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 70화. 비탄의 쇼군 (4)
* * *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공간에서, 한 남자가 눈을 떴다.
“여기는...”
변검경이라 불리는 남자의 이름은 제이드 홀.
그는, 정확히는 그의 영혼은 갑작스러운 어둠에 적응하지 못한 채 몸을 계속 움직였다.
“...여기는 어딥니까? 누구 없나요?”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답 대신인지 칠흑 같은 공간에 불이 들어온다.
눈을 감았다가 뜨니 공간이 바뀌어 있었다. 누군가의 집처럼 보이는 장소. 이번에는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악몽인가?”
제멋대로 움직이던 제이드의 몸이 문 앞에 멈춰 섰다.
제이드.
한 여자가 그의 이름을 부른다. 익숙하면서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여자의 키가 자신보다 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기에 제이드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내가 부르면 대답하라고 했잖아.
“리사…!?”
여자의 이름은 리사 막시밀리온. 30년 전에 제이드가 직접 죽인, 악마 같은 자였다.
“당신이 어떻게 살아 있는 겁니까? 죽은 지 한참이나...”
그렇지. 그렇게 대답하라고. 싫은 표정 짓지 말고.
제이드의 영혼은 몇 번이나 더 말한 끝에 깨달았다.
리사는 자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으며, 지금 이 장면이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똑같이 흘러가고 있다는 걸.
뭐라고? 기사? 하너 따위가? 아니, 넌 그냥 내 노리개야. 내가 명령하는 대로 움직이는 노리개.
리사가 비열한 웃음을 지으며 낄낄 웃는다. 그녀 곁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리사의 친구들도 따라 웃었다.
언제나 감사하렴. 몰락한 귀족 가문의 사남 따위를 귀하게 써 주는 사람이 나 말고 또 누구 있겠니?
“...빌어먹을!”
영혼이 이를 갈았다. 치욕스러운 말을 듣고도 행동할 수 없다는 게 화가 치민다.
그나마 다행이라는 건, 이다음에 일어날 일을 제이드의 몸이 알고 있다는 거였다.
뭐야. 그 단검은 어디서 났어? ...뭘 하려는 거야?
제멋대로 움직이던 제이드의 몸이 리사와 그녀의 친구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간다.
이제 일어날 일은, 너무도 당연하며, 정당한 행위였다.
하…!
피웅덩이 아래에 서 있던 제이드의 몸이 한숨을 내뱉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영혼이 입을 열었다.
“누굽니까? 왜 저에게 이런 걸 보여주는 거죠?”
지금 영혼의 기억은 온전치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예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정도만 희미하게 알고 있었지, 왜 여기 있는가는 알지 못했으니까.
“원하는 게 뭡니까?”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영혼이 생각에 잠겨있을 때, 장소가 다시 바뀌었다.
가, 감사합니다! 기사님!
일곱 살 정도로 보이는 아이를 감싸 안은 여자가 제이드의 몸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산적 놈들을 잡기 위해 힘을 써 주시는 기사님은 내 평생 처음이오. 정말 고맙소.
수염을 성성하게 기른 노인도 그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저희 같은 놈들도 보살펴 주시다니...용사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기사님이야말로 진정한 용사십니다!
용사! 용사! 북쪽의 용사!
그를 둘러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높여 부르며 환호한다.
뭘요. 기사라면 해야 했을 일을 한 것뿐입니다.
젊고 열정적인 목소리가 제이드의 몸에서 나온다. 영혼이 젊었던 시절의 목소리였다.
“...”
지켜보고 있던 영혼이 눈을 감았다. 과거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사.’
그가 되고 싶었던 존재. 명예를 알고, 주군에게 충성하며, 적과 용맹하게 싸우는 자를 뜻하는 말.
기사를 향한 동경에 가득 차 있던 제이드를 부른 건 리사였다. 그녀는 제이드를 최고의 기사로 만들어 주겠다며 데려갔다.
자신을 보는 리사의 눈빛이 이상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날 기사로 만들어 줄 사람이었으니까.
리사의 말과는 다르게 잿빛늑대 기사단의 단원들은 전부 여자였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이제 자신의 선배가 될 사람들이었으니까.
순수하게 누군가를 믿었기에, 쉽사리 배신당했다.
