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 68화. 네오솔리트론의 불길 (2)
* * *
“너희들에게 협력할 의향도 있지. 단, 조건이 있다.”
“항복? 조건?”
어이없는 새끼네.
“누가 받아준다 했음?”
손끝으로 마나를 쏘아 보내 놈을 구속했다.
일명 얼음땡빔.
“뭐, 뭐라?!”
순식간에 꼼짝도 못 하게 된 환검경이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내 얼음땡빔은 수십 년 동안 갈고 닦아온 인술. 그런 미미한 저항으로 풀 수 있는 기술이 아니다.
“이건 대체…!”
아까부터 시전 준비를 하고 있던 걸 직격으로 맞았으니 풀기 힘들 거다.
“이 정신 나간 사무라이 새끼가. 신나게 백성들 죽일 때는 언제고, 좀만 불리하니 항복을 해?”
살아있는 진또배기 사무라이를 만나는 게 오랜만이라 그런지 분노가 활활 타오른다.
이글이글 이글스.
옆에 있는 오르페가 바베큐가 되어 버리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의 열기.
아니지. 오르페의 몸은 창백한 피부색만큼 서늘할 테니 문제는 없을 거다.
그래도 만일이라는 게 있는 법. 오르페의 볼을 잡아당겼다.
“...?”
적당히 따뜻하고 잘 늘어나는 게 문제는 없는 거 같다.
“넌 피떡으로 만들어주마.”
검집에 닌자도를 수납했다. 이런 삼류 새끼한테는 무기도 필요 없다.
이년을 코리안 소울푸드인 인절미로 만들어 버리리라.
“자, 잠깐! 난 환검경이다! 환검경!”
“어쩌라고.”
두 손을 가볍게 풀어주면서 놈에게 접근했다. 겁에 질린 표정이 일품이다.
“나, 날 모르나? 난 국경에 접근하는 코름갈드 왕국군만 상대했다! 백성들을 죽인 적은 없어!”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오르페와 눈을 맞췄다.
오르페라면 알고 있겠지.
“진짜야. 널 쫓는 임무에 투입되기 전까지 환검경은 왕국 끝에 있었어.”
역시, 오르페는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새끼가 무죄라는 법은 없다.
“그럼 날 쫓으면서 학살에 가담했을 수도 있다는 거네?”
다시 생각하니 존나 괘씸하네. 내가 한숨 때리는 틈을 타 백성들을 죽여?
“아니, 내가 전장에 들어선 건 오늘이 처음이다.”
이번에는 환검경이 답변했다. 계속해서 몸을 조여오는 얼음땡빔 때문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발음이 뭉개지지 않는 건 살짝 칭찬해줄만 하다.
“어쨌든 날 죽이려고 온 거잖아. 날 죽이고 나서는 저항군도 죽였을 것이고, 내 일행도 죽였겠지. 틀려?”
“그랬겠지.”
의외로 순순히 수긍한 환검경이 말을 이었다.
“네가 강하지 않았다면 그랬을 거다.”
사무라이 주제에 지나치게 솔직하다. 이러니 살짝 호기심이 생기는데.
“계속 씨부려 봐.”
이년에게 기회를 주기로 했다. 수틀리면 바로 죽일 수 있으니, 방심한 건 아니다.
“어줍잖은 힘을 가진 잔챙이가 사람들을 선동해 마탑과 맞서려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 거 같나.”
“나한테 묻지 말고 네가 대답해.”
따닥!
너무 건방져서 딱밤을 먹여 줬다. 아까처럼 자문자답이나 할 것이지 어디서 감히.
“윽...! 마탑주는 마탑의 방식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살려두지 않는다. 이길 수 없는 전쟁이 터지고, 일방적인 대학살이 일어났을 거다.”
“탈주닌자가 마탑주와 대적할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려고 했단 말인가요?”
딱밤을 몇 대 더 때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을 때, 오르페가 대답했다.
내가 심문해도 되냐고 눈빛으로 말하길래, 그냥 넘겨줬다.
난 스윗닌자, 동료에게 ‘인터뷰’를 양보할 정도의 아량은 있다.
“그렇다.”
“당신은 마탑의 편이 아닌가요?”
