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 56화. 광산과 홍삼캔디와 천마 히틀러 (1)
* * *
입이 없어 슬픈 고철 트리보의 아침햇살 같은 눈빛을 받으며 도란도란 식사하는 아침.
“이거 어때? 신노빈손으로 하는 거야.”
전부터 생각하던 광산에서 사용할 가명을 꺼냈다.
신노빈인지 노빈손인지 알기 힘든 헷갈리는 이름. 내 이중신분에 걸맞는 완벽한 작명 센스라 자부하고 있다.
“사람 이름이 어떻게 그래요...”
[적어도 이르갈 왕국 사람 이름같이 만들어라.]
“만들면서 이상한 거 못 느꼈어?”
생각보다 반응이 안 좋다. 편견에 사로잡힌 두 요괴뿐만 아니라 오르페까지 이렇게 나오다니.
“로빈슨은 어떨까? 지금 이름과 크게 차이 나지 않아서 기억하기도 편하고, 흔한 이름이라 눈에 띄지도 않잖아.”
“로빈슨...”
오르페가 내놓은 이름을 읊조렸다. 문과적 재능이 뛰어난 나에게 있어서 이건 평범한 이름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명작인 ‘조난을 당해 모든 선원이 사망하고 자신은 아메리카 대륙 오리노코 강 하구 근처 무인도 해변에 표류해 스물 하고도 여덟 해 동안 홀로 살다가 마침내 기적적으로 해적선에 구출된 요크 출신 뱃사람 로빈슨 크루소가 들려주는 자신의 생애와 기이하고도 놀라운 모험 이야기’의 주인공과 같은 이름.
유인원들의 행성에서 20년이 넘게 표류한 나도 그와 비슷한 경험을 겪은지라 왠지 모르게 동질감이 든다.
“그걸로 하자.”
깨끗이 비운 그릇을 차곡차곡 쌓아놓고 자리에 일어섰다. 오르페의 설거지를 조금이라도 돕기 위해서다. 그야말로 세심한 배려.
“난 슬슬 가볼게. 트리보. 문제 생기면 목걸이로 연락해.”
[알겠다. 통신 시 구슬이 밝게 빛나게 되니 품속에 잘 숨겨놓도록.]
“그럴까 봐 보석도 붕대로 한 번 감았어. 날 물로 보지 말라고.”
적들의 본거지 안에 있다 가정해보자. 뜬그림자 상태로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목걸이가 번쩍하고 빛나게 되면 분위기가 싸해질 수밖에 없다.
많은 영화의 조연들이 휴대폰 벨 소리 때문에 숨죽여 숨어있던 게 발각돼 악당에게 죽었다. 난 그런 실수를 하지 않는다.
“난 모험가 길드 의뢰를 받으러 갈 거야.”
“오늘 안에 끝나는 의뢰를 받을 거니 늦진 않을 거야. 저녁에 보자.”
“엄지 척.”
오르페 수준이면 웬만한 의뢰는 혼자서도 잘 해낼 거다. 그녀에게 따봉을 하나 날려줬다.
“응. 너도 엄지 척.”
나랑 똑같은 자세로 따봉을 날리는 오르페. 괜찮은 리액션이다.
살짝 뿌듯해진다. 성장하는 딸아이를 둔 아버지의 심정이 이럴까.
안면인식 장애 효과를 위해 깃털 펜으로 코 옆에 점 하나 찍은 후 출발했다. 철저한 준비가 좋은 결과를 만든다.
끼이익
대문을 열고 아멜리아의 집을 살펴봤다. 아쉽게도 아달리가 안 보인다. 저번처럼 마당에서 꽃 손질하고 있으면 붙잡아 여러 가지 물어보려 했는데.
뭐, 기회는 많다. 천천히 하면 된다.
바로 광산으로 향했다.
***
“로빈슨? 어디서 왔다고?”
면접을 맡은 사람은 깐깐해 보이는 40대 중반의 여자였다.
“푸스킨 마을입니다.”
“꽤 먼 곳에서 왔군. 집은 있나?”
“여기서 좀 떨어진 여관에서 묵고 있습니다.”
“그럼 숙소는 필요 없겠어. 광산에서 일해본 경험은?”
“없지만, 잘할 자신 있습니다. 몸 쓰는 일은 어지간하면 다 잘합니다.”
“젊으니까 알아서 하겠지. 뱃지에 ‘45’라고 쓰여 있는 관리인을 찾아가도록.”
