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 74화. 이름만 다른 감시자 (3)
* * *
그렇게 줘 패기를 3시간째.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개박살이 난 공간을 보던 마탑주가 팔을 휘저어 다시 새 의자를 만들어냈다.
3000번째 의자쯤 되려나. 물론 타격감은 없었다.
“이곳은 다른 차원도, 감시자들과 비슷한 정신 공간도 아니야. 지구로 따지면…. 진보된 영상통화라고 해야겠네. 아, 메타버스? 그런 말이 있었지. 그래. 그거랑 비슷해.”
“그게 뭔데 씹덕아.”
의자에 앉은 마탑주가 다시 만들어진 책상에 두 팔을 올리더니 턱을 괬다.
“말했잖아. 공격용이 아니라고. 너와 나의 육체도, 이 공간도, 전부 구현된 것에 불과해. 네가 들고 있는 그 칼도 진짜가 아니야.”
“씁.”
빨리 마탑주를 죽이고 이 전쟁을 끝내 ‘이겼다! 이세계 탈주닌자 끝!’을 만들고 싶었는데, 역시 생각처럼은 되지 않는다.
“봐, 난 너와 대화하기 위해 사람의 형상까지 취했어. 이러지 말고 얘기나 해 보자고. 우린 싸워야 할 이유가 없어.”
“난 있어.”
“그렇다 해도 무의미해. 저항할 수 없을 테니까.”
“그건 내가 결정해.”
“릴리아한테 말은 들었을 텐데?”
“몰라.”
마탑주에 대한 설명이라면 많이 듣긴 했다.
대부분 기억을 못 해서 그렇지.
“너희의 계획은 너무 뻔해. 마탑주는 마탑을 벗어날 수 없고, 그녀만 죽이면 세력이 와해될 테니, 뛰어난 사람들을 모아 마탑에 쳐들어가, 마탑주를 죽인다. 뭐, 이 정도겠지. 날 이길 수 있다는 보장도 없으면서.”
“아닌데?”
그거 좀 괜찮은 계획인데? 릴리아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내가 흰돌고래의 본거지를 최근에 알아냈다고 생각해?”
“내가 알겠냐?”
“장소는 10년 전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다티만으로 올 때까지 기다려줬을 뿐이야.”
“뭔 소리야.”
“흰돌고래쯤이야 언제든 치울 수 있어. 공포와 불안감을 조성하기 위한 적대 세력으로 남겨놨을 뿐이지. 위협조차 되지 못하는 놈들을 굳이 죽일 이유는 없잖아?”
그렇게 말하는 마탑주의 얼굴을 조금 피곤해 보였다.
좀 띠꺼워서 닌자펀치를 한 대 더 먹여줬다.
물론 통하지는 않았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내가 입 한 번 뻥끗하면 다티만은 사라져. 고래의 숨결은 흰돌고래가 있었다는 흔적조차 남기지 않을 테지. ”
“그럼 왜 애들이나 보낸 거지?”
“널 설득하고 싶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우리가 싸울 필요는 없어.”
얘가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가 잘 안 간다.
전생에 내 따까리였나?
“나에 대해서 다시 소개하지. 내 이름은 모니카 소버린. 붉은고래 마탑의 마탑주고, 다른 세계의 초월자며, 김성훈에게 감시자를 무찌를 힘을 준 존재다.”
“어쩌라고.”
그녀가 리모컨으로 멀리 떨어진 아날로그 텔레비전을 켰다.
“말로만 하기에는 좀 힘드네. 뭐, 영상을 보면서 들어.”
지이잉 소리를 내면서 켜진 텔레비전.
방영되는 영상은 1인칭 시점이었는데, 조용히 누워있던 관찰자가 갑자기 공중에 열린 포탈로 빨려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됐다.
“알겠지만, 이건 내 기억이야. 난 유년기 시절에 감시자들에게 납치당했어. 아니, 그들이 의도한 건 아니니, 납치는 아니겠네.”
관찰자, 마탑주의 눈앞에는 빛으로 만들어진 다섯 거인이 있었다.
...다른 세계의 초월자를 불러들인 건 누구냐.
내 알고리즘에 착오가 있던 거 같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않았나. 직접 선택해서 데려와야 한다고.
그런 방법으로는 동족을 빠르게 늘릴 수 없다. 이번 일은 사소한 오류에 불과해.
거인들은 당황이라도 한 듯 눈만 껌뻑이는 관찰자를 지켜보면서 대화를 나눴다.
한 거인은 뭔가 익숙하게 생겼는데…. 포르노 같기도 하고?
마탑주가 갑자기 영상을 정지시켰다.
“부연설명이 필요하겠네. 감시자들이 예전부터 이 세계를 지배했던 것은 아냐. 이곳은 정령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관리하는 세계였다. 야인족이 섬기는 그 정령 맞아.”
