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60화. 광산과 홍삼캔디와 천마 히틀러 (5)
* * *
“허억!”
천마 감마 레이 버스트. 그 압도적인 파괴력 앞에 내 몸은 가루가 됐으며, 세계는 멸망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정신 차리세요!”
광산에서 만났던 남자 연구원의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확인해보니, 내가 손에 들고 있던 감시자 영혼 어쩌고 물건은 다시 부적이 붙어 있었다.
정황상 연구원이 다시 붙인 거 같았다.
“얼마나 지난 거지?”
상당히 오랫동안 싸웠는데. 실감이 잘 안 난다. 꿈을 꾼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 몇 초 안 지났습니다. 괜찮으세요?”
“문제없다.”
아 씨, 재앙 나만 막는다 이지랄 하고 바로 자빠지니 쪽팔리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쿨하게 일어났다.
혹시나 해 레이더를 발사해보니, 역시나.
“질서유지군이 오고 있다.”
그것도 광산 전체에 쫙 깔린 수준이었다.
천마 히틀러를 구현한 포르노 뭐시기라는 요괴의 처리는 나중에 천천히 해야겠다.
부적으로 땜방된 물건을 천 보따리로 싸 챙겼다.
혹시 챙길 게 더 없나 싶어 주변을 둘러봤는데, 황금색으로 빛나는 검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됐는지 뭉툭하긴 했지만 그래도 멋있었다.
“저건 뭐지?”
“광산 지하에서 발견된 고대용사의 검입니다. 감시자의 영혼을 장시간 구속할 수 있죠. 봉인부적도 저 검에 깃든 마력을 옮겨와 만든 겁니다.”
전설 등급 아이템 정도는 되지 않을까. 챙기기로 했다.
“용사가 아니라면 쓸 수 없는 검입니다. 들 수는 있지만 검자루를 잡을 수는 없어요.”
“상관없어. 이거 좀 들고 따라와라.”
“네.”
연구원의 부연 설명을 무시하고 비앙카에게 챙기라고 명령했다.
“내 뒤를 잘 따라오도록.”
연구실에 잡혀 있던 아이들은 약 서른 명.
비앙카와 이 연구원까지 합해 총 서른두 명을 내가 전부 안전하게 지키면서 좁은 동굴을 빠져나가야 한다.
평소처럼 도와줄 동료도 없는 상황.
이 목걸이로 트리보에게 바로 연락을 넣을 걸 그랬나.
아니다. 광산하고 우리 집 위치는 상당히 머니 사태가 끝나기 전까지 오지 못할 가능성이 더 크다.
한번 해 보자. 최대한 아이들 위주로 지키면서.
“저쪽이다!”
갈색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창과 방패, 활을 들고 몰려온다.
싸움 좀 해본 놈들만 모아놨는지 급하게 움직이는 일 없이 진형을 갖추고 천천히 다가온다.
“조셉 망글로브 님은 어떻게 됐지? 대답해라!”
선봉에 선 병사가 샤우팅을 터뜨렸다.
자세히 보니, 아멜리아의 집에서 봤던 얼굴에 상처 난 남자였다.
질서유지군이 마탑과 연합해 저지른 끔찍한 짓을 직접 목격했으니, 그들과 아멜리아의 관계를 알아보는 건 이제 필수가 되었다.
나중에 ‘인터뷰’를 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 할까요.”
연구실에서 득템한 몽둥이를 들어 올린 비앙카가 물었다. 처음 봤을 때처럼 두려움이 가득한 눈은 아니었다.
죽음을 각오한 눈. 이렇게 부르는 게 맞을 것이다.
여동생과 다시 만나니 용기가 솟아오른 건가.
“아이들을 최우선으로 지켜라.”
그렇게 대답하고 얼굴에 상처가 난 남자가 원하는 대답 또한 해 주기 위해 목청을 높였다.
“그 노친네는 골통을 박살 내 죽였다. 마지막까지 홍삼캔디와 엄마를 찾으며 울부짖더군. 너네도 그렇게 될 거다.”
“정신 나간 놈이! 죽여!”
