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69화 (69/119)

〈 69화 〉 69화. 네오­솔리트론의 불길 (3)

* * *

뜬그림자 상태에서 대기한지 10분째.

놈들을 기다리면서 환검경이 준 정보와 오르페의 계획을 다시 상기했다.

­ 쾌검경은 붉은고래 마탑 본부에서 신체 개조를 받았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상태조차 아니더군. 내가 봤을 때는...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마탑 놈들의 장난감이 됐다고 생각해라.

쾌검경. 순간적으로 폭발적인 가속을 일으켜 승기를 잡는다고 했다.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 갑옷조차 입지 않는다고.

­ 강검경은...내 스승이니 내가 제일 잘 안다. 정직하고 강하다.

밸런스형 전사. 동등한 실력일 때는 가장 매서운 적이지만, 수준 차이가 날 때는 가장 쉬운 상대다.

나보다 강할 리 없으니 이건 꽁승이라 봐야 한다.

­ 절검경은 강력한 일격으로 승부를 건다. 워낙 비밀스러운 자라 정확한 정보인지는 모르겠지만, 마탑에서 만든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절검경. 내 본명을 천하에 까발린 새끼다. 어떻게 내 이름을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이제 본명누설죄의 대가를 받을 시간이다.

­ 패검경은 나도 아는 게 적다. 소문에 의하면 장비한 갑옷과 방패가 고대용사의 것이라고 하던데. 직접 봤기는 했다만, 잘 모르겠다.

­ 둘 다 황금색이었나요?

오르페가 질문했다.

­ 그랬다.

­ ...로빈. 나한테 생각이 있어.

오르페의 전략은 이랬다.

잘 기억 안 나지만 어떤 이유로 인해 내가 고대용사의 물건에 취약하니, 패검경은 환검경과 오르페 본인이 직접 유인한 후 처리하기로 했다. 나머지 셋은 내가 상대하라고.

이걸 전략이라 부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이거보다 확실한 방법은 없었다.

저항군의 지하기지를 찾으러 보낸 마탑 쪽 병력을 전부 죽인 지 한 시간이 안 지났으니, 환검경이 배신했다는 정보도 아직 저쪽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거다.

승부를 보기에는 지금이 기회다. 싸움이 길어지면 백성만 손해를 보니, 빠르게 매듭을 지어야 한다.

“...!”

드디어.

말을 타고 이쪽으로 달려오는 군대가 보였다. 선봉에 선 세 명의 모습도.

중년 남자에 할배, 투구로 얼굴을 가린 여자. 절검경과 강검경, 쾌검경이다.

좋아. 이제 기습으로 한 명을 자르고 시작하면…

아니지. 왜 내가 기습을 해야 하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이상한데. 난 감시자의 정신세계에서 초월적인 탈주닌자로 다시 태어났다.

천마 히틀러를 일대일 대결로 쓰러뜨린 내가 그럭저럭 강한 상위급 사무라이를 기습한다? 토끼 한 마리 잡는데 드래곤 슬레이어(존나 큰 검)를 쓰는 것과 같다.

정신세계에서 기습했던 이유는 천마 감마 레이 버스트를 염두에 뒀기 때문이었는데, 고작 사무라이인 새끼들이 그런 기술을 쓸 리는 없지 않은가.

“야. 좆밥들아. 여기다.”

그냥 뜬그림자를 해제하고 눈앞에서 걸어나왔다.

“무, 무슨?”

“헛!”

절검경과 강검경이 급하게 말을 세운다. 쾌검경은 진짜로 인간이 아닌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천천히 말에서 내렸다.

터미네이터인가?

“사시미 살법.”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닌자도를 휘둘렀다.

마나로 만들어진 검기가 적들을 끝장내기 위해 날아간다.

“큿!”

절검경이 말을 버리고 개구리처럼 펄쩍 뛰었고, 강검경은 방패를 들어 올렸다.

