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세계 탈주닌자-75화 (75/119)

〈 75화 〉 75화. 이름만 다른 감시자 (4)

* * *

“뭐, 김성훈과 나도 알고 있었어. 그렇게 오랜 시간동안 같이 있다 보면 보고 싶지 않아도 보이는 법이거든.”

마탑주가 다시 원상 복귀된 책상에 두 손을 올렸다.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다.

“하지만 신경 쓰기에는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많았지. 감시자들을 완벽히 죽인 게 아니라, 그들이 숙주로 삼고 있던 육체를 빼앗고, 하수인들을 무찌른 것에 불과했거든. 같이 연합해서 싸운 파벌끼리 땅 갈라먹기도 해야 했고.”

텔레비전에서는 요괴들과 인간들이 회의하는 모습이 나오고 있었다.

“태어난 세계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이계인들도 많았어. 귀환할 방법도 찾아야 했지.”

델라미온은 꽤 발언권이 강했는지 맨 앞쪽에서 앉아 있었다.

“이계인들이 남는다고 해도 문제였어. 이계인들은 수가 적은 대신 개개인의 전투력이 토착민보다 뛰어났거든. 뭐, 감시자 후보로 점 찍어놓은 자들이니 그럴 수밖에.”

델라미온의 맞은편에는 에리카가, 그 중앙에는 김성훈이 자리를 차지한 상황.

“아직도 정령을 숭배하던 인간들은 산속으로 들어갔어. 지금은 야인족이라 불리는 세력이지. 나머지 인간들은 지도자를 선출한 후 나라를 세웠어. 이계인들은 귀환파와 적응파로 나뉘었고, 고그마그족은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지.”

긴 회의가 끝나고 에리카 이르갈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진다.

“에리카는 원하던 권력을 손에 넣었어. 이르갈 왕국의 초대 여왕이 됐지. 그녀를 지지하지 않던 세력은 빠져나가 코름갈드 왕국을 세웠고.”

“이르갈? 코름갈드? 이가와 코가?”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에리카 이르갈은 만족하지 못했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싶어 했지. 하지만 이계인과 토착민 전부의 마음을 사로잡은 김성훈이 존재하는 한 불가능했어. 그들의 마음 깊은 곳에 그가 있었으니까.”

“모두의 아이돌이다 이거군.”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며 머리를 굴렸다.

내 일행과 저항군, 항복한 칠검경 두 명은 어디서 뭘 하고 있을까.

날 여기서 빼내기 위해 짱구를 굴리고 있는 중일까?

“나라가 어느 정도 안정되자 첩보조직과 정보조직을 만들어 비밀리에 운영하더라. 왜 그런지는 뻔했지. 맘에 안 들고 체제에 맞지 않는다 판단되는 놈은 잡아 죽이고, 정보를 통제한 후 자신을 높이고…. 나와 김성훈도 그녀의 행동을 모르고 있진 않았어. 난 그에게 에리카를 죽이자 주장했지. 감시자와 다를 바 없는 사람이라 말했어.”

어느새 휙휙 넘어간 화면에는 관찰자와 김성훈이 독대하고 있었다.

­ 어린 애가 못 하는 말이 없네. 모니카. 모든 일을 그런 식으로 해결하면 안 돼. 대화로 해결할 수 있을 거야.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나에게 방법이 있어.

“김성훈의 방법은…. 에리카와 결혼해, 곁에서 그녀를 보좌하면서 억제한다는 거였어. 뭐, 나쁘지 않은 방법이었지. 둘은 원래 연인 사이였고, 김성훈의 무력은 날 제외한 모두를 압도할 만큼 뛰어났으니까. 에리카가 어떤 방법을 쓰든 간에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겠지.”

힘센 기둥서방 역할을 맡아 아내가 멍청한 짓을 할 때마다 ‘난 언제든지 너를 줘팰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는 건가.

기생오라비나 생각할법한 발상이다.

“나였으면 그냥 죽였어.”

