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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67화 (67/119)

〈 67화 〉 67화. 네오­솔리트론의 불길 (1)

* * *

포르­페나 이 요괴 새끼를 집 나간 누렁이 잡듯이 호되게 팼다.

­ ...

어느 순간부터 움직임을 멈춘 스피릿­고문 요괴.

“드디어.”

하얀 공간이 흩어진다. 이제 현실로 돌아갈 때라고 말하듯이.

몇 초가 지났을까.

“닌자기상법.”

벌떡!

바로 일어났다.

언제나 그랬듯이, 천장부터 확인했다.

낯선 곳인지 익숙한 곳인지부터 알아내야 한다.

거미줄이 잔뜩 쳐진 낡은 천장. 여긴 분명 익숙한 곳이 아닌데.

“낯선­”

“로, 로빈…!”

누군가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짙은 파란색 머리카락과 하늘색 눈. 전보다 확연히 줄어든 다크서클까지.

오르페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날 보고 있었다.

“오르페!”

와락­

그녀를 세게 껴안았다.

전역하고 보는 뽀삐만큼 반가워서, 뽀뽀를 퍼부을 뻔했다.

“모, 못 깨어날 수도 있다고 해서...”

울먹이는 소리가 커진다. 부처의 사도인 나에 대한 믿음이 아직도 이리 부족하다니.

살짝 불경할지도?

“어떤 새끼가 그래. 트리보 그 새끼야? 고철 새끼, 떡이 되도록 맞아야겠네.”

[난 여기 조용히 있는데, 왜 그러나.]

시발 깜짝이야. 이놈도 옆에 있었네.

트리보는 내가 골돈에서 득템했던 도끼를 들고 있었다.

오르페를 안은 채 천천히 살펴보니, 날 지켜보고 있는 건 둘뿐이 아니었다.

“아, 안녕. 하세요?”

모르는 얼굴들과 함께 서 있던 비앙카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니, 잠깐만. 방금 오르페가 날 로빈이라 부르지 않았나?

“닌?!”

오르페의 등을 토닥이던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졌다.

두건이 없다.

“아니 시발!”

“앗!”

너무 깜짝 놀라서 안고 있던 오르페를 밀쳐 버렸다.

“뭐, 뭐야!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비앙카가 여기 있어?”

다시 보니 오르페는 대머리 교관이 사용했던 검은 갑옷을 입고 있었고, 비앙카를 포함한 나머지 사람들은 온갖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비앙카가 속한 세력은 흰돌고래니, 이 새끼들 전부 흰돌고래겠지.

흰돌고래가 내 정체를 안다? 아니, 어떻게, 왜? 오르페가 날 팔아넘긴 건가?

“로빈! 진정해!”

너무 깜짝 놀라서 슈퍼­고속 점프로 천장을 뚫고 날아갈 뻔한 나를 오르페가 붙잡는다.

“네가 잠든 지 2개월이 지났어.”

오르페의 설명에 몸이 굳었다.

“그렇게 많이?”

아니, 상식적으로 따져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천마 히틀러를 잡기 위해 투자한 시간은 수십 년 단위.

감시자의 정신세계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거지, 아예 안 가는 게 아니다.

“그거는 그렇다 치자. 왜 이놈들은 여기 있고, 난 왜 얼굴을 까고 있는 건데?”

트리보의 옆에는 내 닌자도와 닌자슈트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즉, 비앙카를 비롯한 저항군은 내 정체를 아는 상황이라는 건데…. 혼란스럽다.

“절검경이 네 정체를 이르갈 왕국 전체에 알렸어.”

아니, 이건 또 뭔 소리야.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 왜 내 정체를 알고 있어?

“그 새끼는 또 누군데?”

“이름은 제임스 본크. 칠검경 중 하나고, 붉은고래 마탑의 사냥개야. 지금은 다른 네 명의 칠검경과 연합해서 널 쫓고 있어.”

“네 명?”

한숨 자고 일어나니 싸움의 스케일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커져 있었다.

궤도 폭격의 술을 익혀 안정적으로 가나 했는데, 역시 야사요 이 십새끼들은 얌전히 기다려 주지 않는구나.

“아가사도 그 네 명 중에 있는 거야?”

혹시나 해 물었다. 내가 그런 식으로 물리치료까지 해 주면서 설득했는데 또 나쁜 놈들과 어울린다?

이번에는 지옥행 특급 열차를 끊어줘야 한다.

“아니. 유검경은 흰돌고래에 합류했어. 지금은 우리 편이야.”

“우리? 아니, 그렇다 치자.”

대충 감이 잡힌다.

정체를 들켰으니 아멜리아가 넘긴 집에서 사는 건 자살행위였겠지.

일행 내 최고 전투력을 가진 나는 딥슬립 모드였고.

