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52화 (52/119)

〈 52화 〉 52화. 반가운 얼굴들 (5)

* * *

“몽타주가 필요하신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경계심이 깃든 조안나의 시선에 제임스가 입꼬리를 살짝 비틀었다.

“이유. 이유라. 당황스럽구려. 신원이 불분명한 모험가들이, 위험한 일에 스스로 지원했소. 특별한 조건도 걸지 않고서.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소?”

“마지막 순간까지 죽음을 무릅쓰고 골돈을 지키신 분들입니다.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셨죠. 더 챙겨드리지 못해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도움을 줄 수 없다는 뜻이오?”

“그분들께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는 일이라면,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을 수는 없으니까요.”

“음...”

제임스의 불편한 기색에도 조안나의 태도는 단호했다. 기사 트렌과 레너드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지지했다.

“은혜. 좋은 말이오. 아름다운 울림이 있지.”

그들의 움직임을 살피던 제임스가 의자 등받이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나무로 만들어진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살짝 움직였다.

“프랭크 골돈.”

골돈의 전대 영주이자 조안나 할아버지의 성함이다. 당황한 조안나의 입이 열리기 전에 제임스가 재빨리 말을 이었다.

“이상한 오해하지 마시오. 직접 만나 뵌 적이 있어서 그런 거니.”

“할아버지와 만난 적이 있으시다고요? 오래전에 돌아가신 분입니다.”

“25년 전이었소. 딱 한 번 만났지.”

“중요한 얘기인가요?”

“참을성이 없으시군. 일단 한 번 들어보시오.”

제임스의 눈이 천장을 향했다.

“당연하게도, 그때의 난 특수감찰관이 아니었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지.”

무언가를 회상하는듯한 잠긴 목소리.

“동료들을 잃고 홀로 남은 상태였소. 늑대 같은 놈들에게 추적을 당하고 있었지. 피도 눈물도 없는 잔인한 암살자들 말이오. 어떻게든 살아 보겠다고 변방으로 향했소. 거기서 몇 년 묻혀 살면 다 잊을 거라고 생각했지. 어림없는 생각이었소. 가기도 전에 꼬리를 잡혔으니까.”

제임스가 품 안을 뒤져 파이프를 꺼냈다. 마나를 불어넣어 불을 켜려고 하는 순간, 조안나가 나섰다.

“이 성은 금연구역입니다. 화재 발생을 막기 위해 영지 전체에 ‘꺼진 불도 다시 보자’ 운동을 하는 중이거든요.”

“조금 정도는 괜찮지 않겠소?”

“안됩니다. 한 번이라도 경우를 봐준다면, 규율은 느슨해질 것이고, 만든 이들조차 지키지 않게 될 것입니다.”

“허. 알겠소. 아주 고지식하시군. 전대 영주님과 똑같소.”

혀를 찬 제임스가 파이프를 다시 품속에 넣었다.

“어쨌든, 매우 안 좋은 상황이었소. 손발은 부르트고, 허리는 굽어졌지. 몬스터 같은 생김새였을 거요. 전대 영주님께서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다면, 필시 죽었겠지.”

“그분께서 도와주셨나요?”

“그렇소. 사정을 설명하니, 딱히 여기셨는지 도와주셨소. 6개월이나 몰래 숨겨주셨지. 그분이 아니었다면 난 이 자리에 있지 못했을 거요.”

제임스가 의자를 벗어나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드러우면서도 빠른 동작이라 지켜보던 트렌과 레너드가 몸을 흠칫 떨었다.

“은혜와 원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중 하나요. 따분한 세상을 흥미로운 곳으로 바꿔주지. 영주님은 운이 정말 좋으신 분이오.”

“...무슨 뜻이죠?”

“더 캐묻지 않겠다는 뜻이오. 이름과 특징만 있어도 충분히 찾을 수 있으니. 원하시는 거 아니었소?”

어떻게든 찾아내겠다는 제임스의 말에 조안나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렇지만 왕국 소속의 특수 감찰관에게 뭐라고 따질 수는 없는 노릇. 목까지 올라온 말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얼굴이 시시각각 변하는 걸 흥미롭게 관찰하던 제임스가 몸을 돌려 문을 가리켰다.