“김성훈은…. 정의롭고 신실한 사람이었어.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어 했지.”

“그딴 건 없다.”

모두가 상처받지 않는 세계. 그건 부모님이 주는 용돈처럼 거저먹을 수는 없다.

등가교환이라는 한자성어가 있다.

같은 가치를 가진 두 상품이 교환되는 것을 뜻하는 말인데, 쉽게 풀어 해석하자면 만 원을 내야 타코야끼 한 상자를 먹을 수 있다는 거다.

평화도 그렇다. 평화는 백 원이나 오백 원, 심지어 오만 원으로도 살 수가 없다.

평화를 위해서는 ‘폭력’과 ‘죽음’, ‘개박살’이라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하지만 평범한 백성들이 그런 걸 지불하기는 어렵다.

대부분의 사람은 위의 저 세 단어에 엄청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대신 평화를 위한 대가를 지불해주는 전사를, 사람들은 탈주닌자라 부른다.

괜히 그림자 속에서 백성을 섬긴다고 하는 게 아니다.

“어쨌든, 괜찮은 시도였어. 야망 넘치는 에리카 이르갈이 김성훈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었거든. 김성훈을 깔끔하게 죽일 자신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 둘 사이에서 아이까지 생겼어. 그렇게 평화는 유지될 것 같았지.”

“그런데?”

마탑주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끝났다면 얼마나 좋겠어. 얼마 못 가 문제가 터졌지. 귀환파가 감시자의 물건을 건드리면서 귀환할 방법을 찾다가, 그들이 안배해놓은 함정을 발동시켰어. 놈들도 이계인이 귀환할 방법을 찾을 줄 알고 있던 거지. 요즘 사람들은 그걸… ‘감시자의 저주’라고 부르더군. 효과는 전해져 내려오는 거랑 비슷해. 저주에 걸린 이계인들을 멍청하고, 폭력적이고, 잔인하게 바꿔놓지. 지구로 따지면…. 광견병 같은 거야.”

“그렇군.”

감시자의 저주. 이것 또한 들어본 적 없다.

일단 적당히 아는 척하자.

“모든 이계인들이 저주에 걸렸고, 나 또한 예외는 아니었어. 아니, 오히려 내가 가장 심했지. 수백 년 동안 날 연구하면서 내 잠재력을 깨달은 감시자들이 제일 견제한 대상이니까.”

“자뻑이 심하네.”

“난 형체조차 유지하지 못한 채로 한 장소에 묶였어. 물리적인 간섭이 불가능했지. 그래, 완벽히 무력화된 거야.”

마탑주가 화면을 가리켰다.

“필멸자 중에 가장 강력했던 김성훈도…. 강력한 저주에 걸렸지. 날마다 피를 토할 정도로 강한 저주였어.”

­ 모니카.

창백한 안색의 김성훈이 관찰자의 얼굴을 쓰다듬으려 손을 뻗는다.

하지만 그 손은 닿지 못한 채 통과될 뿐이었다.

­ 성훈, 미안해. 도움이 못 돼서.

­ 아니야. 내가 좀 더 철저히 나섰어야 했는데... 에리카한테 너무 신경이 팔렸어.

­ 조금만 기다려.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저주를 해석할 수 있을 거야.

­ ...에리카가 토벌령을 내렸어. 군대를 앞세워 이계인들을 마구잡이로 사냥하고 있어. 델라미온은 동족을 챙겨 피신했고, 고그마그족은 지하 깊은 곳으로 숨었지만, 대부분은 무력하게 죽어가고 있어. 난…. 이제 결단을 내려야 해.

­ 안돼…. 그러지 마.

­ 너라면 언젠가는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겠지. 감시자도 언젠가는 돌아올 테지만…. 나랑 한 가지만 약속해줄 수 있겠니?

­ 얼마든지.

­ 우리가 구한 이 세상을 안전하게 지켜줘. 사람들이 올바른 길로 향할 수 있게 도와줘. 내가 널 구했던 것처럼. 네가 나에게 싸울 힘을 줬던 것처럼. 오직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 ...알겠어.

