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55화 (55/119)

〈 55화 〉 55화. 폭풍전야 (2)

* * *

몇 가지 더 물어본 후에 ‘무심한 신사’라는 이름의 옷가게를 방문했다.

흔한 길거리 패션 전문이라길래 들어가 봤는데, 내 맘에 드는 옷은 하나도 없었다.

“저거 어때?”

“촌스러워.”

“저건? 잘 어울릴 거 같은데.”

“구려.”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오르페가 고르는 옷들은 하나같이 화려해서 별로였다. 심미안이 상당히 떨어지는 거 같다.

책만 읽어본 책벌레는 이래서 문제다. 책벌레는 현실보단 이상과 환상을 좇으려 하기에, 평범한 일반인이 보기에 기괴한 것들을 선택한다.

“누가 입어도 이상하지 않은 옷으로 골라야 해. 길거리 거지가 입어도 어울리고, 귀족이 입어도 어울리는 거로.”

“조건이 너무 어려워.”

“하면 된다.”

이후 그녀가 가져온 옷들도 다 별로였다. 하, 내가 직접 나서야 할 거 같다. 여자애라 나보다 센스가 있을 거로 생각했는데. 세상일이 다 그렇듯이 케이스 바이 케이스 같다.

시무룩해진 오르페의 어깨를 몇 번 쳐줬다. 돌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다. 그동안 잘 해줬으니 웃으면서 넘어가 줬다.

“내 옷은 내가 고를게. 트리보, 디아나가 입을 옷을 골라줘. 네가 입을 옷도 빼놓지 말고.”

고개를 몇 번 끄덕이더니 멀어지는 오르페. ‘쓰담쓰담’이라도 해줄 걸 그랬나? 안색이 아직도 안 좋다.

“너무 반짝이는 건 사지 말고 무난한 거로 사! 트리보는 덩치가 크니 그냥 제일 큰 옷으로 대충 고르고!”

그래도 할 말은 해야 한다. 닌카콜라.

10분 정도 지났을까.

슬슬 정보수집을 할 시간이 된 거 같아서 무난한 것들로 고른 다음 오르페를 찾았다. 시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골랐구나. 이제 갈까? 시간이 없어요.”

“로, 로빈. 이것들만 가지고 가자.”

옷들을 쌓아놓고 가격표를 확인하는 오르페의 손목을 끌고 계산대로 갔다. 그녀가 쌓아놓은 옷들은 존나 비쌌다. 의뢰로 번 돈이 한 번에 나가네.

“이제 정보수집 시간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어디 먼저 갈 거야?”

“음.”

어제 생각해본 장소는 두 곳이다. 변검경의 저택과 빈민가. 변검경의 저택은 언젠가 염탐해야 하기 때문에 알아봐야 하고, 빈민가는 백성의 안전을 확인하기 위해 가야 한다.

“빈민가부터 가자.”

“방금 산 옷들을 들고? 눈에 띌 거 같은데.”

“덤비면 혼내주면 돼.”

“그것도 눈에 띄잖아.”

“딱밤만 몇 대 때려주고 갈 거야.”

“로빈...”

곰곰이 생각해봤지만, 역시 이곳 먼저다. 사무라이 백 명을 죽이는 것보다 백성 한 명을 구하는 게 우선시되어야 하니까.

“장소는 알고 있지?”

우리 일행의 정보전문가 오르페의 대답을 기다렸다. 당연하지만, 난 빈민가가 있다는 것만 알고 있다.

“물론이지. 나만 믿어.”

오르페가 살짝 웃으며 날 바라봤다. 자신만만한 걸 보니 새튼에게 들은 게 있는 거 같다. 새튼은 옆에 있을 때보다 멀리 있을 때 도움이 된다.

새튼의 네오­솔리트론 지식만 쪽 빼내 트리보에게 입력할 순 없을까?

***

온갖 오물로 가득한 골목과 기울어져 가는 낡은 집. 꽉 닫힌 창문과 앙상한 나무. 웃통을 벗고 다니는 아이들과 피곤함에 찌든 눈으로 우리를 살피는 어른들.

도착한 빈민가는 최악이었다. 상록수 마을의 2배 정도는 되어 보이는 크기의 빈민가.

“여기는 질서유지군도 안 다녀?”

도시 어디를 가도 보이던 갈색 갑옷을 입은 병사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변검경 욕을 하면 부리나케 달려 나올까? 왠지 그럴 거 같다.

“철거 예정인 곳이니, 일부러 방관하는 거야. 저기 벽보를 봐.”

­ 질서유지군은 이곳에 발생할 불미스러운 사고에 대해 일절 책임지지 않습니다. 길가를 지나다니는 검은 로브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 시 이유 불문 사망할 수 있습니다. ­

가장 질서가 필요한 곳에 질서유지군이 없다니. 직무유기도 정도가 있는데.

법과 질서의 등불? 반딧불이만도 못한 새끼들이 그런 멋진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소문에 의하면, 여기가 원래 솔리트론의 중심지였데. 300년 전인가? 사람들이 몬스터에게 습격당한 뒤로 빈민가가 됐다고 해.”

