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화 〉 62화. 비탄의 쇼군 (2)
* * *
한 번 침입한 아멜리아 집으로 다시 들어가는 건 쉬웠다.
병풍이나 다름없는 질서유지군의 순찰 루트는 물론이고, 깔린 마법 함정마저 다 파악한 지 오래.
나름대로 신경 써서 준비한 거 같지만, 한없이 슈퍼닌자에 가까운 나에겐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달리가 묵고 있는 숙소로 먼저 들어갔다.
배신감이야 그렇다 쳐도, 아멜리아는 아달리랑 단둘이서만 살기 때문에 완벽범죄, 아니 완벽침입? 을 위해서라도 이년부터 제압해야 한다.
아달리는 하녀가 쓰기엔 지나치게 푹신해 보이는 침대 위에서 정신없이 자고 있었다.
코코넨네...
닌자마을 출신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방비한 모습. 닌자마을에서 배운 것들을 전부 잊은 게 아닐까?
수준 차이가 크긴 했지만, 같은 닌자 동지로서 용납할 수 없다.
“헛, 누”
내 손이 입에 닿기 전에 눈을 뜬 아달리의 입을 막았다. 썩어도 준치라더니, 그래도 직감은 죽지 않은 거 같다.
말없이 그녀의 입을 더욱더 세게 틀어쥐었다.
“읍읍…!”
단련을 게을리하지는 않았는지 저항이 거세다. 탄력 있게 꿈틀거리는 몸이 미꾸라지 같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고 노력하는 아달리의 팔다리를 붙잡은 뒤 입에 테이프를 붙였다.
지구의 테이프가 아니라, 끈끈이풀을 천에 발라 만든 판타지 세계식 테이프다.
오르페의 도움으로 만든 꿀템.
“조용.”
미리 준비한 밧줄로 아달리를 꽁꽁 묶었다. 이름하여 닌자 귀갑묶기.
대머리 교관에게 썼던 닌자 본디지 플레이와는 다른 기술이다.
“아멜리아 다음은 너다.”
“끄우읍~!”
완벽하게 제압한 아달리를 바닥에 눕혔다. 배신자에게 푹신한 침대는 사치다.
이제 아멜리아를 심문할 준비는 끝났다.
망설임 없이 아멜리아의 침실로 향했다.
촤륵
식욕을 돋우는 붉은 커튼을 쳐내자 새근새근 자는 아멜리아의 모습이 보였다.
꿀밤을 먹이고 싶은 욕구를 참아내고 그녀 옆에 조용히 누웠다.
“...”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는지 일어나지 않는다.
“아멜리아야. 아빠가 왔어요. 널 위해 오태식이 두마리치킨도 사 왔단다. 순살이야.”
“...응?”
눈을 뜬 그녀의 멱살을 붙잡고 들어 올렸다.
“끼후웃!”
사람을 불안하게 했으면서 우아한 자세로 잠이나 쳐 자다니. 이것도 일종의 범죄가 아닐까?
범죄태평죄? 그거 비슷한 이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내 이름을 말해 봐.”
자백을 들을 시간이 왔다. 그녀와 눈을 맞춘 후 눈깔빔을 발사했다. 당연하지만, 진짜로 눈에서 레이저 빔을 뿜어낸 건 아니다.
아멜리아, 그녀는 내 정체를 알고 있을까.
“컥…. 당신은...”
“어서 내 이름을 말해. 난 지금 매우 화난 상태다. 활화산 모드라는 뜻이지.”
재촉하면서 아멜리아의 목을 마구잡이로 주물렀다. 대답하지 않으면 분질러 버리겠다는 무언의 협박.
“...탈주닌자잖아요. 왜 여기에 계시는 거죠? 저항군이 장소를 알려주지 않았나요?”
“음?”
“수, 숨 막혀요. 소리 지르지 않을 테니 목에서 손 좀 떼주세요.”
“네가 알고 있는 이름이 더 있을 텐데.”
“골돈의 수호자, 마르톨란의 심판자. 뭐, 이런 거 말인가요?”
시발. 그걸 또 듣고 싶진 않았는데.
