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78화. 이세계 탈주닌자 (3)
* * *
붉은고래 마탑 최상층에 위치한 거대한 회의실.
붉은 기운이 은은하게 감도는 그곳의 천장에는 거대한 고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후.]
원탁 중앙에 앉은 모니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정확히는 모니카가 아니라, 정교한 마법으로 만들어진 그녀의 홀로그램이었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여버렸는지…’
조셉 망그로브가 배신을 할 만큼 야심이 크다는 걸 알고서도 유능하다는 이유로 많은 권한을 줬을 때인가?
아니면, 탈주닌자에게 묘하게 집착하던 절검경 제임스 본크의 말을 새겨 듣지 않아서인가?
그것조차 아니라면, 조셉과 거래한 이리나가 빼돌린 유물을 찾기 위해 패검경을 보내고, 에리카 이르갈의 마지막 후손에게 김성훈의 장비를 빼앗겼을 때인가?
‘배신자의 후손들을 모조리 죽였어야 했는데.’
모니카 소버린은 원탁 끝에 앉은 벨더가드 사무초에게 못마땅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벨더가드가 아니라 제임스에게 일처리를 맡겼다면 단 한 명도 살아나가지 못했을 거고, 후손 처리에 시선이 팔리는 일도 없었을 것이었다.
제임스가 사갈의 꼬리를 궤멸시킨다며 설치고 다니던 걸 막았어야 했다.
그렇지만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해봤자 변하는 건 없는 법.
결국 지구에서 온 그 남자는 짧은 시간 안에 위대한 다섯 성령의 힘을 전부 흡수하고, 고래의 숨결을 파괴할 정도로 강해졌다.
턱을 괸 모니카는 감시자들의 수장이자 위대한 다섯 성령 중 하나인 돌로란의 필경사, 마기이노를 떠올렸다.
몇달 전에 모니카가 완벽하게 흡수한 그 감시자는 본인에게 종속된 감시자들의 기억을 보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네오솔리트론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낸 탈주닌자가 칠검경 중 다섯을 쓰러뜨렸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모니카는 시간을 들여 종속된 자들의 기억을 전부 살펴봤다.
벨카투나와 하스샨다.
탈주닌자가 쓰러뜨린 이 두 감시자는 운 좋게도 마기이노의 밑에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의 기억을 통해서 탈주닌자가 김성훈과 같은 세계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과, 강력한 정신 방벽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하지만 단 한 명의 인간이 두 성령의 힘을 빠르게 받아들인 후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을 줄 어떻게 예상했겠나.
이계인 중 가장 재능 있었던 김성훈조차도 모니카의 도움이 없었으면 다섯 성령을 쓰러뜨린 후 유물에 봉인시킬 수 없었는데.
‘일반 감시자도 아닌 성령을 흡수하는 건 필멸자의 섬세하고 유약한 정신세계로는 불가능한 일인 텐데…’
현재 상황에 대해 인지시킨 뒤, 좋은 조건으로 대우해서 협력관계를 쌓으려고 했으나, 그것조차 실패했다.
모니카는 상식 밖의 존재를 간과했고, 그 대가를 치르는 중이었다.
‘통제할 수 없는 괴물.’
그게 탈주닌자와 직접 만난 모니카 소버린의 평이었다.
빠른 세계 장악을 위해 수십 년 동안 만들었던 고래의 숨결조차 망가진 상황.
멀리서 견제할 수 있는 무기가 사라졌으니 반대세력이 뭉치는 것조차 막을 수가 없다.
이제 모니카가 취할 수 있는 수단은 단 하나뿐이었다.
[...물질계에 강림하겠다. 다들 준비해라.]
막대한 위험을 짊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모든 걸 걸고 맞서야 한다.
‘김성훈과 한 약속을 위해서.’
수백 년이 넘는 세월 동안 그녀를 지탱해준 단 한 사람을 위해서.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모니카의 홀로그램이 회의실에서 모습을 감췄다.
***
“확 그냥 우리 마탑의 비밀병기인 ‘투명도마뱀의 숨결’이나 떨궈 버릴까…!”
“마탑주님, 우리는 그런 거 없지 않습니까.”
“있어! 내가 만들었다! 비밀리에!”
투명도마뱀 마탑주, 티치타크가 소리를 질렀다.
이 털보 아저씨 반응이 격한 건 오늘내일이 아니라 그러려니 했다.
“폭도들은 해산하라. 지금 걸음을 돌린다면 쫓지 않겠다. 이르갈 국왕님의 뜻이다. 반복한다. 폭도들은 해산하라.”
마법 스피커를 든 채 앞에 나선 붉은고래 마탑 소속 마법사의 말이 울려 퍼졌다.
그의 뒤에 자리 잡은 것들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
공중에 떠 있는 톤그란텐 수백 대와, 검은 갑옷을 입고 전투 마차에 탄 갱생대원들과, 기괴한 모습으로 합쳐진 요괴 키메라들, 방패병들의 보호를 받은 마법사들과, 마지막으로 이르갈 왕국 소속의 병사들이 있었다.