“이제 잡혔다는 그 죄수를 보고 싶구려.”

“델바나스가 보낸 자객 말인가요?”

“그렇소. 로빈이란 모험가가 잡았다는 그자 말이오.”

“저랑 트렌 경이 직접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레너드 경, 집무실을 지켜 주세요.”

“알겠습니다.”

조안나와 트렌이 안내를 위해 앞장섰고, 제임스가 뒤를 따랐다.

세 사람은 경비병들의 눈길을 받으며 보수작업을 마친 지하감옥에 들어섰다.

“죄수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소. 교도관도 없이. 가능하겠소?”

“상관없습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여기 열쇠입니다. 받으시죠.”

한 명뿐인 교도관이 제임스에게 열쇠를 넘기고 조안나와 트렌의 뒤를 쫓아 나갔다. 발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그들이 멀어졌을 때, 제임스가 감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누구냐...”

감옥 안, 넝마를 걸친 외팔이 죄수가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소리 없이 다가온 제임스가 그의 얼굴을 거칠게 붙잡았다.

“허억…! 이, 이 새끼...!”

“누군가 했더니, 078이잖아.”

남자의 용모를 확인한 제임스가 코웃음 쳤다. 078이라 불린 죄수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0, 007. 네가 여길 어떻게.”

“너희들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직접 죽이고 싶었는데, 젊은 놈에게 선수를 뺏겨 버렸어. 억울해 죽겠다니까.”

“아아앗...!”

제임스가 078의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을 쥐었다. 그의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개진 건 순식간이었다.

“25년 전, 너도 그 자리에 있었지?”

“읍…. 읍...”

“난 기억력이 좋아. 솔직하게 털어놔. 이제 와서 감출 필요 없잖아.”

078이 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만족한 제임스가 손을 내렸다.

“너는 단장님과 우리를 배신했다. 조직원들을 선동하고 분열시켰지.”

어느새 흘러나온 코피가 078의 입술을 적셨다. 그러거나 말거나 꿋꿋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078.

“그날 너까지 죽였어야 했는데. 빌어먹을 배신자 새끼.”

“배신자? 신뢰한 적이 없는 사이에도 배신이 성립하나?”

“이­”

“됐어. 옛날이야기는 이제 끝이야. 죽은 놈들의 끝난 사정일 뿐이니까.

널 잡은 놈의 특징을 말해줄 수 있나?”

“내가 왜 그걸 네놈에게 말해줘야 하지?”

“널 구해줄 수 있는 건 나뿐이니까.”

제임스가 품 안에서 노란색 콩을 꺼냈다. 아니, 콩과 닮은 무언가였다.

“알아보겠지. ‘고요한 안식’이다. 먹고 잠들면 조용히 숨이 끊어질 거야. 편안하고, 안전하지. 한때 동료였던 널 위한 배려라고 생각해.”

078의 두 눈이 흔들렸다. 부러진 오른팔은 절단당한 지 오래고, 과격한 고문으로 인해 온몸이 성치 못했다. 남은 왼손이 묶여 자살조차 못 하는 상황. 제임스가 내민 약이 달콤한 사탕처럼 보였다.

“어때? 괜찮은 조건 아닌가?”

“...좋아. 말해주지.”

“눈과 머리카락 색깔을 말해.”

“머리카락은 잘 모르겠군. 두건을 쓰고 있었어. 눈은…. 검은색이었어.”

“복장은? 이거랑 비슷하던가?”

제임스가 종이를 하나 내밀었다. 078을 제압한 자가 입은 것과 똑같은 검은 도복이 그려져 있었다.

“눈빛을 보니 맞는 거 같군.”

제임스가 어깨를 떨며 낄낄 웃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숙명이란 이런 거였군. 지금까지 이거 하나를 위해 살아온 거였어!”

영문을 모르는 078이 어리둥절해 하며 그를 살피자, 웃음을 멈춘 제임스가 그의 눈앞에서 약을 흔들었다.