내 인술에 쫄지 않고 정면으로 덤벼든 건 갑옷조차 입지 않은 쾌검경이었다.

솨솨솨솨솨­!

내 검기, 사시미 살법 앞에서 쾌검경이 검을 휘두른다.

내 검기를 반으로 갈라 파훼한 후 거리를 좁히겠다는 건가.

마나의 양과 질에 자신이 있다는 거겠지. 검을 맞대는 것도 아니니 괜찮다 생각한 걸 수도 있고.

단언컨데, 의미 없는 짓이었다.

투쾅­!

결과는 뻔했다.

갈라진 건 내 검기가 아니라 놈의 투구였으니까.

“­어리석구나.”

사시미 살법은 단순히 검에 담긴 마나를 쏘아내는 인술이 아니다. 백 명의 목을 베고도 남을 만큼의 마나를 단번에 압축해서 쏘아낸 파괴광선에 가깝다.

한 번의 검격으로 다수를 죽이는 데 필요한 예리함과 유지력을 갖춘, 야사요 학살에 최적화된 학살인술.

뭣도 모르고 정면으로 그걸 들이받은 새끼가 병신인 거다.

이제 곧 두 동강이 날 쾌검경을 지켜봤는데...

“닌?!”

쾌검경은 두 동강이 나지 않았다. 투구만 갈라졌을 뿐 온몸이 멀쩡했으니까.

내 사시미 살법을 정면으로 맞고도 살았다고? 천마나 대요괴도 아닌 사무라이가?

...내구도를 믿고 무지성으로 돌진한 거였나.

살짝 놀란 사이, 쾌검경이 거리를 좁혔다.

박살난 투구가 아래로 떨어지면서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르르르…!”

빨갛게 물든 두 눈, 하얗게 벗겨진 머리, 입술 바깥으로 튀어나온 송곳니.

쾌검경은 인간이 아니었다.

“요괴 사무라이?!”

빌어먹을 마탑 새끼들이 이토록 끔찍한 혼종을 만들어 낼 줄이야.

이년이 번식하면 요괴보다 튼튼하고 사무라이만큼 검을 잘 다루는 종이 탄생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신속히 배제해야 한다.

달려드는 쾌검경을 끝장내기 위해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펑­!

눈치만 보고 있던 절검경이 총같이 생긴 황금색 물건을 꺼내더니, 날 향해 발사했다.

효과음이 탕! 도 아니고 펑! 이다. 위협적인 일격인 게 분명하다.

“­닌자 실드.”

날아오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피하기는 힘들어 보여 마나 장막을 펼쳤다.

총알과 실드가 부딪히면서 불꽃이 튀었다. 순수한 마나로 이루어진 불꽃이.

내 실드가 한 번에 튕겨내지 못한 거로 보아 엄청난 양의 마나를 압축한 총알이 아닐까 싶다.

펑­!

절검경이 한 발을 또 발사했다. 이번 공격까지 버티지는 못하겠지.

쩌정!

역시나. 백성을 지키는 실드와 총알이 부딪쳐 같이 터져나갔다.

내 실드가 무너지는 걸 지켜보던 쾌검경이 엄청난 속도로 공격을 퍼부었다.

예전이라면 반응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겠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챙챙챙챙!

“닌자펀치.”

몇 번 칼을 겨뤄주다 놈의 면상에 주먹을 꽂았다.

“그륵!”

쾌검경의 송곳니가 부러지고 얼굴이 움푹 패인다.

변검경보다 공격이 빠르긴 했지만, 공방이 완벽하지는 못했다.

방어를 도외시하고 극딜만 퍼부으니 다음 수가 없을 수밖에.

“반으로 갈라져 죽어.”

그로기 상태에 빠진 쾌검경을 죽이기 위해 닌자도를 들어 올렸다.

“으랴앗!”

