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화 〉 61화. 비탄의 쇼군 (1)
* * *
광산 사건으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준비됐어?”
지금 내가 오르페, 트리보와 함께 있는 곳은 인적이 드문 산.
기숙학교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디아나가 떠난 지금 대련하기로 정했다.
새 무기를 얻었으니 성능을 시험해봐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이지.”
오르페가 황금색 창을 들어 올렸다.
고대용사의 검, 이라고 불렸던 구라쟁이 전용 무기는 어느 순간 창으로 바뀌었다.
[오르페. 네가 원하는 무기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검을 잡아라. 그럼 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라는 트리보의 수상쩍은 발언을 들은 오르페가 변환(?)시킨 것이다.
저 무기는 형상 변환 금속 이라도 되는 건가? 이해할 수 없는 구조다.
“이얍!”
그녀가 창을 휘둘렀고, 난 닌자도를 휘둘렀다.
수십 번의 공격을 주고받은 후, 난 이상함을 느꼈다.
“어라…?”
내 몸이 둔해진 느낌이다. 아침에 밥을 너무 많이 먹었나? 지금 소화 중이라 그러는 건가?
뭐가 됐든 이상한 현상이다.
공격을 나누기 전 전투력이 10이었다면 지금은 6~7이 된 느낌이다.
[역시 그랬군. 감시자와 영혼이 섞여버린 존재라 고대용사의 검에 취약한 거다.]
트리보가 또 헛소리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뭔데 씹덕 새끼야.
한 번 들어볼까 하다 너무 졸려서 포기했다.
“이런 물건을 붉은고래 마탑에서 더 가지고 있을까요?”
[고대용사의 검과 비슷한 성능을 가진 장비는 많지 않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고대 용사의 방패와 갑옷…. 정도가 있겠군.]
“그것마저 마탑이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해야겠죠?”
[일단은 그렇다.]
“양산을 해낼 수도 있을까요?”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마탑의 기술력이 어느 정도인지 직접 보지 못해서 판단하기 어렵군.]
“로빈. 조심해야겠어.”
트리보와 이상한 대화를 나눈 오르페가 나에게 측은한 미소를 보낸다.
“뭘 조심해?”
“이제부터 마탑과도 싸울 거라 했잖아.”
“그렇지.”
붉은고래 마탑. 인체실험을 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집단이다.
질서유지군에게 집중해 그런 놈들을 모르는 체하고 방치한다면 생지옥이 펼쳐질 거고, 낙원은 도래하지 않을 거다.
“놈들이 이런 물건을 대량으로 가지고 있으면, 아무리 너라도 힘들 거야.”
“그렇겠군.”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지 오르페가 입을 합 닫아버린다. 저러다가 볼까지 부풀리게 생겼네.
“뭐, 어떡하냐. 대비할 수단이 없잖아. 그 정도 페널티는 감수하고 싸워야지.”
내가 선택한 싸움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틸 생각이다.
“...벌써 선택했구나.”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난 하고자 하는 건 반드시 해내는 사람이다.
포기? 그딴 건 배추를 셀 때나 쓰는 말이지.
“좋아. 나도 마탑에는 개인적인 원한이 있거든.”
오르페의 눈이 깊어진다.
“...개인적인 원한이.”
“자, 그러면 여기까지. 날이 저물고 있으니 난 슬슬 가볼게.”
뭔가 골치 아픈 얘기를 할 거 같아서 끊었다.
야사요를 탐지하기 위해 요즘 들어 설명(3줄 요약만 받음)도 들어주는 나지만, 이런 부류의 얘기까지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내 절친인 오르페라 해도 중요한 ‘업무’가 남아 있는 나를 피곤하게 만들 수는 없는 거다.
“저항군, 맞지?”
“닌닌.”
어제 비앙카가 광산 근처를 떠돌며 신호를 보냈다.
오늘 저녁 저항군과 접선한다.
“광산에서 보여준 모습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방심하지는 마. 소문은 좀 안 좋거든. 뭐, 그 소문까지 마탑이 퍼트린 것일 수도 있지만.”
오르페가 나에게 종이를 내밀었다.
***
종말의 날을 막기 위해 ‘흰돌고래’ 저항군에 합류하라!
이 모든 내용은 절대 거짓이 아니며, 일체의 과장조차 없다!
