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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72화 (72/119)

〈 72화 〉 72화. 이름만 다른 감시자 (1)

* * *

유리처럼 깨져나가더니 가루가 되어 흩어지는 녀석의 몸.

“꺼어어어…!”

비명을 토한 제이드가 주저앉았다. 분한 듯 눈을 부르르 떨던 놈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다, 당신은, 대체…”

“슈퍼 탈주닌자 로빈이다.”

“그게 뭔...”

“아아, 모르는 것인가?”

놈의 몸이 천천히 흩어진다. 마지막이니 알려 줄 수 있다.

“야사요를 무찌르고 죄 없는 백성을 수호하는, 부처의 사도다.”

“그런, 유치한…”

이 새끼가 말해줘도 지랄이네.

“유치한…”

갑자기 깨달음을 얻었는지 놈의 눈동자가 커졌다.

“아…”

말을 잇지 못하고 사라지는 제이드.

그가 있었던 자리에는 동그란 구슬이 하나 놓여 있었다.

포르노 뭐시기를 잡아놓고 있었던 구슬과 똑같은 생김새.

너무나도 사악한 물건이니 내가 처리해야 한다.

“닌자도, 원위치.”

다시 돌아온 닌자도로 그걸 갈랐다.

두 동강이 난 구슬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오더니, 나에게 흡수됐다.

오야붕 델바나스를 죽였을 때나, 포르노의 구슬을 갈랐을 때와 다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천마 히틀러를 만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로빈!”

눈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확인하니 오르페와 저항군이 보였다.

“닌?!”

깜짝 놀라 두 눈을 비볐다.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무슨 일이야?”

황금갑옷과 방패로 무장한 오르페가 다가온다.

언제 깔맞춤 장비를 구한 거지?

아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어떻게 된 거인진 모르겠지만, 그들의 가슴 부분에 도깨비불이 붙어 있었다.

그냥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게 아니라, 둥둥 떠 있는 상태였다!

요괴에게 침식된 건가?

“다가오지 마!”

일단 급한 대로 오르페를 멈춰 세웠다.

“무, 무슨 일이야?”

“일단 거기 있어 봐.”

두뇌를 풀가동시켰다.

왜 도깨비불이 이들 가슴에 붙어 있는 걸까.

첫 번째 가능성. 제이드가 비탄의 쇼군으로 진화하면서 이 지역에 이상한 저주를 펼쳤다.

두 번째 가능성. 도깨비불이 보이는 게 비탄의 쇼군을 물리친 보상이다.

세 번째 가능성. 구슬을 가르는 순간부터 스피릿­고문 요괴의 정신 고문이 시작된 거다. 그러니까 여기는 가상공간인 셈.

최악의 선택지는 역시 마지막이겠지.

난 신중하고 똑똑한 닌자니, 최악의 수를 가정해야겠다.

“무슨 일 있소?”

하얀 돌고래 뱃지를 단 남자가 머리를 긁으며 내 쪽으로 다가온다.

“이 새끼!”

“히익!”

닌자도를 들어 올려 놈의 ‘방심시키고 자폭하기’ 전략을 막았다.

이런 수법은 언데드 사무라이들의 가미카제로 수만 번은 봤다.

“지금부터 움직이는 새끼들은 다 요괴야!”

가짜 공간인지 아닌지 지금부터 확인해야 한다.

“저, 저기요. 그, 설명이라도 해 주셔야…. 옷!”

일단 제일 띠꺼운 아달리의 도깨비불을 가로챘다.

야사요도 아니면서 날 두려워해 내 판단을 혼란스럽게 한 죄다.

이년이 첫날에 사정만 잘 설명했으면 내가 아멜리아를 의심할 일은 없었는데.

“에베베...”

끈 떨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드러눕는 아달리.

“동지!”

“뭐, 뭘 한 것이오?”

저항군이 시끄럽게 떠들 동안, 난 아달리의 이마에 꿀밤을 한 대 먹였다.

딱!

금세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그녀의 이마.

타격감과 육체의 반응 모두 진짜 같지만, 방심해서는 안 된다.

요괴­나치 연합군을 줘팰 때도 똑같았으니까.

“음.”

현실인지 가짜인지 확인할 방법이 없을까.

“닌?”

생각에 방해가 되기에 아달리의 도깨비불은 땅바닥에 던져놓았는데, 이게 갑자기 휙 하고 움직이더니 다시 그녀의 몸으로 들어갔다.

“에엣...! 아…! 우아아아아앗!”

다시 눈을 뜬 아달리가 이마를 만지더니 비명을 질렀다.