정령? 이 판타지 세계에 그런 존재가 있었나?
“감시자는…. 육체를 버리고 불멸의 경지에 이른 자들의 집단이야. 초월자인 척하고 있지만, 본질은 필멸자야. 그들은 집단의 일원을 더 늘리고 싶어 했어. 세력을 키워 온 우주를 지배하고 싶어 했지.”
“방구석에 틀어박힌 씹덕이나 생각할만한 설정이네.”
“그들은 감시자 육성을 위한 장소로 이 세계를 선택했다. 정령을 몰아내고, 토착민들을 노예로 부렸지. 그러면서 감시자가 될 수 있는 적성을 가진 존재들을 납치했다. 육성을 원활하게 만들어줄 기술을 가진 고그마그족도 강압적인 방법으로 데려왔지.”
마탑주가 리모컨 버튼을 눌렀고, 영상이 다시 재생됐다.
아직 어린 개체군. 어쩌면…
한 거인이 관찰자를 향해 손을 뻗었다.
지잉!
거인의 손이 관찰자에게 닿기 전이었다.
그 몸에서 갑자기 뿜어져 나온 붉은 에너지가 거인의 접근을 차단했다.
...지나치게 강력하군. 잠재력도 어마어마해.
죽이는 건 아까운데.
우선은 봉인시키는 게 좋겠어.
영상을 정지시킨 마탑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주적인 납치조직의 수장인 위대한 다섯 성령은 나를 ‘잘못 부름 받은 자’라 불렀어. 날 지하감옥에 가두고 실험했지.”
난 어딘가 익숙한 거인을 턱으로 가리켰다. 미묘하게 닮은 다섯 거인이 뭔가 낯설지 않았다.
“쟤는 어디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마탑주가 갑자기 씩 웃는다.
“본 적이 있는 정도가 아니지. 네가 흡수한 존재인데.”
그녀가 화면 속 거인들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악몽의 구현자, 포르페나.”
아, 누군가 했더니 포르노였네.
“준엄한 협상가, 하멜리온.”
이 새끼는 누군지 모른다.
“안달프의 짐승, 돌비모스.”
모른다.
“돌로란의 필경사, 마기이노.”
누구냐 걔는.
“타콥의 부속자, 누벨피어.”
“모른다고 새끼야.”
눈치 없이 계속 말하네.
“굳이 알 필요는 없어. 뭐…. 누벨피어를 제외한 모두가 제압당한 상태니까.”
마탑주의 손끝이 날 향했다.
“앞의 두 명은 네가 흡수했고, 나머지 두 명은 내가 흡수했지. 조셉이 날 배신하고 변검경과 결탁하지 않았다면 전부 내가 가졌을 텐데.”
...이건 좀 짐작이 간다.
난 포르노와 비탄의 쇼군을 잡고, 엄청나게 강해졌다.
그렇다면 그들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두 명을 ‘쩝쩝’해버린 마탑주도 강해졌다는 거겠지.
그래도 내 정도는 아닐 거다. 그 누구라도 슈퍼 탈주닌자보다 강할 수는 없다.
“무슨 상황인지 감이 잡혀? 자, 일단 계속 보자고.”
마탑주가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섯 거인은 사라졌고, 어두컴컴한 공간에 관찰자 혼자 남겨진 상태.
“아, 좀 암울한 부분이네. 빨리 넘길게. 수백 년은 계속 이 상태니까.”
화면이 드르르르륵 돌아간다.
성훈! 어디까지 가는 거야!
화면이 멈추고, 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다.
에리카, 기다려. 여기 기척이 느껴져. 누군가 있어.
걷는 소리가 몇 번 들리더니, 한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동양인처럼 생긴 남자. 묘하게 오르페를 닮았다.
“도플갱어?”
날 닮은 이세계인도 있을까. 도플갱어끼리 만나면 한 명은 무조건 죽는다는데.
내가 죽을 일은 없으니, 그 녀석이 악당이 아니길 비는 수밖에 없다.
넌…. 누구야?
저, 저건 사람이 아니잖아…. 성훈, 그냥 가자. 빨리 빠져나가야 해. 하수인들이 움직이고 있어.
금발 머리의 여자가 나타나 남자의 팔을 붙잡았다.
조금만 기다려. 너, 말할 수 있어?
남자의 말에도 관찰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밑으로 깐 시선만 슬쩍 올릴 뿐.
너도 강제로 끌려 온 거지? 그렇지?
남자가 관찰자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괜찮아. 내가 구해줄게.
이후로는 뭐, 그냥 ‘동굴에서 살아남기’ 또는 ‘지하감옥 탈출하기’ 느낌이 나는 장면의 반복이었다.
“날 구해준 남자의 이름은 김성훈. 너와 같은 지구인 출신이야. 이때는 감시자들이 눈여겨보는 다음 감시자 후보였지.”