“있잖아. ‘로’자로 시작하는 거 말이야. 아달리에게 들었을 텐데?”
“로? 로… 모르겠군요. 아달리가 이곳저곳에서 정보를 수집해오긴 하지만,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변검경 쪽 정보가 아니라면, 저항군이 더 잘 알고 있을 거예요.”
이건 내가 원하는 반응이 아닌데. 그것보다, 아빠를 이름이 아닌 호칭으로 부르다니. 사이가 안 좋은 건가?
“그것밖에 모르는 건가?”
“그것 말고 더 있나요?”
똘망똘망한 눈을 껌뻑거리는 게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 거 같다. 뭐지? 내가 착각했다고? 그것만은 인정할 수 없다.
“왜 나에게 이름을 알려준 거지?”
“신뢰 관계를 쌓고 싶어서요. 내 위치상 당신과 직접 만날 수 없으니, 이렇게라도 해야 한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지금 만나버렸네요?”
그렇게 말한 아멜리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신뢰 관계를 쌓고 싶다? 어째서인가?”
“당신만이 변검경과 맞설 수 있으니까요. 우리끼리 의심하면서 싸우는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어요.”
“내가 변검경을 죽였으면 하는 건가?”
“...물론이죠. 그는 악당 중의 악당이자 전쟁광입니다. 법과 질서라는 명목하에 수많은 사람을 죽였어요. 텔라스 항전때 아이들까지 죽이라 명령한 게 변검경입니다.”
“네 아빠잖아.”
“제가 변검경의 딸이라 불안하신가요?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저보다 그를 증오하는 사람은 없을 거니까요.”
살기를 뿜어내는 아멜리아의 눈은 거짓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아빠를 죽이고 싶어 하는 딸이라니. 역시, 이곳은 말세적인 판타지 세계.
뭐, 이해 못 하는 건 아니다. 가족 중에 야사요가 있다면 나도 망설임 없이 죽였을 테니까.
우리 집 유인원들은 자기들이 야사요가 아닌 것에 감사해야 한다.
“그렇다 치자. 모험가에게 집을 싼 가격에 넘긴 이유가 있나?”
슬쩍 떠보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난 아직 의심을 버린 게 아니다.
“모험가…. 로빈 씨와 오르페 씨 말씀인가요?”
“그래.”
“...그것까지 조사하신 건가요?”
“당연하지. 조사하면 다 나와. 그러니 대답하도록.”
아멜리아가 내 물음에 논리적이지 못한 답변을 내놓는다? 바로 닌자도가 푸른 불꽃을 뿜을 것이다.
“골돈을 지키기 위해 피땀 흘리며 싸우신 분들이에요. 선행은 대가가 따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네가 선행에 대가를 주는 사람이야?”
이건 뭐 판타지 산타클로스도 아니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난 그 수염 난 고도비만 늙다리 새끼를 믿지 않는다.
왜냐? 그 새끼가 착하게 지낸 나는 무시한 채 여동생에게만 선물을 줬기 때문이다. 그것도 20년 동안이나 말이다.
사람을 차별하는 뚱땡이 노인네는 아이들의 희망이 될 자격이 없다.
“그건 아니지만…. 그냥 해주고 싶었어요. 그런 사람들이 돈이 없어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거든요.”
“그건 논리적이지 못해. 골돈의 영주랑 아는 사이라서 싸게 해준 거 아니야?”
논리적이지는 못해도 맘에 드는 대답이라 닌자도를 뽑는 것을 보류했다.
반응을 보니 내가 로빈이라는 것도 모르는 거 같고.
“무, 무슨. 어떻게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시는 거죠?”
아, 너무 많이 말했나? 괜찮다. 무마하면 된다.
내 정체가 드러날 일은 없다.
“오래전부터 널 감시하고 있었으니까.”
“어째서”
“그건 중요하지 않아. 대답해. 왜 나에게 거짓말을 한 거지?”
두 번은 말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닌자도에 손을 올렸다.
“...골돈의 영주와 만난 적이 있긴 하지만, 친한 사이는 아니에요. 어린 시절 잠깐 본 사이죠.”
“그러면 내게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 모험가들에게 거짓말을 한 게 되는군.”