기합소리와 함께 조금 떨어져 있던 강검경이 돌진해왔다. 방패는 아까 사시미 살법으로 박살이 났는지 들고 있지 않았다.

황소를 연상케 하는 우직하고 기백 있는 자세.

“­닌자 회피기동술.”

맞아줬다면 귀찮아질 거 같아 살짝 흘렸다.

그래서 쾌검경을 죽일 기회를 놓쳤냐고? 아니다.

휘릭!

닌자도를 던져 쾌검경을 목을 잘랐다. 단번에 숨이 끊어진 걸 보니 그녀와 합체한 요괴는 지하국대적이 아니었던 거 같다.

“하앗!”

강검경은 검이 없어진 날 죽일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검을 휘두르며 다가왔다.

이것 또한 착각이다.

“닌자도, 원위치!”

아쎄이가 아니라 닌자도다. 잠시 떠나 있었던 닌자도가 자석 달라붙듯이 날아와 다시 내 손에 감겼다.

이것 또한 신기술 중 하나다. 익힌 게 너무 많아 뭐부터 보여줘야 할지 고민될 정도.

펑!

이번엔 예측에 성공했다. 날아온 총알을 피하면서 강검경과 검을 맞댔다.

균형 잡힌 실력과, 노련미가 느껴지는 절도 있는 자세. 하지만 클라스가 다른 나에게는 따분할 뿐이었다.

딱 예상한 대로였다. 이 할배는 별거 아니다.

“­닌자 점혈법.”

방패가 없어 몸을 전부 가리지 못하는 강검경의 목을 손으로 찔렀다. 그가 피하기에는 내 속도가 너무 빨랐다.

토도도독!

“허엇…!”

강검경이 눈을 까뒤집으며 쓰러졌다.

교육방송에서 틀어준 10분짜리 다큐멘터리로 완벽하게 익힌 내 한의학 기술이 빛을 발했군.

어쨌든, 환검경 부탁대로 온건하게 제압했다.

남은 건 이제 단 한 마리.

“이리로 오세요.”

황금총에 총알을 채워넣고 있던 절검경을 향해 다가갔다.

위력이 강력한 대신 한 번에 3개의 총알밖에 넣지 못하는 건가. 적절한 페널티다.

“오라고 새끼야.”

내 말을 무시하고 총이나 만지작거리던 녀석에게 수리검을 던졌다.

“컥!”

수리검은 정확히 내가 노리고 있던 황금총에 박혔다. 중앙에 딱 박혔으니 이제 사용하지 못하겠지.

“이, 이렇게 강할 줄이야…!”

놈이 검집에서 검을 빼고 일어섰다. 녀석의 몸이 벌벌 떨린다.

단순한 두려움만은 아닌 거 같았다. 조금은...희열이 섞여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와라!”

놈이 자세를 잡고 눈을 부릅뜬다. 이 새끼가.

“오는 건 너라니까.”

“으헉!”

마나를 이용해 놈을 끌어당겼다.

자기 몸만 움직일 수 있는 마나 사용자나, 스태프를 이용해 세계에 조금 간섭할 수 있는 마법사들과는 다르게, 나는 하나의 세계 그 자체.

이 정도 응용법은 물구나무 서서 타코야끼 먹는 것보다 쉬웠다.

“이, 이런!”

쐐애액!

놈이 발악하듯 검을 휘두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피하지 못할 강력한 일격.

하지만 슈퍼 탈주닌자인 나에게는 적당히 빠른 공격일 뿐이었다.

챙!

검을 맞댄 다음, 자연스럽게 흘려 내고.

서걱!

몸을 한 번 튼 후 놈의 가슴을 베었다.

“허, 억…!”

토마토즙을 질질 흘리며 쓰러지는 절검경.

마탑의 따까리 세 명 처리가 마침내 끝났다.

“­매드 사이언티스트들에게 조종당해, 자기 의지도 없이 살육을 저지른 네놈들은, 사무라이조차 아니다.”