눈물을 질질 흘리는 게 요괴는 아닌 거 같은데.

“너무 시끄럽잖아.”

다시 도깨비불을 가로챘다.

영혼이라도 빠져나간 듯 멍한 표정으로 다시 누워버리는 그녀.

잠깐, 영혼?!

“­아아.”

비상한 내 두뇌가 정답에 다가간다. 하지만 아직 확실하지는 않은 느낌.

여기가 가상공간이 아닌지 확인을 더 해야 한다.

“오르페.”

“으, 어?”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간단한 테스트를 해 봐야겠다.

“트리보 씨가 감시자의 기운이 느껴진다고 했어. 위대한 다섯 성령 중 하나같다고……. 놈과 싸운 거야?”

그녀의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내가 골돈에서 죽인 야쿠자 오야붕의 이름은?”

“또 감시자의 영혼을 흡수한 거야?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해줘.”

“그건 네가 알 필요 없어.”

“...”

오르페로 변장한 감시자­분신술을 쓰던 까까시처럼­의 감언이설일 가능성도 있기에, 좀 독하게 나가기로 했다.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

살짝 시무룩해진 오르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델바나스. 근데 그건 왜?”

아, 질문을 잘못했다.

감시자라 칭하는 대요괴들은 내 기억을 읽을 수 있으니, 내가 정답을 아는 걸 물어보면 안 된다.

“트리보가 들고 다니는 도끼의 원래 주인은?”

이거면 적당하겠지.

“도른이잖아.”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다. 하지만 감시자가 거짓말을 못 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 새끼가 어떤 놈인지 말해봐.”

“어떤 놈?”

“생각나는 거 아무거나 묘사해.”

“음…. 잠시만…”

오르페가 눈을 데구루루 굴린다.

거짓말을 꾸며내기 위해서일까, 기억을 끌어내기 위해서일까.

뭐가 됐든 쓸데없는 짓을 하면 바로 사시미 살법이다.

“볼에 흉터 자국이 있고, 큰 덩치에, 눈 색깔은 푸른색이었어. 입고 있는 갑옷은 보어루사의 가죽으로 만든 거였고.”

“너 시체만 보지 않았어?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완전기억 능력자야?”

“조안나 씨랑 레너드 경이 현상수배지도 보여줬잖아.”

“그랬냐?”

왜 기억이 안 나지? 그냥 콧수염 난 야쿠자 아니었나?

어쨌든, 지나치게 상세하게 설명하는 게 딱 오르페 스타일이다.

“그렇군.”

이런 세세한 성격까지 감시자가 구현하기는 힘들다.

이로써 확실해졌다.

난 비탄의 쇼군을 쓰러뜨리고, 전에 얻은 닌자­레이더 같은 새로운 능력을 하나 얻었다.

그건 바로 영혼을 보는 능력.

보는 것 뿐만 아니라 강탈할 수도 있는데, 이건 별로 유용한 능력이 아니었다.

영혼을 강탈하려면 가슴 부분까지 다가가야 하는데, 거기까지 도달했으면 그냥 펀치를 날리는 게 더 좋다.

대요괴든 사무라이든 결국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새끼들이라 때리면 죽기 마련.

굳이 코 묻은 애새끼들 돈 훔치듯 영혼까지 주물럭거릴 필요가 없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니, 없는 것보다는 좋겠지.

“이제 말해줄 수 있어?”

정색 빨던 걸 멈추니 오르페가 눈치를 보면서 다가온다.

“나중에 설명해줄게. 패검경은 죽인 거지?”

솔직히 설명하기 좀 귀찮다.

“...응.”

오르페의 표정이 안 좋았지만, 계획은 성공한 거 같았다.

“트리보는?”

아달리나 비앙카, 환검경은 보이는데 이 고철덩어리는 코빼기도 안 보인다.

“저쪽에 있어. 조사할 게 있다고.”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트리보는 박살 난 가로등 밑에 주저앉아 뭔가를 막 만지고 있었다.

“쟨 또 뭐 하는 거야.”

[로빈! 오르페!]

때마침 우리에게 손을 흔드는 고철.

[이거 보이나? 이건 고그마그족의 기술이다. 감시자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었...]

“정말 흥미롭군. 오르페가 아주 좋아하겠어. 난 다음에 들을게.”

비탄의 쇼군이 생각보다 강해서 마나가 많이 줄었다.

뉴 닌자포위진의 마나 소모량이 존나 큰 거 같기도 하고.

기운이 남아있을 때 일을 끝내야 한다.

“사무라이들은 어딨지?”

아달리를 비롯한 흰돌고래 전투원들의 안내를 받아 네오­솔리트론에 남아 있는 적들을 찾았다.

