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3화 〉 73화. 이름만 다른 감시자 (2)
* * *
“여러분~ 너무 오랜만이에용~! 오호호홍~!”
깔깔깔깔 정신없이 웃으면서 다가오는 무카.
“이 여자는 왜 여기 있는 거죠?”
저항군 리더 할머니에게 바로 물어봤다.
설마 흰돌고래에서 파견한 스파이라던가 그런 건가?
어쩌면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던 저 노래도 저항군이 만들어낸 특수한 마법 주문...
“무카 양은 로빈 님의 절친한 친구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우리가 안전하게 보호했으니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이건 대체 뭔 개소리야.
“누가 그러던가요?”
“무카 양이 직접 말했습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 미친년이 감히 내 이름을 함부로 팔아?
“전 저런 여자 모릅니다.”
“아까 방금 이름을 말씀하시지”
“모릅니다. 모른다니까.”
“네?”
그 뒤쪽에 서 있던 저항군 애들까지 당황했는지 입을 떡 열었다.
“탈주닌자와 아는 사이가…. 아니라고?”
“그, 그러면 우리가 지금까지 들었던 노래들은…?”
“정신나가버릴거같애!”
몇몇 저항군이 머리털까지 쥐어뜯으면서 반응하는 게, 무카가 여기서 뭔 짓을 했을지 감이 잡힌다.
“이 매드 뮤지션, 아니 데스 사이렌과 아는 사이일 리 없지 않습니까.”
“정말~! 로빈 씨~! 아직도 새침떼기시네요~! 저와 같이 여행하면서 쌓은 추억들을 다 잊으신 건가용~!”
저항군의 따가운 눈총이 안 보이는 건지 아직도 깔깔 웃으면서 말을 걸어오는 무카.
그런 걸 추억이라 부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부처님뿐이지 않을까.
친한 척 아는 척 귀여운 척 오지게 하는 무카를 무시하면서 대충 넘어갔다.
“부탁한다. 친구.”
오르페의 어깨를 몇 번 쳐준 후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갔다.
무카와 릴리아의 상대는 전부 오르페에게 맡길 뿐이다.
***
다티만에 위치한 흰돌고래 거점에서 일주일이 좀 넘는 시간을 보냈다.
마탑을 박살 내기 전 놀고먹고 자기 위해서 그런 건 아니고, 바깥의 상황과 마탑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다.
그, 그만~! 너무 아파!
저, 젊은이! 이 정도면 됐지 않은가? 아직 내 몸도 다…!
볼일을 마치고 합류한 환검경과 강검경을 패면서, 아니, 동면에 가까운 수면 때문에 망가진 몸을 대련으로 회복하면서 릴리아에게 많은 말을 들었다.
물론 대부분은 이해할 수 없었거나 까먹었지만, 적당히 중요해 보이는 몇 가지 정보는 기억하고 있다.
릴리아 차스테인이 말한 정보 대부분은 마탑주에 관해서였다.
붉은고래 마탑주. 이름은 모니카 소버린.
여성으로 추정. 나이 불명에 출생지 불명. 부모를 비롯한 가족 관계도 불명. 세간에 알려진 건 이 정도다.
릴리아는 마탑주가 감시자들이 지배하던 시대에 판타지 세계로 넘어 온 이계의 사악한 악마 또는 망령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증거는 이랬다.
1. 육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건 잘 이해가 안 가서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는데, 대충 듣기로는 마탑주는 에너지로 이루어진 존재라는 거 같다.
그녀를 직접 본 사람은 1급 직원이었던 릴리아와 2급 직원 조셉(죽였다)을 비롯한 고위 간부층밖에 없다고.
2. 알고 있는 정보의 양이 방대하다.
마탑주는 감시자에 대한 정보는 물론이고 고그마그족의 기술이나 고대에 실전된 마법 주문까지 다 알고 있다고 한다.
3. 감시자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다.
이건 거의 자면서 들어서 좀 많이 까먹었는데, 감시자들이 마탑주를 강제로 판타지 세계로 끌고 온 거라 그렇다는 얘기였다.
고대의 감시자들이 이계의 존재들을 이쪽 세계로 많이 불러들였다는 얘기를 했었는데, 아마 그거랑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다음은 마탑주의 상태에 관해서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릴리아가 마탑에 있을 당시의 마탑주는 불안정한 상태였으며, 마탑 바깥으로 나갈 수 없었다고 한다.