“너는... 마탑주가 붙잡아 오라고 했던 그 왕족이군. 파란 머리카락이라더니, 진짜였어. 마법 염료로 염색이라도 한 건가.”
이 새끼는 갑자기 뭔 소리를 하는 거야. 오르페는 몰락귀족이지 왕족이 아닌데.
날조된 정보를 함부로 지껄이고 다니면 당사자는 열 받을 수밖에 없다.
오르페를 위해 딱밤을 한 번 더 먹여주려고 했다.
“질문에만 대답하세요.”
날조 정보의 피해자가 된 오르페가 무표정으로 환검경의 말을 흘렸다.
상대해줄 가치조차 없다는 건가. 여기서 내가 더 나서는 건 그림이 안좋다.
딱밤을 조용히 회수했다.
“왕국이 무너졌으니, 내가 존대를 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다. 나도 마탑 놈들이 싫다.”
“강제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건가요?”
“놈들이 날 협박했다. 어쩔 수 없었어.”
속박의 고통을 견디며 억지로 만든 환검경의 평온한 표정이, 어쩐지 짜증 난다.
“이 새끼가 핑계는.”
따다닥!
참을 수 없는 분노의 딱밤을 세 대 먹여줬다.
“으으윽…! 하, 항복했는데, 이런 식으로 대우해도 되는 건가! 난 백성을 죽인 적도 없다니까!”
“박쥐 같은 년이 뭘 잘했다고 나불나불 입을 털어? 너도 ‘아일린’ 당하고 싶어?”
‘까까시’나 ‘델바나스’, ‘델라미온’ 으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
생각해보니, 꿀벌여왕이나 조셉은 윗놈들과 비교해서 좀 편하게 죽은 거 같다.
다시 살려내서 죽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아쉬울 뿐이다.
“...그 말에 반박할 수 없는 게 슬프군.”
환검경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뭐지 이 새끼.
“로빈.”
몇 대 더 쥐어박을까 하다, 오르페의 만류로 참았다.
“협력하겠다고 말했죠. 조건이 있다고 했고. 그게 뭔가요?”
오르페가 다시 인터뷰를 시작했다.
“...마탑주를 죽이고 난 후, 날 어떻게 처분하든 상관없다. 내 스승인 강검경만은 살려다오. 그는 가족이 인질로 잡혀 있기 때문에 협력하고 있을 뿐이다.”
“명예로운 기사야.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 거야.”
오르페가 나와 눈을 맞췄다. 최종 결정은 내가 하라는 뜻일까.
“그러지.”
사무라이 아줌마, 아니 아줌마의 건방진 제안을 수락했다.
가족과 목숨을 인질로 잡혀 있어 강제적으로 협력하고 있던 삼류 전사일 뿐이니 구태여 죽일 필요는 없었다.
물론 백성 살인까지 저질렀다면 앞뒤 사정 안 봐주고 즉결처형이지만, 그러지는 않았다 하니, 뭐, 넘어가 주기로 했다.
“좋아. 그럼 너도 우리와 같이 싸우는 걸로.”
‘백성을 지키기 위한 전투 토템’ 하나를 얻은 셈이다. 적어도 특급 이상은 되는 등급으로.
“죄를 갚기 위해서 열심히 싸워야 할 거다.”
나머지 칠검경을 죽이러 가기 위해 등을 돌린 순간, 환검경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 너희들에게 줄 정보가 있다. 분명 도움이 될 거다.”
얼음땡이 풀려 바닥에 널브러진 그녀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선생님에게 질문하기 위해 손을 든 학생같이 말이다.
“뭔데. 아줌마.”
난 참을성 있고 남의 말에 잘 귀 기울이는 공감닌자. 들어주기로 했다.
***
주인을 잃고 마탑의 손에 넘어간 변검경의 저택 집무실.
“이라나 펜호프.”
절검경, 제임스 본크가 저택에 무단 침입을 시도한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묻는 말에 똑바로 대답하시오. 변검경의 시체를 강탈하려 한 게 사실이오?”
밧줄로 포박당한 이리나는 양옆에 선 병사들의 추궁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변검경의 애인이라 했지.’
제임스는 얼핏 들었던 정보들을 조합하며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그가 살해당한 걸 제일 처음 목격했으면서, 이후 조용히 빠져나가 잠적했어. 살해자인 탈주닌자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아냐.’
