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64화 (64/119)

〈 64화 〉 64화. 로드 투 닌자 (1)

* * *

“로빈.”

오르페의 얼굴이 보인다. 걱정과 분노가 반 섞인 표정이다.

“­익숙한 천장이다.”

여기는 우리 집인가.

피를 많이 흘려서 그런지 비몽사몽 하긴 했지만, 무사히 집에 도착한 것 같다.

“내가 조금 더 늦게 도착했다면 죽을 수도 있었어.”

목소리에 스산한 기운이 스며 있다. 엄청나게 화났네.

“그렇군.”

“나와 상의했어야지. 말도 없이 바로 저택으로 가면 어떡해.”

“트리보에게 말은 했는데.”

“지금 장난해?”

“아, 아니. 그냥 그렇다고.”

뭐야. 왜 이렇게 무서워.

“...넌 내 은인이야.”

“...”

“싸우는 법을 알려 준 스승이기도 하고.”

조용히 듣고만 있었다.

“소중한... 친구이기도 해.”

라멘이 좀 먹고 싶긴 한데.

“그런 사람이 오늘 죽을 뻔했어. 난 아무것도 모를 뻔했고.”

따끈한 국물 한 번 들이키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군.”

“내가 왜 화난지 알겠어?”

그럼 구라 안 치고 바로 벌떡 일어날 수 있는데.

“그래.”

돼지 뼈를 우려낸 국물이 필요하다.

“...그럼 됐어. 며칠간은 푹 쉬어.”

“바깥 상황은 어때?”

도시의 실세인 변검경이 죽었으니 질서유지군이 아주 난리가 났을 거다.

“아무 일도 없어.”

...아니면 혼란을 막기 위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조용히 있거나.

질서유지군은 후자를 택했다.

“음.”

그나저나 이렇게 침대에 누워만 있기는 심심한데.

“이상한 생각 하는 거 아니지?”

내 옆에서 의자에 앉아 책을 읽던 오르페가 날 노려본다.

책이 아니라 내 얼굴을 보고 있었나. 이쯤 되면 집착이다.

“변검경. 엄청 강했어.”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처럼 연기해야 한다.

“그렇겠지. 현대의 용사라고 불릴 정도로 칭송받던 사람이니까.”

“그놈이 마탑주를 괴물이라 말했어.”

“붉은고래 마탑주를…?”

“마탑주는 얼마나 강할까.”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변검경이 아니라 내가 죽었겠지.

물론 운도 실력이다. 하지만 운은 대한민국 버스터미널의 와이파이처럼 빵빵하게 터지는 놈이 아니다.

오리너구리 라면에 다시마가 2개 들어있을 확률만큼 낮게 등장하는 놈이 운이라는 새끼다.

전적으로 믿고 신뢰하기에는 무리수가 있다.

“난 더 강해져야 해.”

“지금 그런 생각 할 필요는 없어. 회복에 집중해.”

단호박처럼 말하는 오르페.

“내가 얼마나 더 강해질 수 있을 거 같아?”

“...무슨 뜻이야?”

“지금보다 더 강해지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필요할까?”

“...뭘 하려고.”

좋다. 오르페가 떡밥을 물었다.

“저번에 광산에서 얻은 거 있잖아.”

“설마.”

오르페의 눈이 동그랑땡처럼 변한다. 그 설마가 맞다.

“감시자와 다시 만나고 싶어. 지금처럼 운동도 하기 힘든 상황일 때가 마지막 기회야.”

정확히는 천마 히틀러와 요괴­나치 연합군과 만나고 싶은 거지만, 그게 그거니까.

“안돼. 넌 쉬어야 해.”

아, 진짜. 끝까지 말을 안 듣네.

“오르페. 너 아까 뭐라고 했어.”

“응?”

“소중하고 친구적인 은인이라면서.”

“...”

‘안 들었구나’라는 혼잣말이 들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런 사람의 간절한 부탁이야. 다시 생각해 봐. 그 변검경이 괴물이라 할 정도로 강한 마탑주야. 그런 놈과 장기전을 벌인다고 해 보자. 주변이 다 박살 날 걸. 결국 피해를 보는 건 백성들이야.”

“난 백성들보다 네가 중요해.”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는 내가 압도적으로 강해져야 해. 지금이 마지막 기회야.”

손가락 까딱할 수도 없어 머리만 살짝 들어 올렸다.

“난 내 의무를 다해야 해. 난 부처의 사도이자, 탈주닌자니까.”

간절한 눈빛을 레이저처럼 발사했다.

제발…. 제발 먹혀 줘!

“여기서 내가 안 된다고 말해도, 결국 하겠지.”

자포자기한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말이었지만, 뭐 어떤가.

“그런 사람이니까.”

그 말을 끝으로 오르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적이 덕지덕지 붙은 감시자 유물을 가져온 건 순식간이었다.

“트리보에게 물어봤는데, 부적을 떼면 이제는 다시 붙을 수 없을 거래.”