이 새끼들을 전부 죽여야 놈들 뒤에 있는 마탑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아니, 쟤네들은 왜 있는 거야.”
병사들이 왜 자기들 국왕을 죽이고 세계를 정복하려고 하는 세력에 붙었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어, 나와 같이 선봉이 선 오르페에게 물어봤다.
저번에 사랑 고백을 한 오르페는 진짜로 날 끌어안기만 했다.
외설은 일절 없으니 엄한 상상은 금지다.
“대부분의 사람은 이르갈 왕족이 전부 죽고 가짜로 교체됐다는 것도, 고래의 숨결의 배후가 붉은고래 마탑이라는 것도 몰라. 꼭두각시 가짜 국왕의 명령으로 온 걸 거야.”
이러면 죽이기 좀 까다롭지만, 내가 망설이면 같이 싸우러 온 아군이 피해를 본다.
나 빼고는 다들 좆밥이라서 그렇다.
“어쩔 수 없지.”
너무 덤벼들면 죽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딱 하나만 더 확인했다.
“트리보는?”
오르페가 목에 건 라미나의 목걸이, 정확히는 고그마그족의 통신기를 만졌다.
“...별다른 충돌 없이 가고 있어. 우리가 시간만 벌어주면 돼.”
트리보는 저항군과 같이 오지 않았다.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지금 전국에 퍼져 있는 가로등을 제어하는 중앙 제어장치?가 마탑 안에 있을 확률이 높다며, 그것만 해킹하면 마탑 녀석들이 고그마그족의 기술을 사용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로빈, 네가 긴 잠에 빠진 동안 난 손상된 동력원을 고쳐 기억을 되찾았다. 마탑주의 정체는 용사와 나의 동료였다. 다른 세계에서 온 강력한 초월자였지. 이제 그녀는 우리 종족을 폐기하고 기술을 훔쳐가는 도둑이 됐다. 고그마그족의 수호자로서, 용사의 동료로서 사명을 다하고 싶다.]
그렇게 말한 트리보는 닌자 커플, 사자머리 닌자와 함께 마탑에 몰래 잠입하기 위해 저항군보다 한발 앞서 길을 떠났다.
덩치 크고 시끄러운 고철이 어떻게 잠입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도와주는 닌자가 셋이니 어떻게든 될 거라 믿는다.
아달리는 아멜리아를 지켜야 한다며 마지막 전쟁에 오지 않았다.
그건 뻥이고 사실은 내가 무서워서 안 나오는 거 같기도.
“준비는 되셨습니까?”
흰돌고래의 리더, 릴리아 차스테인이 다가왔다.
“알겠어요.”
오르페가 고개를 끄덕인 후 목청을 높였다.
“마탑주는 우리를 기계의 부품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나가 실려서 그런지 아주 쩌렁쩌렁하다.
“세계라는 기계를 돌아가게 하는 부품!”
발성이 꽤 좋다. 지구였으면 애니메이션 성우를 했을지도?
“하지만 우리는 부품이 아니라 사람입니다! 사람은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지금 오르페가 맡은 바람잡이, 아니, 선봉에서 소리 지르는 역할은 원래 내가 맡기로 했다.
“잘못된 선택을 한다 해도, 그 선택을 만회할 기회를 잡는 건 우리의 몫!”
그래서 불교적 가르침과 함께 천마에 대한 경각심을 일깨워 주기 위해 열정적으로 준비했지만.
“정체 모를 괴물이 아니라, 우리가 결정할 겁니다!”
내 말을 알아듣는 새끼가 한 명도 없어서 그냥 오르페에게 넘겼다.
대사를 끝낸 오르페가 창을 들어 올렸다.
황금으로 빛나는 창과 갑옷, 투구, 방패가 꽤 위압감이 있다.
투구에 구멍만 안 났으면 더 좋았을 텐데.
“우린 사람이니까!”
끼요옷~! 하는 소리와 함께 저항군이 움직였다.
“돌격!”
유검경 아가사, 환검경, 강검경, 용병왕 베아트릭스를 위시한 기마 부대는 전열탱커를.
“포위해서 몽둥이로 때려라!”
뚜벅뚜벅 열심히 달리는 새튼과 보니타를 비롯한 모험가들과 비앙카같은 흰돌고래 전투원들이 근거리 딜러를 맡고.
“발사해라! 발사해! 저 얼간이들에게 우리 투명도마뱀 마탑의 힘을 똑똑히 보여줘라!”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는 티치타크와 릴리아, 16살인 윌리엄과 마법사들이 원거리 딜러를 맡았다.
티치타크의 지휘 아래 투명도마뱀 마탑 직원들이 마법 지팡이를 어깨에 올렸는데, 그 모습이 마치 바주카포를 발사하려는 테러리스트 같았다.
탱커, 근딜, 원딜.
이제 힐러만 있으면 완벽한 조합이다.
뭐, 힐러는 모두의 아이돌인 이 신노빈이 맡으면 된다.
