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 54화. 폭풍전야 (1)
* * *
디아나의 긴 먹방이 끝나 길거리로 나왔다. 해 질 무렵의 노을빛이 참 이쁘다.
새튼이 잠깐 산책이라도 하자고 권해 걷는 중이다. 오르페가 새튼과 대화하며 열심히 정보를 얻는 중이라 디아나는 내가 돌봐야 했다.
“가늘고 얇은 다리와 찌르르 움직이는 더듬이를 가진 곤충으로 만든 돈까스는 맛있었니?”
“그렇게 말하지 마요. 끔찍하잖아요...”
돌보면서 놀리는 맛이 생각보다 쏠쏠하다. 베이비시터의 재능도 있는 게 아닐까?
웅성웅성.
걷다 보니 인파와 마주쳤는데, 다들 한 방향만 바라보고 있는 게 콘서트라도 열린 거 같았다. 호기심이 생겨 디아나의 말을 들어주는 척하면서 사람들의 대화에 집중했다.
“저기 봐. 변검경이야.”
“소문대로 키가 작네.”
“쉿. 그런 말 함부로 하면 안 돼.”
“왜?”
“질서유지군이 섞여 있을 수도 있잖아.”
“변검경이 네 친구냐? 따라 나와.”
“봐. 왔잖아.”
“시발.”
변검경? 칠검경이 직접 거리로 나왔다는 건가? 이건 그 새끼가 사무라이인지 아닌지 알아볼 좋은 기회다.
“변검경이 직접 왔다는데, 구경이나 가자.”
일행들을 이끌고 인파에 참가했다. 너무 뒤쪽이라 그런지 변검경의 모습이 안 보인다.
사람들을 헤치면서 앞서나갔는데, 내 꽁무니를 졸졸 쫓아오던 일행의 모습이 어느 순간부터 보이지 않았다. 내가 너무 빨랐나?
솔직히 느린 놈들 잘못이다.
“제가 어렸을 때는, 밤마다 사람이 하나씩 사라졌습니다.”
이제야 무대 위에 선 변검경의 모습이 보인다. 교탁 앞에서 뭔가를 열심히 말하고 있었는데, 사람들이 말한 대로 키가 정말 작았다. 170cm는 될까? 오르페보다 작은 놈이다.
“인간은 야만적인 동물입니다. 법과 질서라는 등불이 꺼진 순간, 추악한 본성을 드러내죠.”
변검경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갸름하고 선이 고운 게 아직 소년 같다. 칠검경 중 최연소는 유검경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그의 진짜 나이는 얼마나 될까?
목소리가 차분한 게 30~40대는 되어 보이는데. 마나로 노화 방지라도 한 건가? 마법도구의 영향? 수상하기 짝이 없다.
“변검경의 이름을 걸고, 여러분 앞에서 선언합니다. 네오솔리트론의 등불은 꺼지지 않을 것입니다.”
우와아아아!
열광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 인망은 있는 녀석 같다.
열화와 같은 성원에 만족했는지 변검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와 검성회, 질서유지군을 도와 도시를 지켜줄 분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리나 씨?”
젊은 여자가 변검경 뒤에 서 있던 병사들의 안내를 받고 무대 위에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붉은고래 마탑의 4급 직원, 이리나 펜호프 입니다.”
붉은고래 마탑, 내 닌자슈트를 만든 곳이다. 검성회와 협력해 네오솔리트론을 세웠다 했나? 사무라이 집단과 협력하다니, 이쪽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보십시오. 최신기술을 탑재한 가로등입니다.”
따닥!
이리나가 손짓하자 무대 양옆에 세워진 가로등에 붉은빛이 들어왔다. 지구의 가로등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는 출력. 대단한 기술력이다.
“마나로 작동하기 때문에 일반인은 다룰 수 없지만, 마탑 마법사들이 상주할 예정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런데...”
말끝을 흐리며 입꼬리를 올리는 이리나의 눈알이 빙그르르 돌아갔다. 미친년인가.
“재밌는 소문이 돌더군요. 가로등에 세뇌 음파 기능이 장착돼 있다고.”
사람들이 개꿀잼 드립을 들은 것처럼 껄껄껄 웃어댔다. 혼자 진지하게 인상 쓰긴 좀 그래서 나도 배를 잡고 웃었다. 모난 짓을 하면 닌힘숨이 깨지니까.
“세뇌 음파 기능이래. 살면서 별소리를 다 듣네.”
“아, 기억난다. 예전에 벽보로 붙어 있었는데.”
“벽보? 흰돌고래인가 뭔가 하는 녀석들이 붙인 거?”
“진짜 정신 나간 새끼들이지. 고래의 숨결? 보자마자 빵 터졌다니까.”
“그런 게 있었으면 세계정복을 하지 왜 마탑을 운영해.”
“잘 나가는 것도 힘들어. 이상한 놈들에게 시달려야 하니.”
세뇌 음파. 마법이라면 가능할 법도 한데. 나 혼자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건가?