아마 아직도 그런 상태일 거라고 말했는데, 모든 일에 훼방을 놓는 변검경 제이드의 세력을 귀찮아하면서도 전면전을 벌이지 않았던 게 그 증거라고.
뭐, 대충 방구석 여포라는 얘기가 아닐까 싶다.
이거 말고는 키메라들의 능력이나 그들이 조종하는 전쟁 병기인 톤그란텐에 대해서였는데, 나에게는 별로 위협적인 게 아니라 대충 넘어갔다.
그때 알게 된 사실인데, 톤그란텐이라는 병기는 내가 깨어나자마자 부셨던 그 동그랑땡이었다.
골돈의 지하에서도 본 적 있는 기계다. 감시자의 하수인들이 사용하던 거였는데 어찌저찌 해석해서 이제 마탑 것이 됐다고.
“코름갈드 왕국에 보냈던 공작원이 오늘 돌아왔습니다. 아쉽게도, 특별한 정보는 없네요.”
오늘도 평범하게 설명을 들으면서 마탑 공략 방법을 짜던 중이었다.
“로빈, 잘 듣고 있지?”
“아아, 물론이지.”
그냥 무지성으로 뛰어들어 마탑이든 마탑주든 두 동강을 내고 싶었지만, 오르페가 눈치를 계속 보내서 얌전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르페는 내가 무방비 상태였을 때도 돌봐줬던 생명의 은인이다.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한다.
“곧 유검경과 모험가 길드장도 합류할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리시면...”
“크, 큰일입니다!”
릴리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이었다. 한 저항군 일원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회의실에 난입했다.
“어, 어린아이들이! 마탑의! 갑자기! 이곳으로! 바깥에서 지금!”
숨도 안 쉬고 뛰어왔는지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어쨌든 큰일이라는 거겠지.
“내가 확인하고 오겠다.”
벌떡 일어나서 회의실을 나섰다.
여기서 졸면서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다는 피 터지게 싸우는 게 더 좋다.
오르페와 트리보가 뭐라 뭐라 하면서 따라왔지만 날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완전 무장 상태로 대기 중이던 저항군들을 옆으로 쳐 내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내 닌자레이더에 포착된 사람은 50명 정도.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는 양이었다.
“습하...엥?”
신선한 바깥 공기를 들이키며 콧구멍을 벌렁이는 것도 잠시였다.
“이게 무슨…!”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기괴했다.
“...”
하얀 망토를 걸친 어린아이들 수백 명이 멍한 표정으로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멈춰!”
닌자도를 들어 올려 위협해도 눈썹만 찡그리더니 천천히 다가오는 아이들.
[세뇌당한 상태인 건가. 가로등도 없을 텐데….]
오르페와 같이 올라온 트리보가 설명을 시작했다.
“어떡하지?”
세뇌당한 사람이라면 야사요처럼 마구잡이로 죽일 수 없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이라면 더 그렇고.
그렇다고 덤벼오는 애들을 피해 도망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역시...답은 비살상 인술인 ‘꿀밤’과 ‘방정환 펀치’뿐인가?
[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동 같은 건 하지 않을 거니. 세뇌라는 건 결국 뇌의 일부분을 통제하는 것, 뇌를 완벽히 통제하지 않는 한 신체에 직접적으로 해를 입히는 명령은 따르지 않을 거다.]
뭐라는 거야 시발…!
내가 말 좀 무시했다고 일부러 이러는 건가?
“사람의 뇌 전부를 통제하는 마법은 없어. 자해에 가까운 행위는 하지 못할 거야.”
그나마 오르페의 설명이 알아듣기는 편하다.
“그러면 얘네들을 왜 보낸 거야?”
그래도 이해가 안 되는 건 마찬가지.
자폭도 못 시키는 어린아이들을 어떻게 알아낸 적대 세력의 본부에 보낸다?
기습할 기회도 포기하고? 뭔가 앞뒤가 안 맞지 않는가?
지이이이잉
그때, 이상한 효과음과 함께 아이들의 눈이 붉은빛을 뿜어냈다.
“...마탑주야.”
오르페가 이를 갈면서 아이들을 살필 때, 맨 앞에 있던 아이가 입을 열었다.
“네가, 탈주, 닌자.”
감정이 실리지 않은 기계적인 음성.
“그렇, 군. 너도, 지구에서, 온, 건가. 김, 성훈처럼.”
아이의 몸을 뺏은 무언가가 말하는 거 같았다.
