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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세계 탈주닌자-77화 (77/119)

〈 77화 〉 77화. 이세계 탈주닌자 (2)

* * *

­ 히히히힝~!

기묘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고추장처럼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적토마­유니콘­페가수스.

유검경의 전설 등급 전용 탈것인 정령마다.

그 위에 올라탄 단발을 한 백금색 머리카락의 여자는…. 당연하게도 아가사였다.

“...탈주닌자.”

복잡한 표정을 한 아가사가 녹색 눈을 찡그렸다.

“오랜만이네.”

이 녀석도 60년(체감) 만에 보니 반갑다. 손을 살살 흔들어줬다.

“정신은 차렸니?”

간단하게 안부를 물었다.

예전처럼 죽어라 죽여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덤비지 않는 거로 보아 내 물리치료의 효과를 톡톡히 본 것 같았다.

“...난 아일린이 그런 아이일지 몰랐다. 누구보다 열심히 훈련하던 아이였으니, 올곧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진짜 나쁜 새끼들도 열심히 산단다. 더욱더 힘차게 사람을 죽일 생각으로 가득한 거지.”

비탄의 쇼군 제이드 그 새끼도 다리가 짧고 몸통이 비실거려서 그렇지 재능충에 노력충이었다.

자택 지하에서 해골 컬렉션을 전시할 생각에 신나 그렇게 열심히 자신을 가꾼 것이리라.

“...난 그걸 너무도 늦게 깨달았다. 면목 없다.”

정령마에서 내린 유검경이 나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하지만 쉽게 용서할 수는 없는 법. 이년 때문에 내가 다 잡은 꿀벌여왕을 놓칠 뻔하지 않았는가.

“­그렇다면 불판 위에서 알몸으로 도게자 해라.”

“...뭣이?”

“구라고, 알면 됐어.”

사실 그냥 가벼운 조크다. 이미 끝난 일이니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지.

“그러면, 이제 동료인가?”

조심스레 묻는 아가사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악수를 한 후 깔끔하게 끝냈다.

“아가사, 오랜만이네.”

오르페와 같이 우리 대화를 지켜 보고 있던 환검경이 아가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아, 선배님? 합류했다는 소문이 진짜였군요. 그렇다면 강검경도?”

“그래. 여기 계시지. 뾰롱이 상태가 좋아 보이네.”

“뾰롱이가 아니라 붉은 섬광입니다.”

환검경이 아가사의 적토마­유니콘­페가수스에게 손을 뻗었다.

­ 푸르르르르~!

그녀의 손이 닿기 전에 증기 기관차처럼 콧김을 팍 내뿜는 정령마.

뿔이 경보기처럼 번쩍번쩍 빛나는 게 갑자기 레이저 빔이라도 쏠 거 같았다.

비처녀 위험 주의보인가.

“아직도 날 싫어하네. 내가 얼마나 챙겨줬는데.”

“선배님이 정의롭고 신실한 여자가 아니라서 그런 겁니다.”

“너, 안 보는 사이 많이 건방지게 변했다?”

“너무 슬퍼 마시죠. 붉은 섬광은 제 기사단원 중에서도 만질 수 있는 이가 적으니까요. 신실함에 대한 기준이 높은 거겠죠.”

아가사가 훗, 하고 웃으면서 정령마의 갈기를 쓰다듬었다.

“보시죠. 얌전하지 않습니까. 제 올곧은 마음을 알아보는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그게 아닌 거 같은데.

“그건 그냥 단장님이 남자 하나 못 만나본 꽉 막힌­”

“케이트, 입 다물어. 단장님 쪽팔리게 하지 말고.”

기사단원인 케이트(오르페랑 대련해 준 적이 있다 들어서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가 사실적시에 의한 명예훼손을 저지르기 전에 부단장인 레오나가 저지했다.

아가사를 제외한 기사단원들은 유니콘의 진실에 대해 알고 있는 거 같았다.

“유검경, 저희가 상록수 마을에서 신세를 졌었죠.”

오르페가 아가사에게 악수를 건넸다.

“아, 그…. 오르페 양?”

갑자기 어려운 사람을 대하듯이 행동하는 아가사.

“그냥 오르페라고 불러 주세요.”

“그, 그러지.”

어색하게 움직이는 아가사 뒤에서 케이트가 소리를 질렀다.

“아, 진짜~! 저분도 우리 기사단에 들어왔어야 하는데. 출셋길이 이렇게 빗나가네... 안 그래요?”

“시끄러우니까 입 닫아.”

만담 콤비 케이트와 레오나. 티격태격하는 게 사이좋은 언니와 동생 같다.