­ 부탁할게.

고개를 끄덕인 김성훈이 사라졌다.

“김성훈은 에리카를 암살하려 했고, 실패했어. 에리카, 에리카의 아이들, 그 아이의 자식들이 계속해서 지배를 이어나갔지. 그들을 위해 희생했던 김성훈은 동화 속 인물이 됐고, 이계인들은 몬스터가 됐어.”

우두커니 선 관찰자의 눈앞에 수많은 풍경이 지나간다.

“난 그걸 전부 지켜봤어. 그리고 깨달았지.”

마탑주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인간은…. 어리석은 존재야. 잘못된 판단을 하면서, 파멸을 향해 뛰어들지.”

그녀의 붉은 눈이 빛을 발했다.

“멍청한 그들이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지. 하지만…. 난 김성훈과 약속을 했어. 이 어리석은 돼지들을 보호하고, 올바른 길로 이끌겠다 맹세했지.”

갑자기 텔레비전이 꺼졌다.

“난 그 약속을 지켰어. 저주를 어느 정도 중화시킨 후, 일시적인 육체로 다시 세상에 현신해 붉은고래 마탑을 세웠어. 마탑을 조종해 감시자들을 견제하고, 기술을 급속도로 발전시켰지. 깨어나면 인류와 패권을 놓고 다투게 될 고그마그족도 발견되는 족족 폐기했고.”

마탑주가 내 닌자슈트를 흘겨봤다.

“네가 입은 그 옷도 우리 마탑이 만든 상품이지.”

“음?”

그러고 보니 무슨 마탑이 만든 옷이라 했던 거 같기도 하고.

“인간은 지배당하기를 원하는 생물이야. 본인들의 안전을 책임져 줄 존재를 원하지. 하지만 감시자나 이계인처럼 자신들과 다른 존재가 지배하는 걸 원치 않아. 한 개인의 지배가 길어지면 감시자 때처럼 강하게 저항하기도 해. 그래서 난 그림자 속에서 인류를 이끌기로 했어. 인류를 이끌 뛰어난 자들을 선발해 앞에 세울 거고, 주기적으로 그들을 교체할 거야. 인류는 그 어느 때보다 안전해지겠지.”

“그래서.”

마탑주의 말을 끊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지?”

더는 못 참는다.

아무 생각 없이 살짝 눈이라도 감다간 푹 자게 될지도 모른다.

빨리 마무리를 짓는 게 좋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은, 결국 인류를 강하게 만들 거야. 넌 백성을 위해 싸운다고 했지. 우린 싸울 이유가 없어.”

“그렇군.”

“이제야 좀 마음이 움직여?”

“너에 대해서 알 것 같군.”

“내 설명이 의미가 있어서 다행이네.”

반쯤은 피곤해서 흘려들었지만, 이제 어느 정도 알 것 같다.

처음 이 장소에 왔을 때 왜 이질감이 느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넌 제육천마왕이다.”

그녀가 인간인 척하며, 인간이 할 짓을 흉내 내는, 따라쟁이 괴물이었기 때문이다.

괴물은 인간을 흉내 낼 수는 있어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니 인테리어 센스마저 이질감이 들 수밖에.

“...뭐? 그건 또 무슨. 아니, 왜 그런 결론이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논리적인 판단이다. 넌 부처의 선택을 받은 날 회유하려 했고, 여러 좆같은 짓들을 정당화했다. 인간이 아닌 슈퍼 괴물이기도 하고.”

슈퍼 괴물이라는 게 제일 중요하다.

모니카 이 년은 히틀러 그 새끼처럼 그냥 자칭 제육천마왕, 천마 수준이 아니다.

틀림없는 판타지 세계의 ‘찐퉁’ 제육천마왕.

“좆같은 짓? 뭘 말하는 거지?”

천마 모니카 소버린이 눈을 찡그린다.

