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 57화. 광산과 홍삼캔디와 천마 히틀러 (2)
* * *
아이오지 광산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비밀 연구실.
“조셉 망글로브 박사님.”
생각에 잠긴 노인을 젊은 여자가 불렀다.
여자의 이름은 이리나 펜호프. 붉은고래 마탑의 4급 직원이자, 변검경의 애인이었다.
“아, 내 정신 좀 보게.”
조셉 망글로브(43화에 언급된 틀니)가 껄껄 웃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단안경을 쓰고 흰 가운은 걸친 조셉은 품격 있는 과학자 같아 보였다.
하지만 이리나는 알고 있었다. 그가 얼마나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실험을 자행한 자인지 말이다.
“보자, 어디까지 말했었지?”
조금 전에도 한시가 급하다고 말한 이라나였는데도, 조셉의 태도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평소 같으면 분노를 쏟아냈을 이리나였지만, 상대는 무려 같은 마탑의 2급 직원.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위치에 오른 자였다.
“유물에 담긴 감시자의 영혼 처분에 관한 말이었습니다.”
“아, 그렇군.”
조셉이 한 물건을 들어 올렸다. 둥근 공처럼 생긴 물건에는 부적 같은 종이가 더덕더덕 붙어 있었다.
“발견된 유물은 두 개 아니었나요?”
이리나가 의문을 표했지만, 조셉은 그저 껄껄 웃을 뿐이었다.
“그렇네. 하나는 마탑을 위한 것이고, 하나는 동맹을 위한 것이지.”
“...변검경께선 둘 다 확인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그럴 수는 없네.”
검성회 내 최대 파벌을 갖춘 최강의 전사, 변검경.
이리나가 그를 들먹이는데도 조셉은 끄떡하지 않았다.
“둘 다 아주 강력한 존재였어. 확인이 더 필요하네.”
“확인이 끝나셨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안전장치 확인이 끝났다는 말이었네. 그러니, 연구는 아직이지. 불확실한 요소가 너무 많다네.”
부드럽게 웃은 조셉이 시선을 옮겼다.
“그래서 ‘저것들’이 필요한 거지.”
조셉의 시선에 쇠창살에 갇힌 어린아이들이 와들와들 떨었다.
붉은고래 마탑의 직원들을 시켜 빈민가에서 납치해온 아이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들이었지만, 그렇기에 실험에 도움이 될 것이다.
“자, 하나는 가져가게. 난 연구를 계속해보지.”
유물을 받은 이리나가 다소 불만스러운 얼굴로 연구실을 벗어났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조셉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붉은색으로 빛나는 작은 돌.
그냥 이쁘게 생긴 조약돌같이 보이지만, 이것은 조셉이 만들어낸 물건 중 최고였다.
광산 밑에서 얻어낸 감시자들의 유해를 조합해서 만든 최상품의 영약.
이 물건이라면 인조 감시자를 만들어낼지도 몰랐다.
“흐흐흐...”
본색을 드러낸 조셉이 불길하게 웃었다.
사실 그에게 감시자의 영혼 따위는 별로 중요한 연구재료가 아니었다.
마탑주가 그토록 원하는 실험이니 하는 척만 한 거지, 진정한 목적은 이 연구를 핑계로 얻어낸 물건들과 인력, 희생양들로 자기 명령만 따르는 꼭두각시 감시자를 만드는 게 진정한 목적이었다.
나약한 육체에 정신방벽을 깔아놓은 후 이 영약을 먹이고 유물에 갇힌 감시자의 영혼을 넣는다면, 반드시 탄생한다. 조셉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 영약이 효과를 보이기만 한다면 인간 이상의 존재인 마탑주라 할지라도 내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이다.’
“안녕. 예쁜이들아. 이걸 먹어줘야겠어.”
몇 달의 비밀스러운 연구 끝에 만들어낸 영약을 든 조셉이 아이들에게 다가가던 때였다.
콰콰콰쾅!
무언가가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지진이 찾아왔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누, 누군가 마법 폭탄을 터트린 거 같습니다!”
“공격을 했다고…? 열두제자를 호출해라.”
운 좋게도 현재 아이오지 광산은 모종(주로 감시자)의 습격을 대비해 변검경이 길러낸 최정예 전사들이 지키는 중이었다.
“알겠습니다!”
조셉의 물음에 급하게 대답한 연구원이 부리나케 뛰어나갔다.
“중요한 순간에 대체 이게 무슨….”
조셉이 혀를 차면서 금이 간 연구실의 천장을 바라봤다.
***
“들고 있는 거 전부 버려!”
탈주닌자 행세를 하는 짝퉁닌자가 날카롭게 벼려진 검을 들어 올렸다.