재미없고 뻔한 반응이다. 하지만 죽을 때는 짓밟힌 개구리처럼 쇼킹한 반응을 보여주겠지.
챙챙챙챙!
발사된 화살을 닌자도 두 자루를 휘둘러 쳐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쇠와 쇠가 부딪히면서 작은 불꽃을 피워낸다.
뒤에는 아이들이 있었기에 피하거나 물러날 수 없었다.
좁은 공간이라면 오히려 나에게 유리하다.
“스타버스트 스크림 (Starburst Scream).”
두 검을 무자비하게 휘둘러 질서유지군을 방패째로 도륙 냈다.
기술 이름이 약간 다르니까 저작권에 걸리지는 않겠지.
“으아아악!”
어느샌가 뒤로 빠져 있던 얼굴에 상처 난 남자의 몸을 대각선 아래로 벴다.
숙성된 토마토즙이 사방으로 퍼져나가 갈색 갑옷에 붉은 토핑을 칠했다.
“아, 안돼!”
“개시발!”
이길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몇 놈이 창과 방패를 던져놓고 내달리기 시작했다.
좋다. 이제 두려움이 급속도로 퍼져나가 진형을 박살 낼 것이다.
내가 할 일을 따라가서 모조리 죽이는 것뿐.
몰려온 놈들은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죽인 후에야 뒤를 돌아봤다.
“이, 이걸 어떻게….”
비앙카가 덜덜 떨면서 바닥에 누운 연구원을 끌어안고 있었다.
연구원의 가슴팍에 화살 하나가 꽂혀 있었다.
“누, 눈먼 화살에 아이들을 구하려다가 그만….”
비앙카가 나름대로 지혈을 하려고 한 모양이지만, 흘러나온 피가 너무 많고 그 색깔이 진했다.
“연구원.”
생기를 잃어가는 녀석에게 다가갔다.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결국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연구원은 입술을 움찔거리며 중얼거리고 있었다.
“저 같은…. 놈이라도….”
그의 마지막 말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였다.
“아무리 쓰레기 같은 놈이라도…. 어른으로서 아이들 몇 명 정도 구할 권리는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게 동기였었나.
“이름이 뭔가?”
“샘…. 스탠필드….”
그 말을 끝으로 연구원의 숨이 끊어졌다. 난 아이들을 보기 위해 몸을 돌렸다.
“이 남자의 이름을 기억해라.”
“...”
“너희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은인이다. 평생 기억하고 살도록.”
아이들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는 할까.
이해하지 못해도 좋다. 어른이 되면 알게 되겠지.
“출발한다.”
연구원의 시체를 들쳐메고 앞장서 광산을 빠져나왔다.
피가 옷에 잔뜩 묻으면 냄새가 배니 천 쪼가리로 연구원의 상처 부위를 막아놓는 건 빼놓지 않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꼭 갚겠습니다.”
여동생을 끌어안은 비앙카가 감사의 눈물을 질질 흘린다.
눈물로 밑에 있는 여동생의 머리를 감을 수 있을 정도였다.
아니, 할 말이 있었는데 그렇게 쳐 울면 하기가 힘들잖아.
“흰돌고래 저항군, 이라고 했나.”
눈물을 그칠 생각이 없어 보여 그냥 말하기로 했다.
비앙카와 여동생. 어쩐지 라미나와 디아나가 생각났다.
라미나가 살아 있었다면 어땠을까. 디아나는 온종일 웃고 있었을까.
“그렇습니다.”
“놈들과 만나고 싶다. 가능한가?”
“...가능합니다. 제가 꼭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고민하던 비앙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비앙카는 구한 아이들을 부모의 품 또는 안전한 곳에 보내기 위해 떠났고, 나는 좀 쉬기 위해 떠났다.
용사의 검인지 뭔지 하는 금삐까는 내가 다시 챙겼다.
***
집에 도착하고 하룻밤 잔 다음 어제 있었던 일을 말하기 위해 일행을 모았다.
방금 상황설명을 마쳤으니, 이제 광산 바깥에서부터 생각하고 있던 말을 꺼낼 생각이다.
“디아나.”
“네?”