붉은고래 마탑주는 다른 차원에서 온 악마다!
종말의 날이 되면 마탑주가 하늘로 쏘아 보낸 파괴병기 ‘고래의 숨결’이 가동해 모든 왕국의 수도를 무력화시킬 것이며, 비밀리에 비축해온 무기들과 지하기지에 잠들어 있는 끔찍한 키메라들을 이용해 세계를 황폐화시킬 것이다!
고대 용사조차 존재하지 않는 지금, 맞서 싸울 수 있는 건 흰돌고래 뿐이다! 당신도 합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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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게 레지스탕스야, 레스토랑스야?”
“저항군이 뿌린 전단지야. 이상하지만, 한 번 자세히 읽어보는 것도 좋은 거 같아.”
“됐어.”
열심히 자료를 수집해 온 오르페한테는 미안하지만,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아무리 봐도 어그로를 끌기 위해 눈물의 뻘짓을 감행하는 시장바닥 상인의 헛소리다.
이런 걸 진지하게 듣는 새끼가 병신이지.
“여기서 창이나 열심히 휘둘러 봐. 대련 상대는 트리보가 해줄 거야.”
[난 전투용이 아니다.]
“뭐 어때. 어차피 박살이 나도 다시 원상복귀 되잖아. 샌드백이라도 해.”
[너무하다. 내가 수리검도 만들어 주지 않았나.]
“음.”
트리보가 만든 수리검. 광산에서도 잘 써먹었지. 이렇게 나오면 나도 할 말이 없다.
“어쨌든 오르페 수련이나 좀 도와줘.”
[알겠다.]
떠나려고 말을 돌리니, 오르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잘 갔다 와. 방심하지 말고.”
“네 엄마.”
걱정이 우리 엄마보다 많다.
***
질서유지군을 피해 빈민가로 들어가 닌자레이더를 발사했다.
우우우웅
역시나, 만나기로 한 장소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골목길에서 닌자슈트로 갈아입고 그곳으로 향했다.
“나다.”
펼쳤던 뜬그림자를 풀고 저항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과감하고 파격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등장하고 싶었지만, 낡은 집 안에서 고된 하루를 끝내고 자고 있을 백성들을 깨울까 봐 그만뒀다.
“어엇.”
깜짝 놀라며 뒷걸음치는 여자 셋과 남자 둘.
레이더로 확인했던 것처럼 다섯 명의 사람이 약속장소에 있었다.
해진 옷과 정돈되지 않은 머리, 무장이랍시고 나무로 된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있는 젊은 남녀들.
저항군보다는 빈민가 주민에 가까운 차림이었다.
내가 ‘닌힘숨’을 하는 것처럼, 이 녀석들도 ‘저힘숨’을 하는 거겠지.
“오셨군요.”
침착하게 생긴 단발머리 여자가 느린 동작으로 나에게 다가왔다.
위험한 야생동물을 다루는 사육사 같은 움직임. 날 경계하고 있는 게 확실했다.
내 명성을 들었다면 그럴 만도 하다.
“탈주닌자는 조용한 밤에만 움직인다. 이건 상식이다.”
“...그런가요? 몰랐네요. 골돈에서는 아침부터 움직였다고 들었거든요.”
“예외의 경우는 늘 있는 법이지. 골돈의 백성들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상식보다 중요한 건 백성의 안전이니까.”
“백성의 안전….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인 단발녀가 다른 동료들의 눈치를 살폈다.
눈동자를 규칙적으로 이리저리 굴리는 게 자기들만 아는 신호를 보내는 것 같다.
눈깔 소통을 끝낸 단발녀가 다시 이쪽을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마리, 흰돌고래의 간부입니다.”
“탈주닌자다. 이름대로 무소속이지.”
“죄송하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습니다.”
“죄송하다?”
마리와 저항군이 각 잡힌 자세를 취한 후 고개를 숙였다.
“아이오지 광산에서 탈주닌자님을 사칭했습니다. 이유가 있었다고는 하나,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사과를 받아주지.”
저항군이 날 사칭한 것에서 오는 분노는 다 사라진 상태다.
사칭은 야사요에 필적하는 행위까지는 아니었으니.
좋다. 이제부터 본론이다.