돈이 없는지 닌자슈트 대신에 쫄쫄이를 입고 있었지만, 복면에 두건까지 쓴 게 얼핏 보면 나랑 닮았다. 근육도 탄탄해 보이는 게 전투 직종 같다.
“...”
날 비롯한 사람들이 곡괭이를 버리자 20명의 짝퉁닌자 따까리들이 아무 말 없이 주위를 둘러쌌다. 얼핏 봐선 복장도 키도 비슷한 게 짝퉁닌자의 분신 같지만, 미묘하게 체형이 달랐다.
가슴이 살짝 나온 여자 몇 명은 말할 것도 없고, 눈매도 제각각인 게 클론이나 분신은 확실히 아니다.
“탈주닌자가 왜 여기에...”
“으으….”
가짜라는 걸 눈치챈 새끼는 나밖에 없는 거 같다.
45번 관리인 할배는 10년 지난 건빵보다 딱딱해 보이는 표정을 한 채 굳어 있었는데, 바닥에 노란 물을 질질 흘리는 걸 보니 아무래도 오줌을 싼 거 같다.
나이 먹으면 조절이 안 된다는 말은 진짜인 거 같다. 나도 조심해야겠다.
“무고한 백성들을 지킨다더니…. 다 거짓말이었네.”
뽀글머리 남자 팀원이 벌벌 떨면서 그렇게 말했다.
괘씸한 말이지만, 이 타이밍에서 화를 내며 탈주닌자 쉴드를 치면 너무 티 나니 그냥 조용히 묻어가기로 했다.
나름대로 철저하게 내 흉내를 내는 21명의 불청객. 어떤 새끼들일까?
“전부 자리에 앉도록.”
짝퉁닌자의 명령에 100명 정도 되는 광산 노동자들과 관리인들이 하나둘 무릎을 꿇었다. 내 명성 때문인지 저항할 생각조차 없는 거 같다.
광산 전체가 아니라 이 구역만 포위한 이유가 뭘까? 인원수가 적어서? 이 곳이 가장 중요한 구역이기 때문에?
“음….”
짝퉁닌자가 다가와 우리들의 얼굴을 천천히 살폈다. 설마, 날 찾으려고 하는 건가?
난 지금 완벽히 위장한 상태라 문제없다. 코 옆에 찍은 점을 살짝 만진 후 겁에 질린 것처럼 몸을 오들오들 떨었다.
“호에엥...”
실감 나는 연기를 위해서는 적절하게 추임새를 넣어줘야 한다. 일류 닌자는 여고생이 느끼는 두려움마저 완벽하게 모방하는 법.
“거기 너, 일어나.”
짝퉁닌자가 한 남자를 지목했다. ‘43’이라고 쓰여 있는 배지를 가진 관리인이었다.
“네, 넷? 저요?”
“탈주닌자는 한 번만 말한다.”
울상을 지으며 일어서는 43번 관리인. 살이 오동통하게 오른 너구리가 연상되는 사람이다. 관리인쯤 되면 광산 일을 예전부터 했다는 건데 아직도 살이 안 빠지다니. 엄청 게으른 새끼가 틀림없다.
“짐 블레이크. 맞지?”
“...맞습니다.”
짝퉁닌자가 혀를 차더니 짐 블레이크라 불린 관리인에게 다가갔다. 성큼성큼 걷는 게 일부러 무섭게 보이려고 하는 거 같다.
“어린 애들이나 팔아먹는 쓰레기 새끼.”
짝퉁닌자가 짐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바람 부는 들판의 허수아비처럼 이리저리 정신없이 흔들리는 짐.
“태연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 있어? 뻔뻔한 인간말종 새끼가.”
“왜, 왜 그러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은 집어치워! 다 알고 왔단 말이다!”
“오억!”
철푸덕!
짝퉁닌자의 패대기에 짐이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자빠졌다.
짐의 멱살을 잡고 다시 일으켜 세우는 짝퉁닌자. 내 심문방식마저 재현하려고 하는 건가? 그걸 본 놈들은 전부 죽었을 텐데.
여긴 이세계니까 언데드가 있을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긴장을 놓지 않고 천천히 놈을 살폈다.
세 번 정도 똑같이 내동댕이쳐진 짐이 쌍코피를 질질 흘리며 두 손을 싹싹 빌었다. 조용히 지켜보던 짝퉁닌자가 분신인 척하는 따까리들과 눈빛을 교환했다.
“광산 노동자들이여. 난 그대들을 심판하러 온 게 아니다. 사악한 악인들을 단죄하러 왔을 뿐. 이 일이 끝나는 즉시 바람처럼 사라지겠다. 그러니 큰 걱정은 말도록.”
적당히 멋진 말을 하더니 다시 뒤로 쓱 빠지는 짝퉁닌자.
“43번 관리인 아저씨, 난 전부터 이상하더라.”
“그 사람 낙하산이잖아.”