­ 300년 전에는 왕국에서 ‘솔리트론의 도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델라미온 그 십새끼 짓이다. 뒤지고도 민폐를 끼치는 틀니 새끼.

아무래도 이곳부터 구해야 할 거 같다.

“저기요. 말씀 좀 여쭤봐도 될까요?”

“일없소.”

오르페가 정중히 말을 걸어도 무심하게 쓱 지나치는 노인. 얼굴조차 보지 않고 홱 가버리는 게 이런 일을 자주 겪은 것 같았다.

‘새로 온 사람 따돌리기’ 놀이를 하는 건가?

“거기 두 사람.”

중후한 목소리가 우리 발목을 붙잡았다. 머리를 돌리니 오른 다리가 없어 지팡이를 짚고 있는 중년 남자가 보였다.

“궁금한 게 있다면 내가 알려주지. 단, 보상이 필요해.”

차라리 이렇게 대놓고 보상을 요구하는 게 편하다. 알겠다는 표현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오르페가 들고 있는 쇼핑백­그냥 보따리­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어린 여자아이용 옷도 있나? 8살 정도 되는 아이가 입을만한 걸로. 있다면 한 벌만 줘. 그럼 말해주지.”

“닌?!”

어린아이용 옷을 입고 발레를 하며 빈민가를 돌아다니는 중년 남자의 모습을 상상해버렸다.

우리 할아버지도 말년에 여동생 옷을 자주 입으셨지만, 그건 치매 때문에 그런 거니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신에 이상이 없어 보이는 사람이 그런 차림을 하고 돌아다닌다? 이건 엄연한 범죄행위다.

이세계의 기괴하고 끔찍한 변태성욕자의 모습에 분노로 주먹이 떨렸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 거지? 나도 딸이 있어. 그냥 아빠 노릇 한번 해보고 싶은 것뿐이야.”

뭐야, 괜히 흥분했네. 진작 그렇게 얘기하지. 이래서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 오르페와 눈빛 교환을 한 뒤 질문을 시작했다.

“여긴 왜 이렇게 사람이 없습니까?”

“이곳에 사는 젊은 남녀는 전부 광산으로 일하러 갔거든. 나같이 불구가 된 놈들 빼고.”

광산. 상류층들이 광산 노동자의 불만에 대해 토로하는 걸 들어본 적 있어 기억하고 있다. 노동자들을 멍멍 꿀꿀이라 부르는 놈들이 운영하니, 정상적인 곳이 아닐 터.

“살인사건이나 실종사건 같은 일이 자주 일어나는 편입니까?”

“아니. 일 끝나고 돌아오면 다들 녹초가 된 상태라 그런지 그런 일은 드물어.”

“그건 이상하네요. 고된 노동에 지친 사람들이 사는 치안이 나쁜 빈민가에 사건이 드물다니.”

나는 대충 납득했는데, 오르페는 아닌 모양이다.

그건 그렇고 ‘빈민가’라는 말을 거주민 앞에서 직접 사용하다니, 배려심이 부족한 게 아닌가?

“정말이라니까. 바보 같은 짓을 할만한 놈들은 이미 다 죽었다고.”

“죽어요?”

“네오­솔리트론이니 뭐니 만든다고 하면서 이곳으로 질서유지군이 들어온 적이 있어. 그때 주제 모르고 설치던 놈들은 싹 다 죽었지.”

싹 다 죽였다니. 야쿠자나 양아치뿐 아니라 좀 까칠한 백성들까지 죽였을 게 분명하다. 질서유지군, 역시 몰살시켜야 할 녀석들이다.

“검은 로브의 사람들이 출몰한다 쓰여 있는데, 누군지 아십니까?”

“아니. 그 사람들 자주 오지도 않아. 일주일에 두 번? 잠깐 있다가 금방 가더라고.”

“그들이 여기 사는 사람을 죽인 적은 있습니까?”

“그런 일은 없었어. 저기 붙어있는 벽보 때문에 그러나? 저건 그냥 경고용으로 붙여 놓은 거야. 방해하지 말라 뭐 그런 의미겠지.그 사람들 키가 얼마나 큰 줄 아나?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딱 봐도 위험한 사람들 같아서 우리도 안 건들어.”

피해자가 없으니 그나마 다행이다.

수상한 건 매한가지니, 이것도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 나중에 그들에게 ‘인터뷰’를 하러 가야겠다.

“광산은 어느 쪽에 있습니까?”

“그건 말이지...”

장소까지 물어본 후 디아나가 입었어야 했을 옷 한 벌을 주고 보냈다.

“거추장스러운 프릴이 많군. 우리 딸이 좋아하겠어. 고맙네.”

10벌 좀 넘게 샀으니 한 벌 정도 없어도 되겠지. 매일 골드 드래곤 닌자로 변신할 것도 아니니까.

얻을 정보를 다 얻고 빈민가를 벗어나니 오르페가 말을 걸어왔다.

“변검경 저택으로 갈 거야?”

“고민 중이야.”