내 존재 자체가 힐링이니까.
“네루토 달리기.”
퍼스트 블러드(먼저 죽이기)를 뺏길 수는 없다. 아주 빠르게 달려서 아군을 앞질렀다.
내 역할은 간단했다.
“와자뵷!”
다 때려 부수고 몰살하기.
저항군 미니언과 함께 움직이는 챔피언 유닛이 나다.
“사시미 살법.”
촤라락! 퍼버벙!
한 번의 공격으로 적들의 마법 전차가 연쇄폭발을 일으켰다.
“사시미 살법 한 번 더!”
원래 많이 사용하기 힘든 기술인데, 비탄의 쇼군을 잡고 나서 기량이 상승했는지 연발도 큰 문제는 없었다.
고마워, 제이드!
그렇게 계속 몰살을 하면서 마탑을 향해 달려갈 때였다.
쿠구구구구!
천지가 울리는 소리와 함께, 마탑 앞의 대지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그리스 로마 신화의 티탄과도 같은 생김새의 여성형 거인이었다.
아니, 거인이라도 부르기도 좀 그렇다. 몸이 에너지로 이루어져 있는지 새하얗게 빛났으니까.
“이런 씨발! 이게 뭐야!”
“무, 무슨 괴물이!”
이르갈 왕국 병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얘네들은 들은 게 없는 모양.
하지만 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제육천마왕이여, 본색을 드러냈구나.”
여섯 쌍의 날개를 가진 이 에너지 거인이 천마 모니카 소버린이라는 걸.
고풍스럽고 멋진, 신화적인 느낌을 풍기는 갑옷을 입은 거인의 눈이 붉은빛을 뿜어냈다.
탈주닌자.
그 시선이 나를 향했고, 곧이어 내 머릿속에서 모니카의 목소리가 울렸다.
입이 달려 있어도 육체가 아닌 에너지라 직접적인 말은 못 하는 건가.
말했지. 후회하게 될 거라고.
50m가 넘어가는 레이드 보스가 된 모니카가 아군 진영을 향해 거대한 낫을 휘두른다.
“궤도 폭격의 술.”
부아아아아아앙!
보고만 있을 내가 아니다.
***
오르페가 가쁜 숨을 토해냈다.
얼마나 싸웠을까.
로빈이 만들어준 길을 따라 열심히 달렸고, 뒤따라 온 소수의 기사와 함께 마탑을 향해 전진했다.
“이 꼬맹이! 오랜만이잖아!”
한 남자가 웃으면서 오르페의 앞길을 막아섰다.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혼났는지 알아? 절벽에서 떨어졌길래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어떻게 살아있는 것인지 원!”
“벨더가드.”
그녀의 가족과 이르갈 왕국의 왕족을 암살한 장본인이었다.
아니, 암살이 아니라 일방적인 학살에 가까웠다.
보름달이 뜬 밤에 일어난 그날의 일을 오르페는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이 아저씨 말상대나 좀 해줄래? 갱생대원들이 전부 죽어서 말이야! 난 주변에 말을 걸어줄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지거든!”
오르페가 말없이 황금 창에 맺힌 피를 털어냈다.
“이야, 살벌하네...그래도 말은 걸어주는 게 좋을걸?”
벨더가드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가벼운 갑옷을 입은 그는 무기조차 들지 않은 상태였다.
“조용해지면, 내면의 야수가 말을 걸어와...”
아직도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내게 속삭이고...명령하지…!”
쾅!
예고 없는 큰 소리에 두 사람 모두 뒤를 돌아봤다.
붉은 기운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낫을, 푸른 마나가 막아내고 있었다.
은발을 휘날리는 붉은 눈의 거인과 그에 맞서는 작은 남자.
신화 속 한 장면을 재현한 것 같았다.
“시작됐네! 정말 대단하지 않아? 저들은... 신이야.”
그 광경에 매료된 벨더가드가 감탄을 내뱉었다.
“바다를 가르고, 하늘을 날고, 대지를 움직이지. 한 번의 움직임으로 세상을 바꿔. 우리 같은 평범한 인간들은 짓밟히거나, 순응할 수밖에 없지...”
“너나 나나 평범한 인간은 아니지.”
오르페는 그날에 갈색 털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짐승으로 변하는 벨더가드의 모습을 봤다.
지구인과 토착민의 혼혈인 오르페처럼, 벨더가드 또한 이계인의 혼혈.
“뭐, 그렇지.”
벨더가드가 갑자기 자기의 머리끄덩이를 잡고 비틀었다.
“아아아아!”
살갗이 갈라지면서 몬스터의 머리가 나왔다.
챙!
“칫…!”
변신을 마치기 전에 죽이려고 창을 휘두른 오르페의 공격은 마법 보호막에 막힌 상황.
우수수
순식간에 인간의 껍데기를 벗어낸 벨더가드는 늑대와 인간이 섞인 본모습을 드러냈다.
“그럼, 시작해볼까!”
늑대인간으로 변한 벨더가드가 오르페에게 달려들었다.
* * *