살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노동자들이 조용히 떠들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짐에도 제지하려는 모습을 보이지 않는 짝퉁닌자 따까리들. 노동자들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측은함마저 담겨 있었다.
야쿠자나 사무라이는 아닌가? 그래도 날 사칭한 죄가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태가 끝나면 녀석들의 뒤를 밟아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이었다.
우르르르
갑자기 광산이 울렸다.
“전부 정신 차리고 일어나! 동굴이 무너진다!”
벌떡 일어난 뒤 소리쳤다. 이런 순간엔 좀 나서도 된다. 무고한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니까.
“멈춰! 조용히 기다리”
우르르르르
짝퉁닌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광산이 한 번 더 울렸다.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한 진동에 백성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뭐, 뭐야! 갑자기 왜 무너져!”
“앞에 있는 놈들부터 달려!”
“왜 이렇게 뭉그적대!”
어떻게든 통제하려고 애쓰는 짝퉁닌자와 따까리들을 제치고 달려 나가는 백성들. 압도적인 자연재해 앞에서 무장강도의 협박은 무력했다.
쿵!
동굴 위에 매달려있던 고드름 모양의 거대한 암석이 떨어진다.
“피해!”
그 파편이 사방에 퍼져나가더니 동굴을 지탱하던 돌기둥 중 하나를 때렸다. 쩌적 하고 갈라지는 기둥. 상태를 보아하니 곧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5분 안에 이곳을 떠나지 않으면 납작이가 될 게 분명하다.
“빨리 움직이라고!”
뽀글머리 남자 팀원의 어깨를 잡고 앞으로 살짝 밀쳤다. 새끼가 빠릿빠릿하게 움직일 생각은 안 하고 멍만 때리고 있네.
그런데 금발태닝녀는 어디 간 거지? 아까 전만 해도 근처에 있었던 거 같았는데.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 넘어가자.
슝!
내가 속한 45반이 가장 뒤쪽에 있어서 앞에 있던 백성들이 전부 달려 나갈 때까지 지켜볼 수 있었다.
맨 뒷줄에서 열심히 다리를 놀리는 45번 관리인을 확인하고 나도 천천히 앞으로 움직였다. 저 앞에 있는 짝퉁닌자와 따까리들의 모습이 보였다.
“생각보다 폭탄의 효과가 강력했나 봅니다!”
“투명도마뱀 마탑 놈들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일단 빠져나가야 합니다.”
“결단을!”
벙어리 분신 코스프레를 집어치운 따까리들이 짝퉁닌자의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위쪽에서 떨어지는 돌을 맞았는지 머리에 피를 질질 흘리는 놈도 있다. 일반적인 공격이 통하지 않네 어쩌네 하더니, 역시 구라인 모양이다.
“...우리도 빠져나간다.”
결단을 내린 짝퉁닌자가 앞장섰다.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와 호흡을 보아하니 군사훈련을 받은 게 확실했다. 다른 닌자마을의 일원인가? 아니면 비밀조직? 이제 정체를 확인할 차례다.
다행히 닌자슈트를 속옷 대신 입어서 변장에는 문제가 없었다.
스슥
뜬그림자를 사용해 은신한 뒤 녀석들의 뒤를 쫓았다. 백성들과는 다른 길로 빠져나가는 걸 보아하니 샛길을 알고 있는 거 같다.
이 새끼들이 알고 있는 게 뭘까? 슬슬 궁금해진다.
“휴.”
동굴을 무사히 빠져나온 놈들이 흙먼지를 털었다. 녀석들이 이리저리 잡아당기며 몸을 털자 신축성 좋은 쫄쫄이가 쭉쭉 늘어났다. 살짝 탐나네.
하나 압수할까?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지금쯤이면 질서유지군도 도착했겠지.”
“제가 시간을 벌겠습니다.”
짝퉁닌자 리더의 말에 먼저 입을 연 건 따까리(여자)였다.
목소리가…. 살짝 익숙한데?
“동지!”
“이 계획을 짠 건 접니다. 책임을 져야 해요.”
여자가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무운을 빈다.”
그 말을 끝으로 따까리들이 흩어졌다.
지켜보던 여자가 고함을 지르려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 여기!!”
따닥!
“켁?!”
그녀를 딱밤 두 방으로 제압한 뒤 돌덩이 옆에다 눕혀놨다. 이거 두 대 맞고 뻗는 새끼가 시간을 벌 수 있을 리가 없다.
“넌 누구냐.”
여자 따까리의 가면을 벗겼다. 누구길래 내 행세를 하고 익숙한 목소리를 가진 걸까.
검은 피부, 금색 머릿결, 사납게 위로 올라간 눈썹.
“이게 뭔….”
정체는 상당히 뜻밖의 인물이었다.
“금태양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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