선의라는 이름 아래 은밀히 가려진, 불꽃같이 타오르는 욕망을 보지 못했다.
‘인간은 야만적인 존재다.’
어린 시절의 제이드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니, 알고 있었음에도 모른 척하고 싶었던 거겠지.’
야만성을 실감했을 때는 몸과 마음이 망가진 뒤였다.
리사를 죽이고 자기 자신과 맹세했다.
사람들이 이상적인 기사를 원하는 건, 현실에 그런 기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되어 주겠다. 기사들을, 사람들을 올바른 길로 인도하는 자가.
‘용사가.’
인간의 마음 깊숙이 자리한 야만성을 억제하고 처벌하기 위해서는, 법과 질서가 필요했다.
사람들에게 법과 질서를 강요하기 위해서는, 압도적인 힘이 필요했고.
용사는 그런 압도적인 힘을 가진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제이드 홀. 대단하군. 그런 몸으로 경지에 오르다니. 이름을 기억하겠네.
용사가 되기 위해서 강검경이라 불리는 사내에게 검술을 다시 배웠다.
자신만의 검을 만들기 위해 세계를 떠돌며 강자들과 싸웠다.
여정 도중 야만적인 인간들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를 ‘북쪽의 용사’라 칭송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가 최강의 기사인 칠검경이 되는 건 당연한 순서였다.
제이드, 나의 정의로운 기사님.
그리고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여자와 만났다.
텔라스 남작가의 영애, 에이버리 텔라스.
그녀가 리사와 같은 사람은 아닐까 의심했지만, 에이버리의 사랑은 순수했다.
차가운 얼음 같던 제이드의 마음을 녹일 정도로 따뜻하기도 했고.
그녀와 결혼했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의 이름은…
“음.”
장소가 다시 한 번 바뀐다. 생각에 잠겼던 영혼이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아버지!
한 여자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제이드의 몸에 안기며 얼굴을 비벼오는 그녀.
아멜리아 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
사람들이 아버지를 뭐라고 부르는지 아세요? 용사라고 해요! 북쪽의 용사!
그게 그렇게 신이 납니까?
제이드의 몸이 조용히 웃는다.
물론이죠! 그런데 왜 모두에게 존댓말을 하시는 건가요? 저한테도 하니 이상해요.
용사는 사람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언제나 웃는 얼굴로, 품격 있게 사람을 대해야 하죠.
멋있다…! 아버지는 제 자랑이에요!
해맑은 아멜리아의 미소가 영혼의 눈 가득 담긴다.
또다시 공간이 바뀐다.
이번에는 텔라스 영지였다. 아내 가문의 영지이자, 그가 직접 불태웠던 곳.
제이드…!
포박된 에이버리가 눈물을 흘리며 제이드의 몸을 본다. 증오와 분노, 슬픔이 담긴 눈.
제이드의 몸은 말없이 아내의 목을 향해 검을 내리쳤다.
이 개새끼! 빌어먹을 앞잡이 새끼가!
제이드와 맞섰던 은여우 기사단의 단장이 분노를 토해냈다.
제이드 홀! 알고 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악법이었다! 따랐다면 많은 사람이 죽었을 거고! 그런데도 너는!
전투에서 패배한 그의 몸은 엉망진창이었다.
‘은여우 기사단. 분명 레너드인가 하는 자만 빼고 모두 죽였었지.’
영혼이 조용히 단장의 얼굴을 지켜봤다.
아...아!
아이의 새된 비명이 뒤에서 들려온다. 제이드의 몸이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서 있는 건, 아멜리아였다.
아멜리아. 왜 여기에 있는 겁니까. 골돈에서 조안나 양이랑 시간을 보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어쩔 줄 몰라하는 병사들을 헤쳐나온 아멜리아가 말없이 다가와 에이버리의 몸을 껴안았다.
왜, 왜 그런 거죠?
에이버리는, 텔라스 남작가는 왕국의 법을 어겼습니다. 제가 직접 집행해야 했어요.
제이드의 목소리는 무덤덤하고 차분했다.
힘 없는 사람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이 용사야.
아멜리아는 제이드를 보고 있지 않았다.
당신은 용사가 아니야.
그녀의 목소리는 무서울 만큼 차분했다.