“네 언니는 죽었어. 이젠 없어.”
‘하지만 네 가슴 속에 살아가’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바로 반응이 왔다.
“...거짓말이죠?”
“너는 내가 거짓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렇지만 전에는 살아 있다고 하셨잖아요….”
“그건 구라였단다. 미안해. 그때는 진실을 알리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최대한 솔직하고 담백하게 털어놨다. 영원히 숨길 수 없는 비밀이라면, 털어놓는 게 좋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디아나, 미안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네 반응을 보는 게 두려워서 그랬나 봐.”
오르페가 디아나를 끌어안았다. 이미 합의가 된 사항이라 그런지 도움이 빠르다.
몇 시간 동안 목 놓고 울던(파충류라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디아나가 풀린 눈으로 날 바라봤다.
“왜 이런 얘기를 하신 거죠?”
“...마지막으로, 딱 한 번 묻겠어.”
이제부터가 본론이다.
“평범한 사람으로 살고 싶어? 아니면 돌연변이 닌자 공룡으로 살고 싶어?”
아마 디아나도 많이 고민했던 내용….
“평범한 사람이요.”
이야, 조금의 고민도 없이 01. 초 안에 말하네. 이 매정한 꼬맹이.
“...그렇군. 알겠다. 이유는….”
“싸우는 건 무서워요. 누군가를 죽이고, 죽을 수 있다는 게 겁나요. 언니는 인간이 되고 싶어 했어요.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했어요…. 저도 그래요.”
말 진짜 존나 빨리하네. 느리게 말하면 내가 듣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솔직히, 길어지면 졸리긴 하다.
“뭘 하고 싶은데?”
“...제빵사가 하고 싶어요.”
“빵 만들어서 너 혼자 다 먹게?”
“아, 아니에요.”
뭐, 그렇단다. 선택은 존중해야지.
난 오르페에게 눈치를 줬다. ‘이 얘기는 네가 해 줘’라는 표정으로 말이다.
“내일부터 기숙학교에 널 보낼 거야. 네오솔리트론이 아니라, 조금 더 먼 곳에 있는 학교로.”
오르페가 말을 이었다. 긴 내용이지만 대충 설명하자면, 그 학교에서 인간답게 사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고, 돈은 우리가 지원해 준다는 내용이었다.
기숙학교.
뭐, 지구로 따지자면 돈 좀 있는 사람들이 선택하는 최고급 엘리트 초등학교쯤 되지 않을까.
확답받은 디아나는 지금은 슬퍼할 시간을 갖고 싶다며 방 안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왜 그런 거야?”
오르페의 말에는 아마 여러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왜 언니가 죽었다는 걸 털어놓기로 했냐, 왜 디아나를 방생해 준 거냐?…
물론 내 나름의 생각이 있었다.
식인 요괴였던 라미나는 언니로 남기를 선택했고, 매드 사이언티스트 연구원은 어른으로 남기를 결정했다.
아직 악행을 저지르지 않은 디아나라면 그들보다 더 좋은 선택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냥.”
이런 시시콜콜한 생각을 다 말하는 건 쪽팔린다. 대충 말하고 고개를 돌렸다.
“응.”
오르페가 재밌다는 듯 씩 웃는다. 얄밉지는 않았다.
“저건 뭐라고 했지?”
오르페가 손가락으로 황금색 검을 가리켰다. 광산에서 득템한 물건이다.
“고대용사의 검이라고 말했잖아.”
“...연구실에 있던 걸 주워왔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었나. 귀찮아서 설명을 생략하게 된다.
“고대용사의 검….”
오르페가 가만히 앉아 있던 트리보와 시선을 교환했다.
“내가 만져봐도 될까?”
“맘대로. 근데 그거 용사가 아니면….”
오르페가 검의 손자루를 쥐었다. 황금색 빛이 번쩍하고 나더니 뭉툭한 칼날이 날카로워졌다.
“닌?!”
뭐야 이게.
[역시, 피로 맺은 계약이라 후손도 쓸 수 있었다.]
트리보가 헛소리를 지껄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무래도 연구원 새끼가 나에게 구라를 친 거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