먹고 있었다. 이러니 안심되네.

혼자 지적받는 쪽팔린 상황만 아니면 된다.

똑똑.

집사가 닫고 나간 주방의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놀라지 마세요. 제 시종이랍니다. 여러분께 대접하기 위해 케모타일 차를 끓이고 있었거든요.”

아멜리아가 우아하게 손을 모아 손뼉을 두 번 쳤다. 완벽한 아가씨의 호출 자세.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더니 회색 머리 메이드가 고급스러운 중세풍 주전자를 들고 들어왔다.

“네~! 케모타일 차입...”

나와 눈이 마주친 메이드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쨍그랑!

“5…. 567!?”

영문을 알 수 없는 상황에 먹던 자세 그대로 정지했다.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오르페가 소매를 잡아당기길래 그녀 방향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오르페의 입술이 움찔움찔 움직였다.

‘사갈의 꼬리. 555.’

그게 누군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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