“내가 왜 너희와 접촉했다고 생각하나?”
“공동의 적인 붉은고래 마탑과 그에 협력하는 질서유지군을 무찌르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준비해왔는지 답변이 빠르다.
“우리가 협력해야 할 이유는 많아요. 그건”
너무 길어서 생략했지만, 그녀의 말을 요약하면 이렇다.
흰돌고래는 정보가 있고, 당신에겐 힘이 있으니, 협력했을 때 긍정적인 효과가 일어날 거다.
같이 힘을 합쳐 마탑을 무찌르자.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라 빠르게 받아들인 후 이야기를 진행시켰다.
녀석들이 띠꺼운 짓을 하면 그때 손절하거나 막아서면 된다.
정보를 몇 개 더 주고받은 후, 며칠 전부터 생각하던 말을 꺼냈다.
“아멜리아 홀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나?”
“아, 아멜리아 홀이요?”
눈에 띄게 당황한 마리가 말을 더듬었다. 아는 건 확실해 보인다.
“그래. 질서유지군과 모종의 관계를 맺고 있는 거 같아 조사하는 중이지.”
몰래 집 안에 들어가 곳곳을 뒤졌기는 했다.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는 게 문제지만.
하녀인 아달리에게 살짝 물어보고 싶었는데, 날 볼 때마다 급하게 도망가서 뭘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이유로 정체된 상황이니 힌트가 필요했다.
“...놀랍네요. 그녀 이야기를 마지막으로 꺼내려 했거든요.”
“뜸 들이지 말고 말하도록.”
다행히, 흰돌고래는 아멜리아의 비밀을 알고 있는 거 같았다.
“아멜리아 씨는 변검경의 딸입니다.”
‘닌?’이 튀어나오려는 걸 참아내고 이야기를 계속 들었다.
변검경의 딸? 그런 말은 한 번도 안 했는데?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하는 내통자이기도 하죠.”
“그게 뭔.”
들을수록 어이가 없네. 사무라이의 딸이자 내통자라니.
“그 거짓말 진짜인가?”
“지하 연구소의 위치를 알고 있는 사람을 지목한 것도 그분입니다.”
뭐, 어쩌겠는가. 빠르게 납득하고 지나가기로 했다.
변검경이 딸바보라면 정보를 얻기도 쉽고, 의심당한 확률도 낮겠지. 내통자로서는 최고의 조건을 가지긴 했다.
“아멜리아 이야기를 꺼내려고 했다 들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한 거지?”
“이제부터 그녀가 당신을 도울 겁니다.”
마리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나에게 전달했다. 우체통같이 생긴 이상한 물건이 그려져 있었다.
“장터로 가서, 거기 그려진 물건을 확인하세요. 중요한 정보가 적힌 쪽지가 담겨 있을 겁니다. 저항군과의 소통도 이걸로 하시면 됩니다. 쪽지를 남기시면 우리가 확인하겠습니다.”
“이렇게 비밀스럽게 할 거면 아멜리아의 이름을 말할 필요가 없을 텐데.”
뭐지? 자기과시? 이해가 안 된다. 그냥 우체통으로 가라고 하면 되지 않나.
“아멜리아 씨의 부탁입니다. 전적으로 당신을 돕고 싶어 하세요. 그녀는 변검경에 대한 정보를 아주 많이 알고 있어요. 마탑과 관계를 맺고 있는 변검경이니,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나 이런 사람이니 믿고 맡겨라. 뭐 이런 건가? 꺼림칙함이 가시지 않는다.
아멜리아는 나와 일행들이 사는 집을 싼 가격에 내놓았다. 골돈에서 싸워줬다는 이유로 말이다.
아멜리아가 내가 탈주닌자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아달리가 닌자마을에 있었던 일을 털어놓은 상태라면?
둘이서 날 속이고 있다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찜찜한데.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다.
“그렇게 하지. 용건은 끝인가?”
“네. 중요한 것들은 쪽지로 전달될 것입니다. 우린 이만 가보겠습니다.”
할 말을 마친 저항군과 헤어지고 바로 아멜리아 집으로 향했다.
지구에선 ‘쇠뿔도 단김에 빼라’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우체통이고 나발이고 내 귀로 직접 들어야겠다.
그리고 아달리, 넌 이제 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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