“마지막 기회다 이거군.”

“그러니 신중하게 한 번만 더 생각해 줘. 다시는 못 깨어날 수도 있고, 지배당할 수도 있어.”

“좋아. 어서 줘.”

“...내 말을 듣지 않는구나.”

오르페에게 유물을 받았다.

“그럴 리가. 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야. 목숨을 맡길 수 있는.”

내 말에 바닥으로 내려가던 오르페의 눈이 천천히 올라온다.

지구와 이세계 통틀어 오르페만큼 나와 대화를 많이 한 사람은 없을 거다.

일명 이세계 짱친.

“너무 걱정 말고 황금창 다루는 연습이나 열심히 하고 있어. 금방 올게.”

부적을 뜯었다.

***

눈 앞에 펼쳐진 건 끝없는 어둠.

“흐흐흐흑...”

멀리서 여자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왜, 왜 그러셨나요.”

그 소리가 점점 선명해지며 나에게 다가온다.

“뭔 개소리야. 주어를 말해.”

개빡치네 진짜.

“567.”

눈앞에서 까까시가 튀어나왔다.

그것도 눈물로 퉁퉁 부어 실눈인지 호빵인지 모를 눈을 하고 있는 까까시가.

뭔 시발.

“전 당신을 사랑했어요. 당신이야말로 내 고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라 생각했어요.”

“천마 히틀러는 어딨냐?”

보나 마나 포르노 뭐시기가 개수작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우리가 파트너가 되는 걸 꿈꿨어요. 강자로 태어나, 멍청이들에게 이해받지 못하는 당신이야말로 제 파트너에 걸맞은 사람이라 여겼는데...”

“기갑­사우루스는?”

“그런데, 당신은 매정하게 절 죽였어요. 저는 당신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는데…. 그저 당신만을 원할 뿐이었는데...”

“언데드 사무라이도 다시 만들 수 있어?”

“567…. 이제는 알겠어요. 당신은 제가 생각하는 고독한 천재가 아니었어요. 과대망상에 빠진 미치광이. 그게 당신이에요!”

까까시가 내 닌자도를 뿅 하고 생성하더니 달려들었다.

“내 가보를 왜 또 네가 들고 있는 건데.”

재빨리 제압하고 닌자도를 빼앗았다.

“아버지께서 물려주신 검이다. 함부로 만지지 말도록.”

당연하지만, 내가 말한 아버지는 그 마운틴­파워드 고릴라가 아니다.

이 우주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친아버지를 말한 거다.

“너무해요…. 너무해요...”

내 닌자도에 반으로 잘린 까까시가 얼굴을 가리고 징징 짰다.

울음소리가 점차 커지더니, 까까시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까까시가 복사가 된다고?

“흐윽…. 흐으윽...”

“타코야끼 살법 마렵네.”

실체도 없는 유령에게 내 아까운 기술을 박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냥 참았다.

“천마 히틀러 데려오라고.”

“흑…. 히힉…. 힉…! 히히히힉!!!”

울던 까까시들이 갑자기 미친 듯이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다 똥구멍에 털 난다.”

“하하! 하하하! 히히히!”

모든 까까시들의 실눈이 날 향했다.

“신노빈. 맞지?”

까까시의 목소리로 내 실명을 말한다…. 알겠다.

“왔구나, 포르노.”

“포르­페나다. 네가 다시 오기 전까지 네 기억을 읽고 있었지.”

수백 명이 넘는 까까시가 동시에 말한다. 피곤하네 진짜.

“재밌는 사실이 하나 있더군…!”

분명 자기 혼자만 재밌는 사실이다.

“이제 슬슬 히틀러를 투입할 때가 된 거 같지 않냐?”

“지구에서 온 자여, 그대는 그곳에서 벨카­투나와 만난 적이 있다.”

“그 새끼는 또 누군데.”

왜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만 하는 걸까.

“주카이 숲에서 이상현상을 겪은 적이 있지 않느냐.”

“잠만 잘 잤는데?”

“...아무래도 말로는 안 통할 거 같군.”

까까시 중 하나가 손을 휘저었다.

검은 화면이 뚝딱 만들어지더니, 한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한다.

침낭을 깔고 자는 내 모습이 보인다. 지구인 시절 모습이다.

­ 우중충한숲에왜혼자찾아와있는거니아이야끼히히히

내 귓가에 기모노를 입은 일본 여자가 뭐라 뭐라 말하고 있었다.

저런 기억은 없는데?

“왜곡된 기억을 보여줘서 나에게 혼란을 줄 셈인가?”

“...그곳에서 널 발견한 벨카­투나는, 감시자의 정신파를 견딜 수 있는 자라면 강력한 하수인으로 육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뭔.”

“벨카­투나는 널 숙주 삼아 이 행성으로 돌아오려 했다. 하지만 네 정신방벽이 너무 견고했기에, 숙주로 만들 시간이 필요했지. 그래서 네 할아버지의 영혼에 침투했다.”

“뭐라고?”