그나마 아군이라 부를만하고, 적당한 세력을 갖춘 흰돌고래에 투신하는 게 최선의 선택이었을 거다.

그래도 이해가 가지 않는 게 있다.

“아가사가 흰돌고래에 합류해? 왜? 갑자기?”

“...변검경이 죽고, 그를 중심으로 만들어진 세력들이 와해하자, 견제 세력이 없어진 마탑이 고래의 숨결을 발사했어. 모든 왕국의 수도에.”

“이르갈 왕족은 전부 시체로 만든 꼭두각시였어, 요. 뭐, 여기 딱 한 분 계시지만...”

오르페와 비앙카의 설명에 난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 헛소리가 다 사실이었다고?

...변검경을 죽이고 난 후 바로 마탑으로 쳐들어갔어야 했나.

“로빈. 네 탓이 아니야. 언젠가는 일어날 일이었어.”

오르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날 타일렀다.

그래, 멍청한 생각이다. 그때의 몸 상태로 싸우다간 절대 못 이겼겠지.

그래도, 내가 없는 사이에 희생당한 백성들이 얼마나 많을지 생각하니,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생기는 거 같았다.

“검성회는 무너졌고, 마탑의 하수인이 됐어.”

오르페가 차분히 설명을 이었다.

“이제 마탑이 모든 걸 지배해.”

“...”

“괜찮아. 네가 있잖아. 아직 희망은 있어.”

쾅!

오르페의 말이 끝나자마자 한 여자가 문을 박차고 등장했다.

회색 머리의 젊은 여자, 자세히 보니 아달리였다.

“힉?!”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아달리가 날 보고 몸을 가볍게 떨었다.

“무슨 일이죠?”

“아, 마탑이 열두제자, 아니 여섯제자를 앞세워 침입을 시도하는 중입니다!”

내 시선을 피한 아달리가 오르페에게 보고하듯이 말했다.

얘도 저항군에 들어온 건가. 아멜리아가 살아 있다면 같이 왔겠군.

“벌써요? 이런...”

아달리의 말에 비앙카가 혀를 찬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어디지?

상황이 급박한 거 같아 물어보지를 못했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오르페에게 보냈다.

“아직 네오­솔리트론이야. 여기는 빈민가에 있는 저항군의 지하기지고. 등잔 밑이 어둡다는 걸 이용했는데, 결국 들켰네.”

“이럴 시간이 없습니다. 마법결계도 오래는 못 버텨요. 저희가 시간을 벌 테니 뒷문으로...”

비앙카가 죽음을 각오한 표정으로 오르페의 말을 받았다.

“아니, 그럴 필요는 없다.”

내 닌자도와 닌자슈트를 들어 올렸다.

“방금 일어났잖아.”

“내 상태는 최고야.”

오르페의 딴지를 무시하고 감지사의 정신세계에서 얻은 닌자도에 마나를 흘렸다.

한층 정순해진 빛깔의 푸른 마나가 칼날을 타고 일렁인다.

요괴­나치 연합군과 싸우면서 얻은 결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러니 다들 나가 있어.”

이제 옷 좀 갈아입자. 제발.

“빨리!”

서둘러서 내 일행과 저항군을 방에서 내쫓았다.

“마탑의 지원으로 한층 강해졌을 거야, 요. 이길 수 있겠어? 요?”

방 바깥의 비앙카가 묘한 반존대로 말을 걸어온다.

이 새끼는 아직도 광산 노동자 로빈슨과 존나 센 탈주닌자 로빈을 혼동하는 건가.

나중에 싸대기를 더 때려줘야 할지도 모르겠다.

“난 싸움에서 진 적이 없다.”

천마 히틀러는 가상세계 사람이니 실전이 아니라 논외다.

닌자탈착의법으로 빠르게 갈아입었다.

“내 뒤를 따라와라.”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과 저항군을 앞질러 걸었다.

말이 걸었다지, 마나로 강화한 상태라 사실상 달리는 것보다 빠르다.

“잠깐! 같이 가!”

[아니. 그럴 필요는 없겠군. 로빈의 몸에 강한 에너지가 흐르고 있다.]

오르페와 트리보가 내 뒤를 열심히 쫓는다.

좁고 긴 통로를 지나 햇빛이 쨍쨍한 바깥으로 나왔다.

일부러 레이더는 쓰지 않았다. 몇 명이 있든 이길 자신이 있었다.

“흰돌고래, 항복하러 나온 건가?”

마력 밀도가 남들에 비해 높은 여섯 명과 수백은 되는 군대.

그들의 뒤에는 골돈 지하에서 본 동그랑땡인가 뭔가 하는 우주선 비스무리한 기계가 떠 있었다.

“아, 아니! 저자는 탈주닌자!”

“변검경과 여섯 남매의 원수!”

“너만 아니었다면 질서유지군이!”