수상쩍은 움직임과 이상한 행동. 그리고 무언가를 감추기 위한 함구.
제임스의 감이 종을 울리고 있었다.
“감시자의 유물.”
제임스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 중후한 목소리에 실린 마나가 집무실을 헤집었다.
흠칫.
“흠.”
순간적으로 살짝 떨린 이리나의 어깨를, 제임스는 간과하지 않았다.
“당시 책임자였던 조셉에게 유물을 하나 받았다고 들었소. 그게 어디 있는지 아시오?”
“모릅니다. 받자마자 변검경께 넘겼습니다. 오직 그분만 아시겠죠.”
즉답이었다. 마치 예전부터 답변을 준비하고 있었다는듯이.
“단념하시오. 내가 눈치챘으니 당신의 계획은 무용지물이 된 거요.”
이라나가 미끼를 물었다고 판단한 제임스가 자신만만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감을 숨기지 않은 제임스의 태도에 이리나가 입을 오므린다.
“내가 직접 심문하는 것을 원하시오?”
제임스의 두 눈이 노란색 빛을 뿜었다.
전투와는 거리가 먼 마법사인 이리나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렬한 살기가, 날카로운 검처럼 심장에 파고든다.
“으윽…!”
이리나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신음을 흘릴 때였다.
“절검경.”
한 노인이 집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보통 병사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거한의 남자는, 강검경이라 불리는 기사였다.
“강검경. 무슨 일이오?”
제임스가 그를 살폈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단련해온 몸은 예순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탄력적이었다.
40년 넘게 현역으로 있으며 수많은 기사를 배출해낸 베테랑. 그게 바로 강검경이었다.
“저항군이 순찰 중이던 패검경을 습격했다 합니다. 왕족이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그런 그조차 힘과 서열에서 제임스한테 밀려났다.
그가 마탑의 사냥개가 된 이유기도 한, 특수 제작용 ‘마법 무구’ 덕분이다.
“흠. 확실해 보이오?”
“고대용사의 무기를 들고 있었다 합니다.”
무덤덤한 강검경의 얼굴에는 일말의 슬픔조차 보이지 않았다.
‘손주까지 붙잡혀 있는데도 평정심을 가장하는 건가. 대단하군.’
“고대용사라. 왕족이 맞군.”
지금 왕족이라 불리는 ‘살아있는’ 사람은 그 여자밖에 없다.
‘벨더가드, 그 한심한 놈이 또 귀찮게 하는군.’
녀석이 더 똑바로 일을 처리했다면 후환이 남지 않았을 텐데.
‘탈주닌자. 네 동료가 드디어 직접 나섰다. 어디서 뭘 하는 거냐.’
놈을 잡기 위해 마탑주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지원했다. 자존심을 굽히고 다른 칠검경과 협력하면서.
그런데도 놈의 생사조차 알 수 없었다.
‘저항군이 철저한 건지, 진짜 죽은 건지. 알 수가 없군.’
그 변검경과 싸웠으니 중상을 입은 건 확실했다. 하지만 두 달이나 지났음에도 코빼기 하나 보이지 않다니.
‘내 일생일대의 싸움은, 어떻게 되는 건가.’
한숨을 흘린 절검경이 일어섰다.
“쾌검경과 환검경을 부르겠소. 아무래도 우리가 직접 나서야 할 문제같구려.”
“환검경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쾌검경만.”
마탑주는 무조건 사로잡아 오라고 했다.
고대용사의 후예인 그녀는 용사가 사용하던 무기까지 가지고 있었다. 직접 나서지 않으면 아군만 쓸데없이 죽어 나갈 터.
무슨 뾰족한 수가 있어 이제 와서 모습을 드러냈는지 몰라도, 칠검경 넷을 한 번에 상대할 만한 대단한 비책은 없을 것이다.
“이 자는 어떻게 할까요?”
“잘 감시해. 스태프가 없으면 마법사도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다.”
“알겠습니다.”
병사에게 지시를 내린 절검경이 강검경과 같이 집무실을 벗어났다.
상황을 지켜보던 이리나가 절검경을 배웅하는 병사들을 노려봤다.
각오를 다진 표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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