화면에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인다.

­ 하찮은존재여육체를내놓고굴복하라

“안 된다…. 우리 노빈이는…. 안 된다…! 썩 꺼져라…. 이놈…!”

할아버지는 바닥을 구르면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난 그걸 지켜보고 있었고.

­ 저항하지말지어다필멸자여

“꺼져라…. 마귀 사탄아…. 꺼져…!”

“...”

할아버지는 치매에 걸린 게 아니었나.

“벨카­투나는 아직 장악력이 약한 어린 개체였다. 고작 노인네 하나 굴복시키는 것도 힘들어했지.”

포르­페나가 말을 계속 이었다.

“네 할아버지는 끊임없이 저항했고, 굴복하지 않기 위해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결국 곁에서 널 세뇌하겠다는 벨카­투나의 계획은 실패했지.”

“...”

“하지만, 기회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끼이이익­ 텅!

어느새 바뀐 화면, 자동차에 치인 내 몸이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아, 이건 그거다. 내가 이세계로 넘어오게 된 계기.

“어? 어? 학생! 괜찮아?”

폭주족이 차에서 나와 내 상태를 살피고, 나는 오른팔을 휘두르다 전봇대를 잡는다.

“육체가 망가져 영혼이 불안정하게 변하면, 영혼만 빼내어 다른 행성으로 보내기 딱 좋은 상태가 되지. 벨카­투나는 이 기회를 노렸다.”

공중에 떠 있던 기모노를 입은 여자 귀신이 팔을 휘두른다.

우르릉. 쾅!

번개가 내 몸을 강타한다.

“그렇게 벨카­투나는 목적을 이뤘다. 강력한 영혼을 이 행성으로 부르겠다는 목적을.”

화면이 바뀌어 567의 몸에 들어간 날 보여준다.

진짜 567의 영혼인 하얀 물체는 기모노녀, 벨카­투나가 빨아들이고 있었다.

“그런 존재를 숙주로 만들면, 우리의 복귀를 방해하는 마탑주를 몰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567이 된 내가 상태창을 외친다. 대머리 교관이 나를 때리러 달려온다.

“우선 자아를 확립시켜 불순물을 걸러낸 후 취하려 했지.”

화면은 단풍잎 마을에서 누워서 자는 날 비춘다.

“하지만 벨카­투나는 몰랐다. 네가 상상 이상으로, 어쩌면 우주에서 손꼽힐 만큼 강력한 정신방벽을 지닌 존재라는 걸…!”

내 영혼에 침투한 벨카­투나가 비명을 지른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네 정신방벽이 왜 그렇게 강력한지 내 나름대로 조사했지.”

포르­페나가 낄낄낄 웃는다.

“그리고 알아냈다.”

화면이 내 초등학교 시절을 비춘다.

­ 그래, 노빈아. 장래 희망이 뭐라고?

­ 탈주닌자요!

­ ...뭐? 장난치지 말고 진지하게 말해야 해.

“너라는 존재를!”

화면이 급박하게 움직이더니 갑자기 우주를 비췄다.

“난 수많은 은하를 유영하며 이 행성에 당도했다.”

거대한 빛의 존재가 우주를 누빈다.

“난 위대한 다섯 성령 중 하나이며, 개척자며, 설계자며, 건축가며, 선각자다.”

빛의 존재가 한 행성에 떨어지고, 정착한다.

“수많은 지적 생명체들이 날 경외했으며, 숭배했다.”

화면이 지직거리며 꺼진다.

“넌 뭐지?”

다시 켜진 화면은 내가 다니던 중학교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도 한창 싸우고 있는 두 아이를.

­ 맞짱 멈춰~!

멀리서 달려온 내가 둘을 막아선다.

­ 아, 신노빈 또 뭐 하는데!

­ 병신이 싸움 구경 다 망치네.

­ 누가 좀 끌어내 봐.

­ 가지 마. 쟤 커터칼로 만든 표창이랑 수리검 가지고 있어. 언제 던질지 모른다.

­ 그런 걸 왜 학교에 가져와?

­ 미친놈을 이해하려 하지 마. 그냥 무시해. 없는 듯이 행동해.

­ 김지민, 이 새끼, 처맞고 이빨 나가더니 개쫄았네.

­ 이해되긴 해. 나도 건들기는 무섭다.

­ 야. 학주 온다. 저 새끼가 불렀나 봐.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는 괴물?”

까까시, 포르­페나가 날 보고 웃는다.

한 명이 아니라 모든 까까시가 웃고 있었다.

“신노빈. 스스로 만든 거짓된 수렁에 빠진 존재여. 이제 꿈에서 깨어날 때도 되지 않았느냐?”

낄낄낄낄낄­

수백 명이 넘는 까까시들의 웃음소리가 어두운 공간에 울려 퍼진다.

“잘 봤다.”

“음?”

“그래서.”

“...뭐?”

“내 천마 히틀러는 어디 있지?”

이 새끼가 네 번이나 말하게 하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