이세계인들의 안전불감증은 너무나도 심각하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들이 참 많아요. 당연하지만, 그런 건 없습니다.
아, 가로등 위에 붙은 확성기로 이상한 소리가 새어 나올 수 있지만, 마나로 불빛을 조절하는 과정 중 하나니, 안심하세요. 전부 ‘대도시 만들기 운동’의 일환입니다.”
그 말을 끝으로 이리나가 무대에서 내려왔다.
변검경이 다시 입을 열었는데, 도시회비나 인구조사 같은 별 쓸데없는 것들 설명이었다. 들을만한 건 다 들었다 싶어 자리를 벗어났다.
몇 분 걸으니 일행들이 보여 아는 체를 하며 다가갔다. 새튼이 없네.
“트리보. 다 기록했지?”
[물론이다.]
“새튼은 어디 갔어?”
[아래쪽으로 가스를 배출하더니 급한 일이 생겼다고 말하고 사라졌다.]
“똥 싸러 갔다고 하면 돼.”
네오 새튼은 개뿔이. 아직도 폼 안 나게 행동하는 걸 보니 멀었다.
오르페는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고, 디아나는 임산부처럼 빵빵한 배를 쓰다듬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집에 가자.”
가로등. 백성의 안전을 위해 필요하긴 하지만, 탈주닌자 업무를 방해하기 딱 좋은 도구이기도 하다. 저런 것들이 도로 곳곳마다 설치되면 내가 자유롭게 오갈 수 없는데.
역시, 네오솔리트론에서의 싸움은 쉽지 않을 거 같다.
***
새들은 지저귀고, 꽃들은 피어나는 아침.
닌자기상법으로 일어나 대충 세수한 후 닌자탈착의법으로 옷을 갈아입고 오르페 방의 문을 두드렸다.
지금 말한 과정을 10분 안에 해냈다. 칼기상 닌자.
“로빈? 들어와도 돼.”
다행히도, 오르페는 깨어 있었다. 늦잠을 자지 않는 성실한 녀석이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오르페가 침대 위에 앉은 채로 날 반겼다.
직업병인지라 방에 들어서자마자 탐색을 했는데, 청소를 했는지 바닥이 머리털 하나 없이 깔끔했다. 나랑 약속한 시간보다 더 일찍 일어났나?
간단히 아침인사를 한 후 오늘 해야 할 일을 그녀가 제대로 기억하고 있는지 살짝 떠봤다.
“오르페.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고 있어?”
말하고 나니 대놓고 물어본 느낌이다. 뭐, 친구 사이에 떠볼 필요는 없으니 진솔하게 말했다고 하자.
오르페가 고개를 끄덕이며 침대 위에서 일어났다. 검은 끈으로 묶인 그녀의 파란색 머리카락이 천천히 흔들린다.
완벽한 일반인 코스프레를 위해 헤어스타일도 포니테일로 바꾼 건가? 얌전한 도시여자같이 보이긴 한다.
“주목적은 네오솔리트론 정보수집. 최대한 수상해 보이지 않게 행동하기. 가는 김에 커튼을 비롯한 생활용품이랑 일상복을 살 것.”
“참 잘했어요.”
짝짝짝짝.
완벽한 세줄요약에 나도 모르게 손뼉을 쳤다.
“좋아. 바로 출발하자고.”
기지개를 한 번 켜준 후 오르페와 같이 집을 나섰다. 오전 7시쯤 되려나? 바깥 공기가 꽤 상쾌하다.
오늘은 나랑 오르페만 움직인다. 트리보는 덩치와 가면 때문에, 디아나는 너무 어려서 눈에 띈다. 겉보기에 건강하고 젊은 성인남녀인 우리 둘이 그나마 무난한 조합이다.
“커튼은 어떤 게 좋아?”
“검은색 커튼.”
“검기만 하면 돼? 재질은?”
“검고 큰 거로. 재질은 상관없어.”
“오래 쓸 거니 좋은 거 써야지. 재질은 내가 골라도 될까?”
“맘대로.”
노멀 시티즌을 연기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할법한 대화를 하면서 가로수길을 걸었다.
출근 시간인지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교복 비슷한 옷을 입고 입에 사과를 문 채 달리는 여자도 있었다.
교복? 어제저녁 새튼이 아카데미라는 말을 한 거 같긴 한데. 궁금해져서 오르페에게 물었다.
“오르페. 아카데미가 정확히 뭐야?”
“아카데미? 기사랑 마법사를 육성하는 학술기관이야. 네오솔리트론에도 하나 있어.”
기사 학교나 마법 학교 같은 느낌인가? 지구의 창작물로 비슷한 설정을 몇 개 접해서 그런지 감이 잡힌다.
“그 정보도 새튼에게 들은 거야?”
“응. 그쪽에서도 가끔 모험가 길드에 의뢰를 맡긴대. 어떤 이유인지는 자세히 모르지만, 초짜 모험가를 필요로 할 때도 있나 봐.”