“널 붙잡은 남자의 눈도 검은색이었지?”

“그렇긴 하지만…. 다른 사람일 거다. 분위기가­”

“그만. 네 의견은 궁금하지 않아.”

제임스가 078의 입에 약을 쑤셔 넣었다. 깜짝 놀라면서도 약을 삼키는 078.

“오늘 밤이다. 얼마 안 남았으니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해.”

그 말을 끝으로 제임스가 지하감옥을 벗어났다.

“어떤가요?”

“죽고 싶다는 말만 들었소. 별 볼 일 없는 놈 같더군. 슬슬 해가 지고 있구려. 마지막 부탁이오. 치열한 접전이 벌어졌다는 광장을 보고 싶은데, 괜찮겠소?”

태연하게 조안나의 말을 받은 제임스가 다시 안내를 요청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도착한 광장, 가장 먼저 제임스의 눈에 들어온 건 나무판자로 뒤덮인 우물이었다. 제임스가 묻기도 전에 조안나가 설명을 시작했다.

“지하수가 고이지 않는 우물입니다. 기술이 발전하지 않은 시대에 만들어진 실패작이죠. 자리를 크게 차지하지 않고 있어 방치한 겁니다.”

“나무판자가 새 걸로 보이오.”

“전쟁이 끝나고, 누군가가 부쉈거든요. 별다른 특이사항은 없습니다.”

주의 깊게 우물을 살피던 제임스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갔다. 부서진 기둥과 움푹 팬 땅을 한동안 조사하더니, 이내 관심을 끊어버리는 제임스.

“해가 졌구려. 이만 가보겠소.”

“살펴 가시죠.”

제임스가 간단한 인사를 마친 후 미련 없이 떠났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긴장의 끈을 놓지 않던 트렌이 한숨을 내쉬었다.

“잘 풀려서 다행이네요.”

“아직 일러요. 저 사람이 보고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에요.”

조안나는 아직도 제임스가 떠난 자리를 보고 있었다. 근심 가득한 눈이 그녀의 복잡한 심경을 드러냈다.

“큼.”

트렌이 주위를 살피더니 조안나의 손을 잡았다. 겹쳐지는 거친 손과 부드러운 손.

“아가씨. 그건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최선을 다했다고만 생각하세요.”

“그 말이 맞아요.”

피식 웃은 조안나가 살며시 손을 뺐다. 트렌이 아쉬운 듯이 입맛을 다셨다.

“트렌 경. 이만 들어가죠. 밤공기가 차가워져요.”

“알겠습니다.”

조안나와 트렌이 자택으로 들어서마자 하늘이 어두워졌다.

영지민들이 하나하나 집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경비병인 존과 유니스가 순찰 나갈 준비를 하며 수다를 떨었다.

평화로운 골돈의 아무도 없는 텅 빈 광장.

스슥­

우물 앞 풍경이 움직였다.

끼이익­

우물을 뒤덮은 나무판자가 강력한 힘에 의해 들리고.

터덕­

그 틈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갔다.

드르륵­

우물을 구성하던 가장 큰 돌덩이가 움직이고.

“하.”

뜬그림자를 해제한 제임스가 모습을 드러낸 비밀통로 안으로 진입했다.

순식간에 거대한 문 앞까지 도착한 제임스.

텅!

그가 발길질 한 방으로 문고리를 파괴한 뒤 계속해서 움직였다.

수십 분을 헤매다 도착한 공간에는 완전히 박살 난 기계 병기가 있었다.

“톤­그란텐!”

기계의 이름을 말한 제임스가 흐르는 땀을 닦아냈다. 감시자들의 전쟁 병기 톤­그란텐. 감시자나 그들의 하수인이 아닌 자가 탑승하면 폭발하는 아주 위험한 물건이다.

“너도, 너도 다 알고 있었구나...”

평생을 갈망하던 숙적이 이 세계의 진실을 알고 있다니. 제임스의 두 눈이 희열에 잠겼다.

“로빈…. 로빈...”

그가 그 이름을 음미하듯이 불렀다.

“로빈.”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