“사람들을 실험체로 쓰고, 수도에 미사일을 발사했잖아.”

“미사일이 아니라 고래의 숨결이야. 전부 다 필요한 일이었어. 내가 선제공격을 가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무의미한 저항을 위해 힘없는 사람들만 죽어 나갔을걸.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눌렀기 때문에 그나마 평화롭게 마무리 지어진 거야.”

“헛소리.”

또 또 변명. 입만 열면 변명이다.

“실험체라... 내가 실험체로 사용했던 자들은 전부 고아였어. 아니더라도 빈민촌의 떨거지였고. 그런 쓸모없는 인간 백 명의 목숨으로 천 명이 넘는 의미 있는 사람들을 살릴 수 있어. 수지에 맞는 계산이지.”

수지에 맞는 계산? 이 새끼가 등가교환을 들먹이네.

“그 계산은 틀렸다. 사람 한 명이 보유한 친구는 어림잡아 백 명쯤 된다. 계산해봐라. 백 명이 죽으면 수백만이 넘는 친구들이 눈물을 흘린다. 울다가 너무 슬퍼서 자살하는 사람의 수도 절반은 되겠지. 그건 수지에 맞지 않아.”

“수백만이 아니라 만 명이겠지. 그리고 고작 사람 하나 죽었다고 자살까지 할 사람이 얼마나­”

“입 닥쳐! 내 계산이 맞아!”

다시 책상을 뒤엎었다. 이번에도 타격감은 없었다.

“네가 아무리 혓바닥을 놀리고! 지루한 과거 얘기를 들려줘도!! 난 속지 않아!!!”

닌자도를 꺼내 모니카에게 겨눴다.

“그러니 좆같은 짓 그만하고 메타버스인지 마을버스인지나 풀어. 난 네 목을 따러 가야 하니까.”

마탑주가 똥 씹은 표정을 지었다.

“...어리석은 돼지들을 위해 싸우시겠다?”

“돼지가 아니라 유인원이다.”

“뭐?”

“유인원은 언젠가는 인간으로 진화하게 되어 있다.”

이는 불교적 진화론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

“내 사명은 그들의 진화를 지켜보면서 너 같은 방해꾼을 제거하는 것.”

“마지막 기회를 줄게. 차분하게 더 생각해봐. 난 감시자들과 달라. 난 태어날 때부터 신이었어.”

“­널 죽이겠다.”

슈퍼 탈주닌자의 살인예고. 이는 무를 수 없다.

“...후회할 거야.”

“그런 일은 없다.”

잔뜩 인상을 쓴 천마 모니카가 이상한 인테리어의 방과 함께 사라졌다.

“로빈! 괜찮아?”

다시 눈을 뜬 곳은 다티만, 오르페가 날 끌어안고 있었다.

내가 뭐라 입을 열기 전이었다.

우우우우웅­

수상한 효과음과 함께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졌고, 구름 사이로 거대한 기계가 모습을 드러냈다.

“고, 고래의 숨결!”

[이것도 고그마그족의 기술! 마탑주는 도둑이 분명하다!]

릴리아와 트리보가 호들갑을 떤다.

벌떡 일어나 그 기계를 마주했다.

지이이이이이이잉­!

엄청난 굉음과 함께 붉은 에너지가 발사됐다.

목표는 내가 서 있는 이곳.

“이, 이걸 어떻게…. 아…!”

“젠장!”

환검경과 강검경, 다른 저항군들의 얼굴에 절망이 가득했다.

“걱정 마라.”

그렇게 말하고 그들 앞에 우뚝 섰다.

이세계 제육천마왕의 천마 감마레이 버스트.

오직 나만이 이 우주적 재앙과 맞설 수 있다.

“후우…!”

호흡을 고르고 마나를 끌어당겼다. 막대한 힘이 날 중심으로 모인다.

준비됐고…. 쏜다!

“­궤도 폭격의 술.”

부아아아아아아아아앙­!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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