슬슬 다른 곳으로 가보기 위해 몸을 움직였을 때, 아가사의 허리춤에 걸린 ‘영혼 포식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직 뽑지 않아서 그런지 요사스러운 불빛과 효과음은 없었다.

이름처럼 영혼을 포식하는 검일까.

...혹시?

새로운 인술 ‘영혼 시야’를 켜고 그녀의 검을 노려봤다. 비탄의 쇼군을 죽이고 얻은 능력에 붙인 이름이다.

­ 끼에에에에…

­ 죽여…. 줘...!

검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있는 도깨비불들이 보인다.

아무래도, 진짜 영혼 포식자가 맞는 모양이다.

“그, 그렇지! 자네도 ‘신실함’을 시험해 보지 않겠나?”

어색한 표정으로 오르페와 대화를 나누던 아가사가 정령마를 가리켰다.

“곤란할 때 뾰롱이 찾는 건 그대로네. 난 가볼게.”

“붉은 섬광이라니까요.”

비처녀, 아니, 환검경이 고개를 절레절레 짓더니 자리를 옮겼다.

“정령마…. 예전부터 타보고 싶기는 했어요.”

아무것도 모른 채 적토마­유니콘­페가수스에게 다가가는 오르페.

뭐, 결과는 뻔했다.

­ 부히히히히힝~!

“붉은 섬광이 이렇게 기뻐하다니…! 역시 혈통은 속일 수가 없는 건가!”

음침녀였던 오르페를 유니콘이 싫어할 리 없지 않은가.

후보생들을 건드는 교관이 닌자마을에 있던 것도 아니다.

냉정한 살인병기로 키워야 한다며 오히려 ‘그 행위’를 금지했었다.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폭발시키다 대머리 교관의 철권을 맞고 혼수상태에 빠졌던 커플도 있었을 정도.

후보생 녀석들, 살아는 있을까?

갑자기 보고 싶어지는 날...

“567!”

존나 깜짝이야!

폴짝 뛴 후 목소리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똑같은 디자인의 옷을 입은 남녀와 사자머리를 한 남자가 웃으면서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이야, 넌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친한 척하는 커플티 남자.

“난 소문 듣자마자 너인 거 알았어. 자기를 닌자라고 불라달라는 사람은 너밖에 없잖아. ‘와자뵷!’이나 ‘닌닌’도 그렇고.”

아는 척하는 커플티 여자.

“널 보니 다시 그 동굴이 생각나네. 너 아니었으면 다 죽었을거야. 다시 한번 고맙다.”

고마워하는 사자머리 남자.

날 567이라 부르는 걸 보니 사갈의 꼬리 후보생 같은데, 누군지 전혀 기억이 안 난다.

“561, 562…. 547까지?”

머리만 긁적이고 있을 때, 구세주 오르페가 나타났다.

“누구지?”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561이랑 562는 연인 사이로 유명했잖아. 서로 그, 음, 애정 행위를 하다 걸린 적도 있었고.”

아, 대머리 교관에게 걸린 연놈들이 얘네들인가?

얼굴은 기억하지 않고 사건만 기억해서 몰랐다.

“547은 너랑 나 다음가는 후보생이었어.”

얘는 진짜 모르겠다.

나랑 오르페 다음이면 3등이라는 건데, 2등도 기억하지 않는 세상에 3등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정말 반가워.”

하지만 모른 척하기에는 내 탈주닌자로서의 명성이 걱정됐다.

적당히 친한 척해주면서 말을 받아줬다.

“우린 모험가 일을 하고 있어. 이 전쟁이 끝나면 정식으로 혼인할 거야.”

“난 용병 일을 해. ‘금빛 갈기’ 제스라고 하면 꽤 유명할걸. 아, 내 아내와 딸을 그린 그림이 있는데, 한번 볼래?”

“아니.”

와. 어떻게 된 새끼들이길래 사망 플래그로 가득한 대사만 뱉는 것일까.

이놈들하고 있으면 이길 전쟁도 지게 생겼다.

“아무튼 바쁨. 가본다.”

“567, 아니, 로빈! 새로운 삶을 줘서 고마워! 우리 진짜로 열심히 살고 있어!”

“너처럼 일면식도 없는 사람을 위해 싸울 만큼 정의롭지는 못해도,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건 나도 할 수 있어. 좋은 아빠, 좋은 남편으로 당당하게 살 거야. 그러기 위해 여기 와 있고. 서로 최선을 다하자고!”

뒤에서 뭐라 소리 지르는 녀석들을 무시한 채 자리를 벗어났다.