“그거 좀 이상하네.”
모험가가 학교 안에서 할만한 일이라 해봤자 쓰레기 청소, 애완용 토끼 똥 치우기, 나무에 물 주기 정도뿐이다. 그런 일을 시키려면 모험가보단 전문청소부가 나을 텐데.
“이상한 일은 아니야. 경험담을 듣기 위해 모험가를 데려오기도 하거든. 몬스터의 약점이나 돈이 되는 약초 같은 건 모험가가 잘 아니까.”
개똥도 약에 쓸 수 있다는 건가. 바로 납득했다.
“마법사는 그, 뭐 하는 사람들이야?”
예전부터 궁금하던 거다. 난 마법사를 본 적도, 어떤 방식으로 싸우는지 들어본 적도 없다. 워낙에 수가 적어 마탑이 있는 수도나 대도시가 아니면 볼 수 없다는 얘기만 들었지.
네오솔리트론은 검성회나 붉은고래 마탑같은 거물들이 운영하는 대도시다. 탈주닌자 업무 중 사악한 마법사들과 전투할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이제라도 빨리 알아봐야 한다.
“음,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오르페는 많이 알고 있는 눈치였다. 이것도 책에서 읽은 건가? 시중에 나와 있는 책으로는 알 수 없는 정보일 텐데.
오르페는 도서관장의 딸이 아니었을까.
“하나도 모르는 거지?”
“당연하지.”
“음….”
“최대한 쉽게 설명해줘.”
지구 토박이인 내가 마법사를 알 리 없다. 내가 아는 마법사는 판타지 소설에 자주 등장하며 메테오나 파이어볼, 얼음송곳을 외치는 놈들뿐이다.
“마나가 생명의 원천이라는 건 기억나?”
“지금 기억났어.”
“우리는 마나를 신체 내부에서 발현하잖아.”
“그렇지.”
“마법사들은 좀 달라. 외부에서 마나를 끌어오거든.”
외부에서 끌어온다? 이건 잘 이해가 잘 안 간다. 세계 곳곳에 퍼진 마나를 제습제처럼 빨아들여 사용한단 뜻인가?
그런 게 가능하나?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걸 눈치챘는지 오르페가 빨리 말을 이었다.
“풀과 나무, 땅. 이런 것에도 마나가 깃들어 있다고 해.
마법사들은 거기에 담겨 있는 마나를 사용할 수 있는 특이 능력자야. 숙련된 마법사는 풀에 담긴 마나를 빼앗아 나무에 옮길 수도 있어.”
시발, 더 모르겠다. 물어본 내가 잘못이다. 부연설명을 시작하려는 오르페를 말리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불이랑 바람 발사할 수 있어? 이것만 대답해줘.”
그래. 이것만 알면 된다. 저딴 세세한 설정들은 내 알 바 아니다.
“마법사는 전투 직종이 아니야. 그들이 만든 마법 도구가 다양한 마법을 구사할 순 있어도, 매개체 없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는 없어.”
아무래도 이세계의 마법사는 과학자에 가까운 놈들 같다. 결론은 마법 도구만 조심하면 된다 이건가.
그럼 지금까지랑 별다를 게 없는데. 아무래도 쓸데없는 걱정을 한 모양이다.
“좀 달라졌네?”
“뭐?”
오르페가 갑자기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예전에는 이런 걸 물어보는 일이 없었잖아. 귀찮다고 하면서 그냥 넘겼고.”
그런가? 그랬던 거 같기도 하고?
사실 지금까지 물어볼 필요가 없긴 했다.
적이 누구든 그냥 쳐 죽이면 그만이었고, 이세계인의 말은 세 마디만 들어도 졸렸으니까.
“음….”
원래라면 야인족 산세리프의 말(아무튼 아기 죽인 거 아님)도 변명이라 생각하고 쳐 죽였겠지.
왜 내가 그녀의 말을 들어줬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이유는 금방 나왔다.
“유검경.”
그래. 그녀와 만나고 난 변했다. 유검경이라 불리는 아가사와의 첫 만남이 떠오른다.
홍염룡 기사단과 유검경을 염탐하다 들켰었지.
유검경이 내 생각 이상으로 강하지 않았다면 바로 죽여버렸을 거다.
아쉽게도, 그녀의 힘은 내 생각 이상이었다. 죽이기는 힘드니 대화를 나누는 척하면서 매끄럽게 넘어가려 했었지.
하지만 난 그 대화 속에서 가능성을 느낄 수 있었다. 분명 사무라이일 거라 생각했던 유검경이 사실은 좋은 녀석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말이다.
“유검경? 유검경이 왜?”
“아무튼 그런 게 있음.”
그래서 산세리프의 말도 들어보려 했던 거겠지.
혹시 모를 가능성을 위해서.
“아아.”
신조차 모독하는 천재 닌자 신노빈, 이렇게 또 한 번 성장한 것인가.
나도 내가 가끔은 두렵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