몇 달 동안 야사요의 피를 마시지 못해 굶주린 닌자도에게 포만감을 줘야 한다.

“­정의감이 샘솟는군.”

몰살 타임이다.

***

다행인지 불행인지 영혼 보기 능력은 상시 발동이 아니었다.

몇 시간 지나니 알아서 꺼지고, 눈을 빠르게 세 번 깜빡여야 다시 켜지더라.

네오­솔리트론을 정리한 후 난 내 일행들과 저항군이랑 다티만으로 향했다.

다티만. 몸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는 증후군이 퍼져 버려진 도시다. 흰돌고래의 거점이기도 하다.

온 도시 곳곳에 붉은고래 마탑의 눈이 있지만, 이곳만은 없다고.

“안녕하세요. 릴리아 차스테인입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할머니가 인사를 건넨다.

릴리아 차스테인, 흰돌고래의 리더.

마탑의 1급 직원이었지만 마탑주의 음모를 깨닫고, 막기 위해 흰돌고래를 설립했다나 뭐라나.

그녀가 있었을 때의 마탑은 지금처럼 매드 사이언티스트가 점령한 악의 소굴은 아니었다고 한다.

뭐, 이 할머니까지 전쟁 범죄자는 아니라는 뜻이겠지.

“다티만에서 퍼진 증후군 또한 붉은고래 마탑 때문입니다. 그들이 도시 밑 지하수로에 비밀기지를 만들고 실험을 했어요. 남은 자료들로 추측하건대, 인간의 뇌를 건드려 신체 능력을 향상하려 했던 거 같았어요.”

“수십 년 전부터 그런 실험을 하고 있었다는 건가요?”

“그렇습니다. 왕족 살해부터 고래의 숨결까지 전부 그들이 예전부터 꾸몄던 일이라 생각합니다.”

릴리아 또한 엄청난 수다쟁이라 그런지 오르페와 죽이 잘 맞았다.

[로빈. 듣고 있나? 붉은고래 마탑은 우리 고그마그족의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것도 감시자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기술을. 이게 무엇을 암시하는지 알겠나?]

트리보가 또 나를 붙잡는다. 두 여자가 수다를 떨 때 조용히 빠지려고 했건만.

“니네 종족이 전부 죽여야 할 요괴라는 거?”

[...마탑주가 고그마그족이라고 확정된 건 아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고대용사의 장비 말고도 너에게 치명적인 일격을 입힐 무기가 있을 수도 있다는 거다. 네오­솔리트론의 가로등은 널 감지하지 못했지만, 앞으로는 다를 수도 있다.]

“그렇군. 이제 그 사실을 알았으니 더 힘내서 죽여야겠어.”

[언제까지 그렇게 주먹구구식으로 싸울 생각인가. 변검경 때도 그렇다. 상대의 실력을 정확히 알아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게 아닌가. 물론 그때 습격하지 않았다면 위대한 다섯 성령 중 하나가 깃든 유물을 손에 넣은 그가 더 강해졌을 가능성도 있었겠지만, 결국 결과론적인....]

아, 슬슬 화가 나려고 한다.

적도 비장의 한 수가 있다는 것만 알면 됐지, 여기서 뭘 더 어쩌라는 건데.

그렇다고 뾰족한 대비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뱃속으로 들어간 감시자들을 꺼낼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내가 선택한 탈주닌자의 길이니, 악으로 깡으로 버티겠다.”

이후로도 트리보가 뭐라 떠들었지만, 전부 무시했다.

디아나는 괜찮으려나. 멀리서 저항군이 잘 보호하고 있다고는 했는데, 직접 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을 거 같다.

이번 사건으로 인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로 완전히 미쳐버려 대요괴로 각성하는 건 아니겠지.

정말 마음이 아픈 일이지만, 그러면 도마뱀 바비큐로 만들 수밖에 없다.

“이쪽입니다.”

어느새 수다를 끝낸 릴리아가 우리 일행을 지하기지 안으로 안내했다.

“마탑이 버린 기지를 새로 수리해서 쓰고 있습니다. 당시 이 기지의 위치를 알던 자들은 저를 제외하고 전부 죽었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죽은 건가? 아니면 죽인 건가?

말투가 약간 ‘내가 다 처리했으니 안심하라구~’라는 투라 좀 의심스러운데.

“자, 이제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도 될 거 같군요. 그러면...”

“로빈 씨~! 오호호홍~!”

한 여자가 릴리아의 말을 끊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 거슬리는 웃음소리는…. 설마?

“무카?”

네가 왜 여기서 나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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