이번에도 오르페에게 맡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도주는 길지 않았다.

이 만남의 광장을 빠져나가기 위해 발을 놀리던 내 어깨를 누군가가 붙잡았기 때문이다.

“이게 누구신가? 정의로운 모험가 로빈, 아니지! 이제는 탈주닌자라고 불러야 하나? 어쨌든 반갑네!”

“사장님! 접니다! 귀상어 존입니다! 기억하시죠?”

“레너드? 귀상어?”

이번엔 아는 얼굴들이다.

“자네에게 큰 도움을 받았으니, 우리 골돈도 한 몫 거들어야 하지 않겠나?”

“조안나 영주님이랑 트렌 경은 영지를 지켜야 하므로 오지 못하셨습니다. 대신 안부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레너드는 피부 미백이라도 받았는지 전보다 더 젊어져 있었고, 귀상어는 벌크업이라도 했는지 전보다 더 듬직하게 자라 있었다.

“유니콘도 와 있냐?”

“유니콘? 아, 제 아내인 유니스 말이군요? 그, 얼마 전에 임신해서…”

바보처럼 헤헤 웃는 귀상어와 흐뭇한 미소를 짓는 레너드.

임신한 아내. 이것도 사망 플래그인데.

“좆됐군.”

쉽게 이기기는 벌써 글렀다. 그냥 혼자 싸울 걸 그랬네.

오르페…. 전부 너 때문이야.

***

늦은 밤.

사망 플래그 스트레스로 인해 방 안에서 축 늘어져 있을 때였다.

“피곤해?”

가벼운 옷으로 갈아입은 오르페가 문을 살며시 열고 들어왔다.

“좀.”

사실 존나 피곤하지만, 내색하면 약해 보이겠지.

참아야 한다.

“용건은?”

“그냥. 심심해서.”

진짜로 심심해서 들어왔는지 오르페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며 나와 말을 주고받았다.

“...내일부터 시작이네.”

가로등이 많은 지역이나 마탑 지부가 있는 곳을 피해 마탑 본부로 행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존나 걷겠군.”

아무 생각 없이 뚜벅뚜벅 걷는 것도 스트레스다. 그냥 나 혼자 달려가면 하루도 안 돼서 도착할 텐데.

“로빈.”

이야기를 멈추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오르페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감시자가 봉인되어 있던 유물을 만지기 전에 한 말, 기억나?”

“글쎄.”

“네, 네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나라고 그랬어. 목숨을 맡길 수 있다고.”

그랬나? 까까시 복사 임팩트가 너무 강해서 잊어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오르페가 갑자기 자기 과거 스토리를 풀어놓았다.

좀 뻔한 이야기였다.

엄마가 정실이 아니라 첩이었던 탓에 넓은 집에 혼자 틀어박혔어야 했고, 사람이 아니라 책과 소통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잘 대해주던 배다른 언니는 매일 훈련을 나가 잘 볼 수 없었고, 친엄마는 사치와 향락을 누리기에 바빠 날 신경 써줄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에 야쿠자에게 습격을 당했고, 배다른 언니의 희생으로 혼자서 살아남았다.

엄마의 친척이었던 마법사의 도움으로 머리색을 바꾼 후 시골로 도망쳐 죽은 듯이 지냈지만, 아이들을 납치하던 사갈의 꼬리에 잡히고 말았다.

기구한 팔자의 인생담이지만, 아주 재밌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나에게 그런 말을 해준 건, 네가 처음이야.”

과거 얘기를 해서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이 붉어진 오르페가 날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로빈.”

아니.

“오늘이 아니면 기회가 없겠지.”

잠깐, 뭔가.

이 상황을 영화나 드라마, 소설에서 본 적 있는 거 같은데.

“네가 했던 말에 대한 대답이야.”

설마.

“너는 과격하고 엉뚱하지만...”

진짜로?

“진실하고 열정적이야.”

으아, 씨발­!

“나도 너를 사랑, 아니, 좋아해.”

좆 됐 다 !

커플의 결혼, 가족 자랑, 아내의 임신에 이어 전쟁터에서 반드시 죽는 플래그가 하나 더 다 나왔다.

전쟁 전에 하면 안 되는 대화 그 네 번째.

사랑 고백!

그것도 씨발 동료가 당하는 게 아니라 내가 직접 듣는 거로!

“단 한 번만이라도 좋아. 네 온기를 느끼고 싶어.”

굳어버린 내 몸을 오르페가 껴안았다. 대답은 아직 안 했는데...

이 전쟁, 이길 수 있을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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