광산도 한번 가보고 싶다. 변검경과 질서유지군 몰살도 중요하지만, 무고한 백성들을 착취하는 악덕 업주 몰살도 중요하니까.

“둘 다 들리긴 힘들어. 네오­솔리트론 중앙에 있는 저택이랑 도시 끝자락에 있는 광산은 거리가 멀거든.”

“음.”

내 맘을 읽은 오르페의 조언을 듣고 걸음을 멈췄다. 슬슬 결정해야 할 때.

“광산으로 가자.”

정했다. 이미 끝난 사건보다 일어나고 있는 사건에 집중하는 게 전문가다.

빈민가 학살을 문제 삼아 변검경을 죽일 기회는 많다. 하지만 광산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폭력의 연쇄를 끝내기 위해, 더 큰 폭력으로 내가 직접 개박살을 내줘야 한다. 그것이 스윗닌자의 길이니까.

몇 시간 동안 걸은 끝에 광산에 도착했다.

고목 옆에 붙은 표지판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 아이오지 광산 ­

아오지 탄광이 아니라 다행이다. 주변을 둘러봤는데, 장관이 따로 없었다.

“이런 건…. 나도 처음 봐.”

오르페가 당황할 만도 하다. 21세기 지구인인 나조차도 감탄했을 정도니까.

깊게 파여 속살을 드러낸 산 옆의 땅.

나무와 암석으로 만들어진 마법­기계 팔들이 그 땅을 벌리고 있었다. 어린아이의 입을 억지로 벌린 치과의사의 손과 같은 모습. 흙이 무너지지 않게 고정시키는 기둥 역할인가?

“이게 이르갈 왕국 평균 기술력이야?”

“아니. 이건…. 붉은고래 마탑 기술력이야. 저기 마크가 박혀 있어.”

“진짜네.”

이게 이세계의 대기업 수준인가. 어디서 요괴 고문이라도 하는 게 아닐까 싶다.

내가 선 곳이랑 가까운 장소에서 광부 노동자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세모난 기계장치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걸 들고 광산 안으로 들어가는 건가? 이세계 다이너마이트?

“슬슬 돌아가자. 장소를 알았으니 충분해.”

저 기계가 어떻게 작동할지 궁금했지만, 더 다가가다간 의심을 살 수 있기 때문에 물러서기로 했다.

적당히 변장한 후 내일 다시 와야겠다. 코 옆에 점만 찍어도 되겠지?

“내일 저기로 갈 생각이야?”

“닌닌.”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커튼만 사고 돌아갈까?”

커튼도 사야 하는구나. 뭐든 상관없다.

***

집 앞에 도착하니 밤이었다. 아이오지 광산이 생각보다 멀다.

왕복 3~4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 내일부터 이곳으로 출근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답답해진다. 일주일만 왔다 갔다 해도 진짜 노동자처럼 변하겠지.

지이이이잉­

어느샌가 세워진 가로등이 이상한 소리를 내며 깜빡였다. 하루 만에 가로등이 생기다니, 이상하다. 이곳은 네오­솔리트론의 중심가도 아닌데. 특혜를 받고 있다는 생각만 든다.

질서유지군이 아멜리아 집을 방문한 게 떠올랐다. 둘이 어떤 관계라도 있나?

아멜리아의 남친이 질서유지군 소속? 질서유지군의 비밀 여간부 아멜리아? 갑자기 수상해지네.

아무래도 아달리에게 물어봐야 할 거 같다.

[도착했군. 전할 소식이 있다.]

집에 들어온 우리를 가장 먼저 반긴 건 트리보였다. 디아나는 해 떨어지는 순간 수면모드로 들어갔는지 코빼기도 안 보였다.

“뭔데?”

[저번에 받은 목걸이의 사용방법을 알아냈다.]

고철로봇이 라미나가 죽기 전에 남긴 드랍템을 내밀었다. 목걸이에 박혀 있던 보석이 전보다 더 빛나고 있었다.

[통신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마법도구다.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고장 난 상태였다. 내가 고쳤으니 이제 사용할 수 있다.]

“이세계 휴대전화?”

생각 이상의 개꿀이다. 하긴, 단풍잎 마을에서 피 터지게 싸웠으니 이 정도 보상은 받아야 한다.

[비슷하다. 목에 걸어라.]

목걸이를 목에 걸고 반응을 기다렸다.

‘들리나?’

트리보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지? 목걸이는 하나라 쌍방향 소통이 안될 텐데?

‘속으로 말해라.’

지금 생각한 걸 그대로 옮겨 줬다.

‘고그마그족의 물건이다. 목걸이의 주인과 그 목걸이에 연결한 고그마그족만 소통할 수 있지.’

‘그럼 사기템이 아니잖아.’

대화할 대상이 트리보밖에 없는 병신 전화기가 있다?! 휴대전화는 개뿔이, 삐삐만도 못한 쓰레기였다.

‘유용한 건 변하지 않는다. 갖고 있도록.’

‘그건 당연하지.’

전략적인 가치는 충분하다. 아이오지 광산에서 이상한 걸 발견했을 때 트리보에게 바로 연락할 수 있으니.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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