“네가 마탑주냐?”
꼬맹이들을 방패 삼아 나에게 말을 걸러 온 건가.
하긴, 마탑 직원들이 왔다면 내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전부 죽여버렸겠지.
“넌, 운이, 좋네.”
날 보던 아이의 시선이 오르페에게 향한다.
이 새끼가 대답을 안 하네.
“그때, 전부, 죽인 줄, 알았, 는데.”
“...왜 그런 짓을 한 거지? 전부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잖아.”
갑자기 시작된 오르페와 마탑주의 대화. 뭔 소리인지 알 수 없어서 그냥 조용히 들었다.
“아니, 너희들은, 죄인, 이야. 대가를, 치러야, 했어.”
“말도 안 되는…!”
“고그, 마그족, 인가. 보이는, 족족, 폐기했, 는데. 수호자가, 아직도, 남아, 있을, 줄은.”
분노하는 오르페를 무시한 아이(마탑주 빙의 버전)가 트리보를 힐끗 보더니 다시 나에게 시선을 맞췄다.
“그것, 보다.”
“...”
“가장, 중요한, 건, 너겠지.”
“끊어서, 말하지, 마, 병신아.”
아까부터 존나 신경 쓰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만 아니었다면 두들겨 패면서 말하는 법에 대해 가르쳐줬을 수도.
“입이, 거치네. 성훈, 이랑, 달라.”
“할 말, 이나, 해. 십새야.”
“...우린, 싸워야, 할, 이유가, 없어.”
“그건 내가 정한다.”
무슨 음모를 꾸며서 쳐들어왔나 했는데, 그냥 포섭이었다.
“지랄 그만하고 당장 꺼져. 꼬맹이들 달고 왔으면 널 좋게 봐줄 거라 생각했냐?”
관심 있는 이성에게 말을 붙이기 위해 큐트 애니멀을 데리고 다니는 사람도 아니고.
어린아이들의 목숨을 인질로 잡은 이 새끼에 대한 분노만 커질 뿐이다.
“좋, 아. 우선,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 겠어.”
마탑주에게 입을 빼앗긴 아이가 망토 안에서 동그랗게 생긴 상자를 꺼냈다.
“저, 저거는! 자, 잠깐!”
어느샌가 저항군과 같이 올라온 릴리아가 허겁지겁 스태프를 휘두르려 할 때였다.
지이이이이잉!
상자에서 뿜어져 나온 붉은빛이 세상을 감쌌다.
“판도라의 상자?!”
이런 씨, 자해는 안 한다고 하기도 했고, 특이한 기운이나 살기가 느껴지지 않아서 좀 안심하고 있었는데.
내 감각조차 믿으면 안 됐었나?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밝은 빛 때문에 감은 눈을 떴다.
난 처음 보는 장소에 우뚝 서 있었고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둔 맞은편에는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은색으로 빛나는 머리카락과 붉은 눈.
씹덕 새끼들이나 좋아할 법하게 생긴 생김새를 한 10대에서 20대 사이의 여자.
“안녕.”
가볍게 손을 흔든 여자가 김이 올라오는 차를 들이켰다.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다.
차곡차곡 정리된 책들과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물건들.
하얀 대리석 바닥과 분홍색 쇼파, 낡은 아날로그 텔레비전. 이름 모를 식물.
깔끔하다고 하면 깔끔한 장소지만, 뭔가 이질감이 느껴졌다.
생기가 없다고 해야 하나?
“의심하고 있구나. 걱정 안 해도 돼. 공격용 마법이 아니라 너도 감지하지 못한 거야.”
차를 마시던 여자가 씩 웃었다.
“네가 마탑주냐?”
“그래. 모니카라고 불러줘.”
“닌자펀치.”
바로 그녀의 얼굴에 펀치를 꽂아 넣었다.
하지만 내 주먹은 허공만 갈랐다.
모니카라는 년이 빛의 속도로 피한 건 아니고, 그냥 내 주먹이 그 몸을 통과했을 뿐이었다.
물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 장소인가?
“호전적이네. 용감하다고 해야 할까. 지구인들은 다 그래?”
“제트킥.”
책상을 뒤엎고 모니카의 몸에 제트킥을 발사했다.
이번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김성훈과 똑같아.”
그 새끼는 또 누군데.
별말 없이 닌자도를 꺼냈다.
물리 공격이 안 통한다면 통할 때까지 줘패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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