좀 지루한 패턴으로 가길래 화면에서 시선을 돌려 뭐라 떠드는 마탑주의 얼굴을 봤다.
그녀는 아련한 표정으로 화면 속 김성훈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여자의 이름은 에리카 이르갈. 이름을 보면 알겠지만, 이르갈 왕국의 초대 여왕이 맞아.”
“그렇군.”
누군지 모른다. 애초에 이세계로 와서 왕족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김성훈은 날 구해줬어.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게 뭐 대수라고. 구하는데 이유를 따지는 게 더 이상한 거다.
어쨌든 계속 들었다. 뭐, 나갈 방법도 없고, 싸울 수도 없으니, 일단은 기다리기로 했다.
“김성훈은 같은 처지에 놓인 이계인들과 토착민들이 힘을 합쳐 감시자에 맞서는 걸 원했어. 난 그 소원을 들어주고 싶었지. 그래서 그를 이끄는 자로 만들었어.”
관찰자가 황금색인 검과 방패, 갑옷을 만들어 내더니, 김성훈의 몸에 붉은 에너지를 주입했다.
아, 김성훈이 고대용사구나. 오르페가 착용한 장비들의 원래 주인이다.
삐까뻔쩍한 장비를 착용한 김성훈이 검을 휘두르며 요괴들과 인간을 이끌었다.
마탑주는 이계인이라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그냥 오큘이랑 꿀벌요괴 같은 요괴들이었다.
“그에게 감시자를 무찌를 힘을 내렸어. 그때는 나도 그런 힘이 있는지 몰랐었지.”
마탑주가 작게 웃는다.
“탈출에 성공한 김성훈은 동료를 모았어. 감시자들과 맞설 용기와 힘을 지닌 자들을.”
김성훈, 에리카, 관찰자의 옆에 두 놈이 따라붙었다.
한 놈은 기계였는데…
“트리보?!”
우리 고철로봇이 왜 여기서 나와.
트리보 뿐만이 아니다.
“델라미온?의 젊은 버전?!”
새까만 피부의 둘리. 아무리 봐도 델라미온인데.
“고그마그족의 수호자와 용족의 대전사인 델라미온이야. 수호자야 너랑 같이 다녔으니 그렇다 치고, 델라미온은 어떻게 아는 거지?”
“그야 내가 죽였으니까.”
“...델라미온이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고? 뭐, 용족이니 그럴 수도 있겠네.”
동료를 죽였다는 내 말에도 마탑주는 태연했다.
동료라고 생각하지 않는 거 같기도 하고.
용사라 불리는 자여. 내 이름은 델라미온, 위대한 용족의 최고위 대전사다.
근육 빵빵 도마뱀 청년 델라미온이 김성훈에게 다가간다.
내가 봤을 때보다 10배는 강해 보였다.
늙어서 약해진 건가. 대요괴라도 나이는 못 속이는군.
네깟 게 감시자와 싸워 이길 수 있다고? 우리에게 네 종족은 먹이일 뿐이다. 나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힘으로 증명해라!
그거 좋지!
갑자기 달려든 델라미온은, 황금 몽둥이를 든 김성훈에게 떡이 되도록 맞았다.
자, 잠깐! 하, 항복! 항복이다!
“에혀.”
한심한 추태에 한숨이 다 나온다.
나랑 만났을 때처럼 주제를 모르고 까불다 큰코다친 델라미온.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한자성어는 사실이다.
[수호자의 권한으로 확정한다. 우리 고그마족은 용사 김성훈을 따른다.]
델라미온이 떡이 되도록 맞는 걸 지켜보던 트리보가 김성훈에게 악수를 청했다.
눈치 빠르고 얍삽한 게 지금이랑 똑같다.
“나와 김성훈은 이계인과 토착민을 이끌고 감시자들과 싸웠어.”
마탑주가 빨리 감기 버튼을 눌러 화면을 넘긴다.
나름 웅장해 보이는 전투신과 나름 대단해 보이는 활약들이 존나 빠르게 넘어간다.
실전 압축 액션 영화 보는 줄.
“그리고 승리했지.”
기쁨의 환성을 지르는 사람들과 그 앞에 선 다섯 동료.
김성훈과 에리카가 서로 끌어안더니 뽀뽀를 퍼부었다.
델라미온 이 새끼는 뜬금없이 브레이크 댄스를 추고 있네.
트리보는 언제나 그렇듯 그냥 무덤덤하게 서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평화를 원했지. 오랜 싸움에 지쳤으니까.”
사람들이 김성훈을 들어 올려 행가래를 쳤다. 황금 갑옷이 무거운지 얼마 못 가고 끝났지만.
그들을 보는 에리카의 시선이, 어쩐지 곱지 않았다.
“하지만 에리카 이르갈은 불멸의 권력을 원했어.”
다시 김성훈에게 향한 에리카의 눈동자는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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