“죽어라!”

판타지 세계에 어울리지 않는 기계 갑옷을 입은 사무라이 여섯 명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요괴­나치 연합군과 싸우면서 갈고닦은 기술들을 실전에 써볼 때가 된 거다.

“­사시미 살법.”

한 번의 타격으로 수백의 목을 친다.

가상세계에서 새로 만든 기술인데, 검에 담은 마나를 휘둘러 쏘아내는 것을 뜻한다.

별 건 아니고 그냥 물대포 같은 거다. 검기라고도 볼 수 있겠다.

서거걱­!

“으허억!”

여섯 명의 사무라이와 수백의 군대가, 내 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파란 기운 앞에 두 동강이 났다.

예술적인 토막살인 실력. 아니, 사무라이는 사람에 속하지 않으니 살인은 아니다.

“로빈!”

[역시! 믿고 있었다!]

“미친!”

“괴, 괴물...”

내 뒤에 선 오르페, 트리보, 비앙카, 아달리가 각자 다른 반응을 보이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바, 발포!”

동그랑땡에 탑승한 병사들이 비명을 지른다.

지이잉!

동그랑땡 양옆에 붙어 있는 게틀링건을 닮은 기계가 작동을 시작하고.

투다다다다!

마나가 깃든 총알이 날 향해 일제히 발사된다.

“­닌자 실드.”

왼손을 내뻗어 마나의 장막을 펼쳤다.

지금의 나는 변검경보다 한참이나 뛰어난 마나 운용 능력을 지닌 슈퍼닌자.

이깟 총알세례쯤이야 가볍게 막는다.

“막고 있다! 공격이 통하지 않아!”

“후퇴하라!”

“일단 후퇴! 3조만 남아서 교전해!”

하얗게 질린 병사들이 동그랑땡을 뒤로 돌린다.

“한 놈도, 보내주지 않는다.”

공중에 뜬 고철수박들을 향해 마나를 듬뿍 담은 수리검을 날렸다.

사시미 살법은 초고난이도에 마나 연비가 구린 인술이라 두 번 연속으로는 사용 못한다.

콰콰쾅!

수십 대의 동그랑땡이 동시에 폭발하며 불꽃을 내뿜는다.

직격당하지 않은 우주선들은 반파된 상태로 매캐한 연기를 내뿜으며 추락했고, 탑승자는 살기 위해 과감하게 뛰어내렸다.

“그냥 쳐 죽어.”

따라붙어 한 놈씩 목을 베어 가며 죽였다.

“우옷!”

뛰어내린 것은 하나였으나, 떨어진 것은 수십 조각.

어부가 갓 잡아온 물고기를 손질하는 장인의 마음이 이런 느낌일까.

참으로 시적인 학살이 아닌가?

“닌닌.”

1분도 안 되는 사이 불바다가 되어 버린 전장.

저항군이 감탄사를 연발하며 자기 손을 꼬집었지만, 오르페는 아직도 진지한 표정으로 전장을 살피고 있었다.

“한동안 숨어 지내서 정보를 얻지 못했어. 한 명은 살려두는 게 좋았을지도…”

그렇군. 문제는 없다.

“한 명이 남아있다.”

“응?”

난 손가락을 들어 올려, 조용히 엿보기를 하는 새끼가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맨눈으로 보기에는 그냥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하지만 초월적인 수준의 내 마나감응력은 엿보기 전문가를 아까부터 감지하고 있었다.

“나와. 병신아.”

도망갈 낌새도, 덤빌 낌새도 보이지 않았기에 집중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제 와서 도망간다 해도 내 손아귀를 빠져나갈 수는 없다.

“...당신이 탈주닌자인가.”

허허벌판이었던 공간이 뭉개지고,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낸다.

다섯 가지 색이 뒤섞인 갑옷과 자수정으로 만들었는지 보라색으로 빛나는 검.

척 보기에는 그냥 도도하게 생긴 중년의 여자 사무라이였다.

“화, 환검경!”

“칠검경이야! 요!”

“환영 마법을 사용하는 기사야! 조심해!”

아딜리와 비앙카, 오르페가 비명을 지른다.

“­아아. 모르는 건가.”

칠검경. 그따위 새끼들은 이제 내 적수가 못 된다.

변검경과 비슷한 실력을 갖춘 언데드 노부츠나를 수천 번 쓰러뜨린 나다.

조용히 닌자도를 겨눴다.

환검경이라 불린 여자는, 날 위아래로 빈틈없이 눈여겨보더니, 냉큼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렇군.”

내 정체를 묻더니 자기가 알아서 답을 내놓는다. 자문자답하는 미친 사무라이라니.

차분히 눈을 감은 환검경이 자신의 검을 높게 들어 올리고.

“난 항복하겠다.”

벼락같은 선언과 함께 검을 떨궜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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