바닥에 대 자로 뻗은 절검경에게 경멸을 가득 담은 눈빛을 보냈다.

“­흔해빠진 단순한 야쿠자일 뿐.”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더는 상대할 가치가 없다.

“그, 그래도.”

뒤에서 절검경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너와 싸운 건...내 의지였다...”

놈의 숨소리가 끊긴다.

“닌닌.”

뭐 어쩌라는 건지.

오르페가 잘 해주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움직이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아!

여기서 조금 떨어진 변검경의 저택에서, 검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불길하고 음험한 기운과 함께.

“닌?!”

이게...대체 뭐지?

***

깡!

패검경이 도끼를 들고 다가오던 트리보를 걷어찼다.

통!

[윽!]

여섯 조각으로 나뉜 트리보가 바닥을 구른다.

“흐음…!”

패검경과 검을 맞대고 있는 환검경은 아직 건재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오르페가 이제는 창으로 바뀐 고대용사의 검을 들어올리고 돌진했다.

사갈의 꼬리 소속 교관의 검은 갑옷은 패검경의 타격을 견디지 못하고 부서진 지 오래, 맨몸이나 다름없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패검경이 때를 맞춰 황금 방패를 들어올렸다. 황금 투구로 가려져 있어 확인할 수 없었지만, 아까부터 오르페를 계속 지켜보고 있던 그녀였다.

‘오르페!’

트리보가 고그마그족 목걸이로 신호를 보낸다. 그 또한 이게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있던 걸까.

오르페가 살짝 몸을 숙였다.

붕붕붕붕붕!

어느샌가 다시 조립된 트리보가 엄청난 힘으로 무언가를 던졌다.

트리보가 직접 개조를 해 내구력이 상승한 ‘개백정’ 도른의 도끼였다.

텅­!

환검경의 공격을 막느라 힘을 집중하지 못한 변검경이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방패를 떨궜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오르페가 창을 내질렀다.

“하압!”

패검경의 황금 갑옷을 오르페의 황금 창이 꿰뚫는다. 정확히 그의 심장에 박힌 창.

“...!”

“어딜!”

아직도 기력이 남아 있는지 움직이려던 패검경의 머리를 환검경이 쇠장갑으로 때렸다.

패검경의 투구가 벗겨져 맨얼굴이 드러나자, 호수처럼 잔잔하던 오르페의 눈이 경악에 물들었다.

창백한 피부와 오뚝한 코, 입술 아래쪽에 있는 작은 상처.

눈에 붉은 안광이 뿜어져 나오긴 했지만, 알아볼 수 있었다.

“어, 언니!”

패검경의 정체는, 벨더가드와 그 수하들의 공격을 막으면서 오르페가 도주할 시간을 벌어준 그녀의 언니였다.

책만 읽던 자신과는 다르게 기사가 될 거라며 땀을 뻘뻘 흘리며 검술을 연습하던, 자랑스러운 언니.

그래서 고대용사의 방패와 갑옷을 사용할 수 있던 것이었나.

“붉은고래 마탑…!”

비정하고 잔인한 진실 앞에 오르페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내 동생.”

패검경, 언니의 눈에서 붉은빛이 일렁인다. 세뇌에 저항하는 건지, 세뇌가 풀리려 하는 건지 오르페는 알 수 없었다.

“괴물들이 세상을 망치게 두지 마.”

빛이 사라진 언니의 눈이 천천히 떨어진다.

“응. 알겠어.”

이제는 듣지 못하는 언니의 몸을 껴안은 오르페가 소리 없이 맹세했다.

붉은고래 마탑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고.

‘로빈과 함께라면, 할 수 있어.’

차갑게 식은 언니를 안고 있던 오르페에게 도끼를 회수한 트리보가 천천히 다가갈 때였다.

콰아아아아!

검은 빛의 기둥이, 구름을 꿰뚫으면서 모습을 드러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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