“절 의심할까 봐 그랬어요. 모험가분들은 험한 일을 많이 겪어, 갑작스러운 호의를 의심한다고 들었거든요.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에요.”
“음.”
아멜리아는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는 건가. 거짓말은 나쁘지만, 이것만은 예외다.
“합격이다. 넌 내 협력자가 될 자격이 있어.”
닌자도를 거두고 손을 내밀었다.
“갑자기요?”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도 얼떨결에 내 손을 붙잡는 아멜리아.
“네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었던 것뿐이다. 지금까지 있었던 일은 그걸 위한 과정이라 생각하도록.”
“...야밤에 많이 놀랐지만, 뭐, 좋아요. 다들 자신만의 방법이 있는 거니까.”
빨리 수긍한 아멜리아. 그녀의 손을 10번 정도 흔들었다.
“변검경에 대한 정보가 많다 들었다.”
“...그렇습니다. 저택 설계도마저 가지고 있죠.”
뭐? 저택? 설계도? 이러면 내가 더 편해진다.
“지금 넘겨라.”
“네?”
“어서.”
“...생각이 있으시겠죠.”
그녀가 넘긴 설계도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닌자세계의 오랜 격언이다.
“녀석은 내가 처리하지.”
스스스슥
창문으로 나온 후 울타리를 넘어 변검경의 저택으로 향했다.
목걸이를 통해 트리보에게 연락을 넣는 것도 잊지 않고.
오르페가 말할 게 있는 거 같다고 하는 트리보의 말을 무시하고 연락을 끊었다.
보나 마나 잔소리다.
아, 깜빡하고 아달리를 안 풀어줬네. 알아서 하겠지?
끄우우우읍~!
***
설계도는 생각 이상으로 쓸만했다.
네오솔리트론의 중앙에 있는 변검경의 저택은 온갖 마법 함정이나 보안 마법이 설치된 곳이었다.
한 번이라도 실수하면 바로 들키는 삼엄한 장소를, 가볍게 침투했다.
“...”
5층까지 구석구석 살펴봤지만, 별 건 없었다.
변검경의 집무실까지 들어가도 마찬가지였다.
한손검, 레이피어, 시미터, 롱소드, 할버드, 파이크.
온갖 무기로 치장된 그 공간에 변검경은 없었다.
제이드 홀
고급스럽게 포장된 명찰이 빛난다. 저게 변검경의 이름인가.
‘홀’이 들어가는 걸 보니 아멜리아와 혈연관계인 건 확실하다.
변검경이 오늘 저택을 비운 게 아니라면, 갈 곳은 이제 한 군데뿐이었다.
설계도에 표시된 지하공간.
그곳에서 놈이 마탑의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이상한 음모를 꾸미는 건 아닐까?
지하공간으로 향했다.
잠금 마법이 걸린 돌문이 있었지만, 설계도에 적힌 비밀번호대로 패턴을 맞추니 소리조차 내지 않고 열렸다.
빛 하나 들어오지 않는 텁텁하고 어두운 공간.
어둠에 적응한 눈으로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나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
지하공간은 선반만 가득했다. 그리고 그 선반들에는…. 인간으로 추정되는 동물의 해골만 가득 차 있었다.
이게 대체 뭐란 말인가. 변검경 이 새끼, 식인종이었나?
그렇지 않고서야 사람 머리뼈를 이렇게 잔뜩 모아놓을 리가 없다.
가장 가까운 선반에 놓인 머리뼈를 들어 올렸다.
이런 시발, 진짜 사람 머리뼈가 맞았다.
“리사 막시밀리온.”
“닌?!”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몸을 틀었다.
한 남자가 지하공간 끝에서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놈이 천천히 다가온다.
“잿빛늑대 기사단의 단장입니다. 제가 처음으로 ‘집행’한 사람이죠.”
키 작은 소년 사무라이, 변검경이었다. 정확히는, 소년을 닮은 아저씨겠지만.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온 지는…. 물어 봤자 의미 없겠군요.”
놈이 선해 보이는 미소를 짓는다.
“탈주닌자. 절 죽이러 온 겁니까?”
만들어진 가짜라고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교묘한 미소를.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