“명심하겠습니다.”
생각보다 따지는 게 별로 없다. 신분을 증명하기 힘든 빈민가 출신들이 주로 하는 일이라 그런가?
그래도 중요시설은 보안이 철저하겠지. 방심하면 안 된다.
눈썹까지 새하얀 중장년의 남자, 45번 관리인에게 다가가 사정을 설명했다.
“또 젊은 놈이 들어왔군. 광산이라고 해서 곡괭이로 돌만 죽어라 두들기지는 않는다. 물건 나를 일이 많다는 거 염두하고 일해.”
“당근빳다죠.”
“그건 또 무슨 신조어인가? 젊은것들이란 참, 아무렇지도 않게 국어파괴를 하고 말이야.
우리 때는 그렇게 말하면 끌려가서 곤장 맞았어.”
“틀.”
“헛소리는 그만. 좀 있다 부를 거니 팀원들이랑 같이 앉아 있어.”
45번 관리인이 날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힘을 빼고 있는 상태여서 그런지 쭉 밀린다. 노친네 힘이 장난이 아니다. 노가다로 단련된 실전 근육인가?
“안녕? 내 이름은 로빈슨이야. 너희들과 함께 일할 든든한 동료지.”
구석에서 쪼그려 앉은 팀원들에게 간단한 인사를 건넸다. 나같이 젊은 사람들이었는데, 빈민가 출신인지 전부 옷차림이 꾀죄죄했다.
“야. 네가 오늘부터 막내다.”
똥 싸는 자세로 앉아있던 금발태닝녀가 벌떡 일어나 다가오더니 내 어깨를 툭 쳤다. 작업반장인가? 말하는 게 살짝 띠껍지만 참기로 했다. 닌힘숨은 지켜져야 한다.
“쉬는 시간에 인원수 맞춰 물 떠오고, 관리인이 험한 거 시키면 먼저 나서라.”
따까리 짓을 해야 한다고? 닌자마을에서는 학생 입장이었기에 온갖 폭력에도 참고 넘어갔지만, 광산이라면 다르다.
“싫습니다만?”
내 의사를 명확히 표현했다. 셔틀들이 이걸 못해서 소세지빵과 푸키몬 띠부실 쿠키를 일진들에게 일 년 내내 대령한다.
주먹으로 두들겨 패서 혼쭐을 내주는 방법도 있지만, 그건 너무 눈에 띄니 참았다.
“뭐? 야, 멀리서 온 거 같은데, 한동안은 내 말 들어. 서로 편하게 가야지.”
“직장 내 따돌림, 곤란.”
“미친 새낀가.”
제육천마왕처럼 얼굴을 찌푸린 금발태닝녀가 고개 숙이면 뽀뽀할 거리까지 다가왔다. 너무 가까워서 콧김이 느껴질 정도.
눈싸움으로 기선제압을 하려는 거 같은데, 나에겐 어림도 없는 짓이다.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눈에서 레이저를 뿜어냈다. 마나는 안 썼다.
“로빈슨. 그냥 비앙카 말 들어.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좋게좋게 넘어가자고. 며칠 지나면 신입이 온다니까.”
뽀글머리 남자 팀원이 화해를 권유하는 제스처를 취하며 다가왔다. 전형적인 배신자의 자세.
“존나 싫음.”
양아치 새끼들에게 고개 숙일 생각은 없다. 떠돌이 검객 로빈이었으면 딱밤이라도 때려주는 건데.
“너 계속 그러면”
따르르르르릉~!
알림벨 소리가 타이밍 좋게 금발태닝녀의 말을 끊었다.
마법 확성기라도 쓴 건가? 확인하니 벽에 확성기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 벽에 붙어 있었다.
“45반! 일할 시간이다. 전부 따라와.”
그렇게 외친 45번 관리인이 먼저 광산 안으로 들어갔다. 십새끼가 따라오라면서 먼저 호다닥 들어간다. 미운 오리 새끼 엄마라도 이런 식으로는 안 대하겠다.
“계속 그런 식으로 해봐. 너만 힘들어질 테니.”
“네 다음 양아치.”
금발태닝녀랑 팀원들도 뛰듯이 걸어 45번 관리인 꽁무니를 쫓아갔다.
우르르 몰려들어 광산에 들어가는 다른 반 팀원들. 자칫하단 길을 잃을 거 같아 나도 빨빨빨 뛰어 따라갔다.