과거에 사로잡혀, 자기 자신도 구하지 못하는 인간이, 다른 사람을 구하는 용사가 될 수는 없어.
...유치하군요.
제이드가 몸을 돌릴 때.
[제이드 홀.]
한 남자의 목소리가 영혼의 귀에 닿았다.
[법과 질서를 위해 평생을 바친 자.]
“...누굽니까?”
백색의 영혼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 이름은 하멜리온. 위대한 다섯 성령 중 하나다.]
“감시자…!”
[네가 왜 여기 있는지 알겠나.]
제이드의 눈앞에서 한 영상이 재생된다.
검은 옷을 입은 남자와 자신이, 사람의 머리뼈와 무기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 싸우고 있었다.
“탈주, 닌자!”
영혼의 기억이 돌아왔다.
칠검경 중 최강이라고 인정받으며 정의를 집행하던 때, 붉은고래 마탑이 나타났다.
그들은 왕족을 살해하고 검성회와 칠검경을 포섭했다.
직접 담판을 짓기 위해 마탑에 갔지만, 마탑주의 힘이 너무 강해 이길 수 없었다.
언젠가 기회가 올 것이라 믿고, 일단은 협력하기로 했다.
몇 년이 지났을까.
그가 마탑에 심어놨던 심복이자 애인인 이리나가 기회를 가져왔다.
아이오지 광산에서 감시자의 영혼이 담긴 유물을 발견했다고.
이리나는 감시자의 영혼과 싸워 이긴다면 강대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녀가 마법으로 안전장치를 만들어야 했고.
이리나가 안전장치를 만들기 위해 유물을 가져가 연구할 때, 탈주닌자가 저택에 침입했다.
자신은 그와 싸우다 패배해 죽었고.
[이제 모든 기억이 돌아온 모양이군. 좋다. 봐라.]
자신을 하멜리온이라 소개한 감시자가 제이드의 영혼에 무언가를 보여줬다.
“이건…!”
감시자가 지배하던 고대의 모습.
인간을 비롯한 생명체들은 그들이 만든 법과 질서를 따랐으며, 세상은 평화로웠다.
철저히 억압당하는 야만성과 욕망.
“아름다워...”
제이드의 영혼이 감탄하며 세상을 둘러봤다. 너무나도 이상적인 모습이었다.
[우리는 지적 생명체들의 야만성을 잘 알고 있었고, 통제하려 했다. 변수에 의해 실패했지만, 포기하지 않았지.]
하멜리온이 말을 이었다.
[제이드. 네가 원하는 세계와 우리가 만들고 싶었던 세계는 같다. 우린 협력할 수 있어.]
“당신이...마탑주를 이길 힘을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물론이다. 그녀는 ‘잘못 부름 받은 자’. 강대한 존재이긴 하나 감시자 모두를 상대할 수는 없지. 너와 내가 모든 감시자를 이끌고, 다시 이 세계를 통치하는 거다.]
“그렇다면…!”
제이드의 영혼이 하멜리온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좋다. 내가, 우리가 인도한다…!]
둘의 영혼이 합쳐지고, 새로운 존재가 탄생했다.
***
감시자와 융합한 제이드가 드디어 눈을 떴다.
“아아...제이드.”
제이드가 눈을 돌려 목소리의 주인, 이리나 펜호프를 찾았다.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던 그녀가 눈물을 흘렸다.
“나의 제이드, 나의 용사.”
“...이리나. 성공한 겁니까.”
이라나의 몸은 칼과 창이 헤집어 놓은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곧 숨이 끊어지는 건 확실한 상황.
제이드가 이리나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외딴 마을에서 마녀라고 몰려 죽을뻔한 아이. 그가 구한 아이. 이리나 펜호프.
“숨이 끊어진 후라, 힘들었지만, 당신의 영혼이 아직, 육체를 떠나고 있지 않아서 가능했어요.”
“그렇군요.”
“미안해요. 늦어서...”
이리나가 숨을 헐떡인다.
“괜찮습니다. 편히 쉬세요.”
제이드가 이리나를 끌어안고, 그녀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제이드. 이 육체는 내가 임시로 봉합해 놓은 상태, 얼마 가지 못한다. 강력한 육체를 찾아 강탈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이리나의 눈을 감겨 준 제이드가 일어섰다.
흉흉한 검은 기운이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