광산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넓었다. 안에 조명등도 적당히 붙어 있어 어둡지도 않은 게 진짜 21세기의 광산을 보는 거 같다.
사갈의 꼬리 닌자마을 폐광산과는 차원이 다른 퀄리티에 감탄하며 45반 사이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
관리인 앞이라 그런지 조용히 눈치만 주는 금발태닝녀. 가볍게 무시하고 걸었다.
“다들 옆의 곡괭이 들어. 오늘은 할 일이 좀 많다. 점심때까지 돌 두드리고, 이후 ‘작업기계’를 나를 거니, 적당히 피로도 조절하면서 일해.”
““네!””
목소리 하나는 우렁찬 녀석들이다. 곡괭이를 집어 든 다음 팀원들을 살폈다. 광부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잘하는 놈의 움직임을 모방해야 한다.
“야. 너 거기서 뭐 하고 있어. 안 움직여?”
바로 시비를 거는 금발태닝녀. 이세계나 지구나 양아치 새끼들의 패턴은 똑같다.
“십새야. 입 닫고 차분히 기다려. 지금 ‘감각’을 일깨우고 있잖아.”
곡괭이를 파 돌리듯이 회전시키며 그녀를 노려봤다. 전문가처럼 보이는 게 중요하다.
“지랄한다. 너 곡괭이질 해본 적 없지?”
시발, 어떻게 알았지?금발태닝녀가 코웃음 치더니 검지를 까딱였다.
“따라와. 알려줄게.”
작업반장의 의무, 뭐 그런 건가? 나쁠 건 없다.
금발태닝녀 옆에 서서 그녀의 곡괭이질을 조용히 구경했다.
“힘 너무 세게 주면 안 돼. 잘못하다간 틀어진다. 팍팍팍 내려찍지 말고, 이렇게 부드럽게.”
설명을 들으니 대충 감이 온다. 자세를 잡고 천천히 암석을 내려찍었다.
퍼석퍼석.
“잘하네. 몸 많이 써봤나 보다? 어디서 일했어?”
뭔가 부족한 느낌이다. 여기서 ‘헬리콥터 검법’을 응용한다면 어떨까?
“야, 내 말 안 들려? 어디서 일했냐고.”
투다다다다!
“윽, 미친 새끼야! 돌덩이가 사방에 튀잖아!”
역시, 에바였다. 그냥 금발태닝녀가 하던대로 했다.
“너 또라이지?”
“아무튼 아님.”
이후 별다른 건 없었다. 점심 전까지 열심히 곡괭이질 하다 식사로 나온 말간 수프를 먹었다.
당연하지만, 난 내 것만 가져왔다. 뭐라 뭐라 씨부리는 금발태닝녀의 말을 무시하고 먹으니 시간이 금방 갔다.
식사 시간이 끝난 뒤 팀원들과 같이 광산 바깥으로 나가 어제 오르페랑 봤던 세모난 기계장치를 들어 올렸다. 이게 45번 관리인이 말하던 ‘작업 기계’ 같다.
어떤 물건인지 궁금했지만, 우리가 다루진 않아서 호기심을 풀 순 없었다.
“아, 끝났다.”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내일 보자. 야, 넌 따라 나와.”
“그래.”
내가 금발태닝녀를 따라갈 리 없다. 따라 나오는 척하면서 다른 길로 빠져나갔다.
늦은 저녁에 집으로 들어가니 오르페가 머핀을 사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적당히 먹고 씻고 양치하고 잤다. 별일 없는 하루가 이렇게 지나간다.
사건은 광산 출근 이틀째에 일어났다.
“탈주닌자다! 탈주닌자가 나타났다!”
다른 반 관리인이 그렇게 외치며 내달렸다.
“닌?”
뭐? 난 여기 있는데? 당황해 주변을 둘러보니 검은 쫄쫄이를 입은 남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악한 붉은고래 마탑의 앞잡이들이여. 내 너희들을 오늘 단죄하러 왔다.”
그렇게 말한 남자의 뒤에서 20명쯤 되는 블랙 쫄쫄이 남녀들이 튀어나왔다.
“분신술이다! 녀석이 진짜 분신술을 쓴다!”
뭔 소문을 들었는지 겁을 먹고 벌벌 떠는 관리인들.
여자가 껴 있는 것만 봐도 분신술이 아닌데. 다들 정신이 나가버린 건가?
“미쳐버리겠네 진짜.”
이 새끼들은 누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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